건축의 신 345화
네고(03)
착신음이 끊어졌다.
-여보세요?
“엉? 알리가 아닌데? 알리 왕자 전화 아닌가요?”
-맞습니다만…….
알리의 전화를 대신 받을 사람은?
대뜸 감이 왔다.
“안녕하세요. 집사님.”
-누구신지요?
“벌써 목소리 잊으셨나 보네요. 저 성훈이에요. 성훈이!”
-아!
전화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성훈 님이셨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곽 이사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사장을 비롯한 이사들은 그때의 삭막함과 긴장감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알리는 어디 가고, 집사님이 전화를 받으세요?”
-왕세자 전하께서는 지금 국왕께 저녁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아! 저기 나오십니다.
“그래요. 별일 없죠?”
-저희야 별일 있을 게 있습니까? 성훈 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하의 즉위식을 보시고 갔으면 좋았을걸. 아! 제가 보내드린 즉위식 영상은 보셨습니까? 같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누구야?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훈 님이십니다. 바꿔 드리겠습니다. 시간 되시면 언제든…….
-내놔!
아쉬워하는 집사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알리 왕자가 전화기를 들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이 사기꾼 동생놈아!
“누가 사기 쳤다고 그래요?”
성훈의 고함에 이사들의 안색이 파래졌다.
‘저 알리 왕세자에게 고함을 치다니! 아무리 친해도…….’
곽 이사와 일부의 사람들은 고함보다는 알리의 말에 놀랐다.
‘동생?’
주변 사람의 반응과 상관없이, 성훈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부왕께서 보고 싶어 하신다. 얼른 와라.
“일이 시작돼야 가죠. 참! 그 공사 견적 때문에 전화했어요.”
-응. 2억 조금 넘게 나왔던데, 왜?
“사인했어요?”
-아니?
“응. 그렇구나.”
-왜?
“그거 잘못된 견적서예요.”
-엥? 왜? 네고까지 다 되어 있던데? 그럼 마지막으로 검토했다는 거잖아!
“잘못되었으니까, 찢어버리세요.
-뭐가 잘못된 건데?
그의 심각한 목소리와 달리, 옆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고 없는 금액으로 갈 거예요.”
그의 사업가적 기질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왜! 이런 대공사를 하는데, 네고가 없다고?
“네!”
-한 푼도?
“네!”
성훈이 단언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로 가면 현재 건설이 손해를 봐야 돼요. 저는 제 사람들, 힘든 거 못 봅니다.”
곽 이사의 가슴이 울컥했다.
‘자기 사람이라니,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신다는 말인가?’
다른 이사들은 또 다른 관점에서 가슴이 아렸다.
‘어린놈이 건방지다고, 항상 무시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네고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2,135만 불에 3,000불 정도가 더 붙으면……. 최하 5,000불이 넘는구만.’
속닥거리던 이사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헉! 거의 순익만 800억 원인가?’
‘그럼…… 단일 수주로 순수익이 이 정도 되는 게 있었던가?’
‘기다려 봐! 아직 승낙한 게 아니잖아.’
회장과 사장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애사심, 애사심,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안 되는 게 그것 아니던가.
‘그걸 이 어린 녀석이…….’
그리고 이어지는 알리의 말에 모두의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어차피 네가 인수할 리야드 호텔이다. 그 정도는 투자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니냐?
‘인수를 해? 그 호텔을?’
하지만 성훈은 별 감흥이 없는 듯 태연했다.
“아직 주지도 않아놓고는 무슨, 투자를 말해요?”
-끄응!
“쪼잔하게 푼돈 가지고 그러실 거예요?”
-내가 고작 그깟 푼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뭔가 약이 오른 듯한 목소리였다.
‘이거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은데?’
웬만하면 양보를 하던 알리가 아니던가?
성훈이 말했다.
“알리. 연회장에서 제가 말했었죠?”
전화기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무슨 말?
“제 작품은 비싸다고요.”
-그때, 카심 형에게 했던 말 말인가?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건 카심에게 했던 말이잖아?
“아니죠. 당연히 당신과 압둘에게 했던 말이죠. 전 애초에 카심과 거래할 마음이 없었어요.”
우리의 대화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 알리. 줘봐! 오! 성훈. 마이 프렌드!
예상한 대로 압둘이었다.
알리 옆에서 저리 편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가 인사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른 말도 했었지. 크! 지금 생각해도 쩌릿쩌릿한 한마디였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
알리의 투덜거림에 압둘이 대사를 읊었다.
-‘내 장인들의 땀방울은 비쌉니다. 고작 땅에서 나는 석유 따위와 비교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석유 신봉자인 그, 카심 앞에서 말이야!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이런 녀석이라고!
압둘의 말에 알리는 신음성을 삼켰다.
-크으.
“전 네고 안 합니다. 차라리 일을 더 해주면 더할망정! 제 손으로 제 몸값 깎는 짓은 절대…….
-안 하지! 암! 그래야 성훈이지!
-압둘! 나중에 네놈 호텔도 공사해야 한다는 걸 잊은 거 아닌가?
알리의 엄포에 압둘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하기는 할 건데, 지금 심각하게 고민이 되는군. 큭큭!
-네놈 호텔 계약할 때, 옆에서 웃어주겠다! 킁!
알리에게 물었다.
“어떡할 거예요?”
-인정해! 그 녀석은 올리면 올렸지, 제 손으로 깎아줄 녀석이 아니라니까!
-끄응!
-성훈. 알리 녀석, 지금 당황하고 있어. 누가 맞는지 내기했거든.
“크. 무슨 내기를 했는데요?”
-성훈. 네가 양심이 있는지 없는지 말이야.
“네? 제 양심?”
-난 성훈, 네가 절대 네고 따위를 해 줄 리가 없다고 했고! 알리는 ‘그래도 내 동생이 양심은 있군!’ 이라고 했거든. 크하하하!
“양심은 무슨? 일 이야기하는데?”
알리의 고함이 들렸다.
-야! 이 양심도 없는 놈아! 호텔을 통째로 가져가면서, 이 코딱지도 안 되는 돈을 네고 안 하겠다는 말이냐?
알리의 탄성이 이어졌다.
-그래도 나는 동생이라고, 이것만큼은 믿었건만!
-믿을 인간을 믿어라! 저 친구가 돈 앞에서 물러서는 거 봤어? 응?
-어차피 네 거 아니냐? 이 정도는 양심이 있다면 양보해라!
‘이 사람들이?’
지금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이 양반들이 진짜! 이래서 내가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그냥 조용히 호텔 수익금만 들어오면 되는데, 괜히……!
둘의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었다.
“알리. 압둘!”
-응. 왜?
“지금 스피커폰으로 통화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식구들 다 듣고 있어요. 현재 건설 이사들.”
순간 전화기에서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알리의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커험! 거기 사장도 있나?
국왕에 어울리는, 더할 나위 없이 근엄한 목소리였다.
‘이미 늦었어. 이 양반아!’
“네!”
-그럼 사장은 들으시오.
뜬금없이 호명된 사장이 놀라서 사레가 들렸다.
“케켁!”
다급히 물 한 잔을 들이켜며 말했다.
“말씀하시지요. 왕세자 전하.”
-이 계약서는 폐기하겠소!
“네. 네. 전하.”
-네고 없이 다시 보내주시오.
“아! 네. 알겠습니다.”
사장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이쪽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데, 알리 옆에서는 압둘이 배를 쥐고 구르는 모양이었다.
끅끅대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도 왕자이긴 마찬가진데. 쯧쯧. 긴장이 풀려서는…….’
알리가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훈. 이따 다시 전화하게. 사적으로 할 말이 있으니 말일세.
“네. 알았어요. 끊어요.”
딸칵!
“후우!”
기다리기라도 한 듯, 사방에서 동시에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 그동안 숨죽이고 있다가, 한꺼번에 호흡을 들이킨 모양이었다.
성훈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사장님!”
“으, 으응.”
“들으셨죠? 견적서 다시 보내시면 됩니다. 네고는 없습니다.”
사장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네.”
“이러면 신세 진 거 없는 거죠?”
성훈의 너스레에 사장이 멋쩍게 웃었다.
“그래. 잘 받았다.”
성훈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전 또 일이 있어서 가볼게요. 회장님도 살펴 가십시오.”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회장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생했네. 가보게.”
***
“알리 왕자와 호형호제하던데?”
“소문이 과장된 게 아니라, 축소된 거였어!”
이사들의 웅성거렸고, 곽 이사도 정신이 없었다.
‘알리 왕자의 동생? 압둘 왕자의 친구? 호텔 인수? 친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뭐!’
넋을 잃고 있는 그를 옆에서 쿡 찔렀다.
“곽 이사.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런 걸 숨기고 있었냐고?”
“하하하. 알고 있었지. 암! 알고말고.”
그는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본인이 말하기 싫어하는 걸 내가 어떻게 말해?”
“캬! 자네가 확실한 사람을 잡았구만. 우리도 그쪽 라인에 서면 안 되나?”
곽 이사가 회장 부자의 눈치를 보며, 억누른 소리로 역정을 냈다.
“두 번 다시 그런 소리 하지 말래도. 내가 말할 때까지는 꺼내지도 마! 알았어?”
“끙. 알았네.”
“그리고 호텔이 니꺼라는 소리는 또 뭐야?”
곽 이사의 골이 띵 했다.
‘애초에 인센티브 10%는 코딱지도 안 되는 거였구만. 저런 사람들이랑 어울렸으니…….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지.’
그의 가슴을 채우는 것은 두려움과 경이였다.
‘이건 뭐! 현재 건설 후계자가 문제가 아닌데?’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지 않은가?
성훈의 최측근이라 자신하는 그가 말이다.
‘확실한 건 성훈 님이 기지개를 켜는 순간, 게임이 끝난다는 거지!’
가능성 없는 소리가 아니질 않나?
저 왕회장도 긴장하고, 사장을 사레들리게 하는, 알리 왕자와 농담을 하며 일을 가져올 정도인데.
‘사실은 뜯어온 거지! 3천만 불을 푼돈이라고 하면서.’
거기다 압둘 왕자는 덤이지!
곽 이사의 충성심이 더욱 굳어졌다.
“허허허. 이거 참!”
제 이마를 탁 치는, 회장의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캬! 이거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는데?”
사장 또한 옆에서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넋 놓고 맞았는데요!”
회장이 사장에게 말했다.
“야! 봉준아! 니 자리. 절마한테 주믄 안 되겄나? 지금 당장 시키도 니보다 더 잘할 거 같은데?”
회장의 농담을 사장이 맞받아쳤다.
“그러고 싶습니다. 저 녀석한테 맡기고 전 돈이나 세고 있을까요? 하하하.”
“아이다. 니는 주식부터 간수 잘해야 되겠다.”
“왜요?”
“절마가 욕심 내믄 니 주식, 쥐도 새도 모르게 빼앗길 테니까, 잘 때도 품에 꼭 안고 자야 안 되긌나? 크하하!”
회장 부자의 농담이 이사들의 가슴에 팍팍 들이 꽂혔다.
사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떻게 말 한마디에…… 3천만 불을 땡겨옵니까?”
회장도 기분 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앞으로 사장 니는 중동 일 따올라믄, 성훈이한테 잘 보이야 되겠다. 으잉! 그 옆에 쿠웨이트 압둘 왕자도 안 있드나?”
“그러게 말입니다.”
***
회의가 끝났다.
곽 이사 주변으로 이사들이 모였다.
“곽 이사. 그…… 소문 진짜였소?”
그는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다.
“무슨 소문 말이오?”
“그 왕회장님의 사생…….”
“어허! 그게 무슨 소리요?”
“그게 아니면, 회장님께서 사장님을 젖히고, 성훈 군에게 사장 자리를…….”
곽 이사가 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거참! 입 조심하시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소?”
“그야 당신이…….”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다 안다는 눈빛으로 곽 이사를 은근히 보고 있었다.
“솔직히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소. 지금은 솔직히 모르겠소.”
그의 시치미에 박 이사가 다그쳤다.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아오? 당신보다 성훈 군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는데? 뭔가 확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챙긴 것 아니오?”
“무슨 확신?”
박 이사가 은근한 말로 물었다.
“당신이 1년 전에 성훈 군과 같이 사우디에 갔다 온 뒤에,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 달라졌었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압니다.”
그 말에 곽 이사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입이 근질거리지만,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성훈의 정체는 추측일 뿐, 아무런 근거는 없다.
‘아무 근거도 없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 리도 없고.’
성훈에게서 찾을 수 있는 단서는 하나뿐이었다.
‘정말 그럼…… 왕회장님의 핏줄…….’이라는 그의 질문에. 다리 꼬며 한마디 했을 뿐이다.
‘그걸 확인하고 나니, 사람이 달라 보입니까?’
그때 회장의 핏줄이라 확신했었다.
‘그런 카리스마는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니라고!’
그러나 확답을 받은 것이 아니기에, 내심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의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뭐가 중요해? 격이 다른데?’
피식 웃으며 곽 이사가 말했다.
“박 이사. 내 한마디만 하겠소!”
“뭘 말이오?”
“우리 계열사 사장들 중에 아랍 왕자들과 저렇게 통화할 수 있는 사람 있소?”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이 나왔다.
“없지요.”
“거 보쇼! 격이 달라. 격이!”
곽 이사가 말을 이었다.
“설령 왕회장의 핏줄이 아니라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자력으로도 가능한 분이라는 말이지. 아니오?”
비릿하게 웃는 곽 이사의 눈동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건…….”
“몇 년 만 기다려 보시오. 이 현재 건설은 성훈 님 없이는 돌아 가기 어려울 테니.”
고민하는 그를 보며, 곽 이사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성훈 님을 잡은 게, 신의 한 수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