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36화
KT 프로젝트(04)
“어디 건가?”
일의 발주처를 묻는 것이리라.
“알리 왕자의 리야드 호텔이요.”
성훈의 말에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리야드 호텔이라. 그럼 인테리어 관련이겠구만.”
호텔을 새로 지을 것도, 외장을 리모델링할 것도 아니니, 남은 것은 그것뿐이리라.
성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나머지 책자들을 꺼냈다.
쿵! 쿵!
성훈은 아까의 도면 말고도 두 권의 책자를 더 꺼냈다.
탁자가 울릴 정도로 묵직한 책자들.
성훈이 꺼내놓은 것은 A3 크기의 도면 책자였다.
사장이 혀를 내둘렀다.
“어마어마하구만.”
“그럼요. 자그마치 한 권에 700페이지가 넘는다고요.”
“그런데 이건 뭔가?”
“뭐긴요. 도면이죠.”
하지만 사장이 가리키는 것은 도면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말이야.”
페이지마다 끼워져 있는 트레싱지였다.
“아! 그거 막 빼시면 안 됩니다. 각 부분 관련 자료에요. 아직 시간이 없어서, 페이지 기재를 못 했어요.”
사장이 뜨끔하여 손을 멀리했다.
“그런가?”
사장이 객쩍게 말을 이었다.
“휘유. 장난이 아니게 많구만!”
“어쩔 수 없잖아요. 건축은 말로만 이뤄지는 게 없으니까요.”
“그렇지. 이렇게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가장 확실하기는 하지.”
사장이 혀를 내두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페이지마다 첨부된 트레싱지로 인해서 책자는 거의 정육면체에 가까운 두께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알리를 사흘 동안 괴롭히며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사장이 흐뭇한 눈으로 말했다.
“하하. 이렇게 묵직하다니. 고생이 많았겠군.”
“고생이라뇨? 전 재미있었습니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재미있었다라……. 그런데 한번 봐도 되겠나?”
“그럼요! 보여드리려고 가져온 걸요.”
이걸 보고 견적을 내야 한다고.
견적을 내고 자재 구매하는 일에는 이골인 난 곳이 바로 건설회사일 것이다.
매일 하는 게 이런 걸 텐데, 얼마나 빠삭하겠어?
“트레싱지 빠지지 않게만 조심해 주세요.”
첫 페이지를 확인한 사장의 미간에 주름이 어렸다.
“이건 한국 전통문양이 아닌가?”
“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성훈이었지만, 사장은 손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이렇게 해달라고 했다고?”
“네. 알리 왕자의 컨펌을 받은 겁니다.”
알리의 허락이 있었다는데, 더 딴죽을 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인상은 풀어지지 않았다.
“흐흠. 이게 먹힐 거라 확신하는 건가?”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이번 박람회를 보고 마음에 들었나 봐요.”
“흠. 그래? 그래도 모험적인 요소가 적잖이 있을 텐데…… 알리 왕자, 배짱이 좋군.”
사장의 우려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초의 한류 바람은 앞으로 일어날 바람에 비하면 산들바람에 불과했으니까!
‘지금은 설명해도 소용없지.’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수많은 데이터와 예측들, 그 모든 것들은 그 일이 일어난 후에, ‘아! 그래서 그런 징조가 있었구나!’하는 정도의 반응을 할 수 있을 뿐.
그 수백 가지 가능성 중, 이뤄지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미래는 아무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지금 눈에 보이는 건 일부 아이돌들의 해외 진출, 그리고 한국 드라마의 인기 정도뿐이니까.’
하지만 곧 세계가 들썩거릴 겁니다.
앞으로 세계를 휩쓰는 것은 첨단 기술이나 산업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열풍!
그 선두를 한국 문화가 차지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내가 팔고 싶은 건, 건축 기술이나 근면·성실한 인력이 아니야!’
세계를 뒤덮을 문화 열풍에 한국 건축이 선두를 주도하게 하고 싶은 거지.
한류 붐은 아이돌로 시작했지만, 그다음은 한글로, 한복으로, 한식으로 그 범위를 넓혀나갔다.
60억 인구 중에서 한국과 관련된 걸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다른 분야들이 선전하는 동안. 건축은 뭐했는데?’
한복은 가벼워서, 음식은 맛있어서, 건축은?
어떻게 해! 어렵잖아?
개소리다.
무능한 전통건축 관계자의 핑계일 뿐.
예로부터 건축은 한 나라 산업의 중추였고, 그 나라의 기술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였다.
얼마나 웅장하며, 얼마나 아름다운가?
건물만 봐도, 그 나라와 민족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었다고.
오죽하면 돌덩어리 쌓아 올린 피라미드가, 고대 문명의 대표작이겠는가?
먹으면 없어지고, 입다가 삭으면 사라질 것들을 팔아서 세계인들에게 한국 문화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잠시 유행으로 끝나겠지.
허나 공든 탑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지.
‘하지만 사장과 나는 처지가 다르지.’
나에게 건축은 유일무이한 아이템이다.
할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지.
다른 건 별로 흥미도 없고.
하지만 사장은?
돈을 벌기 위한 아이템 중 하나가, 건축이 되었을 뿐이지.
만약 왕회장이 건축이 아닌 다른 것을 맡겼다면?
그의 특기는 건축이 아니라, 경영이라고.
‘이런 입장 차가 행동의 차이를 만들어내지.’
고로 한국 건축이 잘될 거라는 설득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돈이 안 되면 그에게는 무의미하니까.’
적어도 지금은!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게 확실하지! 돈이 될 가능성.’
“압둘 왕자의 호텔 쿠웨이트 소식은 들으셨죠?”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들었네. 고객이 어마어마하게 몰렸다더군.”
“대단했죠.”
사장도 수긍했다.
“사실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업계 일위를 차지했더군.”
하지만 여전히 의문을 이어갔다.
“실바람 하나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는 어렵지. 일단은 좀 더 추이를 더 지켜봐도 될 텐데……. 하는 말이지.”
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으로 봤을 때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기업의 자본금을 보존하고, 수만의 직원들을 간수해야 하는데, 무모한 모험을 할 수는 없겠지.
‘오히려 작품의 잠재가치를 잘 아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라고.’
아쉽긴 하지만, 사실이라고!
“그래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하는 거겠죠.”
“그래. 뭐 우리야 해달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만.”
그 말을 끝으로 사장은 도면에 집중했다.
페이지를 넘어갈수록 사장의 눈이 진지해졌다.
‘이건 뭐지?’
처음 객실을 봤을 때는, ‘객실 일부를 받아왔구나!’하고 생각했었다.
‘나라면 절대로 전부를 하지 않을 테니까? 이건 무모할 정도로 모험이라고.’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 전통문양만 있는 것이 아녔다.
어떤 것은 전통과 이탈리아의 퓨전으로. 혹은 유럽 중세의 느낌을 내기도 했다.
손으로 그려진 투시도만 봐도, 어떤 느낌이 날지 감이 왔다.
‘그런 게 열 종류가 넘는다고!’
하지도 않을 디자인을, 이렇게 신줏단지 모시듯 할 놈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 다 하겠다는 말인데…….
‘대체 객실 몇 개를 이렇게 하겠다는 거지?’
사장이 물었다.
“리야드 호텔에 객실이 모두 몇 개인가?”
“970개요.”
“으음. 디자인으로 몇 개를 하기로 한 건가?”
“400개요.”
“그런가?”
사장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어렸다.
‘객실 하나당 대충 25평, 그럼 호텔이니 평당가 200만 원으로 계산해도, 한 객실당 5,000만 원이 나오겠군.’
얼마 전 국내 5성급 호텔을 그 정도 가격으로 공사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게 400개라, 200억이군.’
사장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어지간한 이사보다 나은걸.’
이 정도 일거리야, 어지간한 영업팀이면 따올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사장이 성훈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다른 이유였다.
‘혼자서, 영업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다고!’
기껏해야 사우디아라비아에 다녀온 비행기 값이 청구한 비용의 전부였다.
이런 성과를 거둔다면, 그 백 배를 비용으로 처리해 달라고 해도 해 줄 의향이 있었다.
사장이 도면을 옆으로 치우며, 흐뭇하게 웃었다.
“자네의 호언장담이 이유가 있었군. 처음치고는 꽤나 물량이 많아.”
“네. 일단은요. 그런데 나머지는 안 보셔도 되겠습니까?”
“뭐 다 볼 거 있나? 이미 400개의 객실로 자네 실력을 충분히 증명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400개가 전부가 아니라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느긋하게 등을 기댔던 사장이 놀라서 움찔하며 몸을 바짝 앞으로 당겼다.
“그럼? 얼마나 더!”
“전부 다 하기로 했거든요. 로비랑 홀까지.”
“뭐라고? 호텔 전부?”
“네. 저는 그것에 관련된 전체 견적이 필요합니다.”
왜 이게 중요하냐고?
당연히 내가 하면, 빠뜨리는 것이 생긴다.
하지만 현재 건설에서는 그 오류를 거의 없앨 수 있지.
‘그 전체 견적을 알아야, 제가 쓰고 싶은 자재와 인력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거든!’
사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렸다.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알리 왕자가 성훈에 대한 호감이 있고, 또한 신세 진 게 있으니, 어느 정도 체면을 세워준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객실 400개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거 아닌가?’
그런데 뭐라고? 통째로 다 준다고?
‘이게 가능해?’
성훈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확실히 알리 왕자의 컨펌은 받은 거겠지?”
“네. 확실합니다.”
자신만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얼마 전 국내 5성급 호텔 인테리어 비용이 평당 200 정도라고 했었지.’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알고 모르고는 중요한 게 아니야. 이건 알리 왕자가 성훈을 확실히 밀어주는 거라고.’
그럼 이야기가 달라진다.
좀 더 단가를 올린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지.
그럼 총면적 6만 평. 평 단가 250만 원.
‘그래도 돼!’
단박에 사장 머릿속의 단가가 수정되었다.
25%로 수직 상승!
고급 호텔이니,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자재를 쓴다고 해도, 이 정도면 충분히 이득이지 않겠는가?
해외에서 일한다는 것을 고려해도 충분하지.
‘하기만 한다면, 가볍게 천오백억은 넘어간다.’
계산이 완료되니, 감탄이 나왔다.
‘허! 이놈 이거 괴물일세.’
이걸 하겠다고 덤비는 녀석이나, 그걸 또 하라고 맡긴 알리 왕자나.
무시무시한 콤비 둘이 만들어낸 작품이구만.
“흠. 대공사가 되겠군.”
성훈이 말했다.
“총 공사 기간을 일 년 잡고 있습니다.”
“일 년이라…….”
‘대단한 녀석!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건지는 알고 있는 건가? 이 정도면 150억이 아깝지 않지.’
작년 해외 수주액이 2조가 조금 넘었던가?
가뿐하게 7.5%에 육박하지 않는가?
‘이 녀석 하나가 말이야.’
날고 긴다는 이사들도 이 정도는 못한다고!
사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성훈?”
“네. 말씀하세요.”
“예상 견적을 얼마 정도로 생각하나?”
‘네가 얼마를 가져갈지나 알고 있냐?’는 물음이었다.
잠시 입술을 이리저리 구기던 성훈이 말했다.
“글쎄요. 세밀한 계산은 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성훈이 말을 이었다.
“일반적인 호텔이라면, 대충 일억 불 정도 되지 않을까요?”
사장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대충인 것치고는 정확하구만…….’
그러나 성훈의 다음 말에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 호텔은 일반적인 게 아니거든요. 대략 2억 불 정도로 계산하고 있어요.”
“이, 이억 불? 진심인가?”
견적이란, 돈을 주는 상대방이 인정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상대의 예상을 뛰어넘거나 부담스럽다면, 견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공사 자체가 물 건너간다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데…….’
사장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음. 생각이 있겠지만, 그건 좀 과한 금액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네.”
“아뇨. 전 전혀 과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더 받는 만큼, 만족할 수 있는 품질을 만들어 줄 테니까요.”
성훈은 전혀 고집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건 아무리 성훈이라도 안 돼!’
이건 알리 왕자의 호의를 걷어차는 거라고.
그는 곽 이사가 혀를 내두르는 인물이다.
‘단가를 가지고 장난치는 걸, 과연 그냥 넘어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암!’
두 배나 단가를 주며 일을 시킬 리가 만무하다.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
왕자를 분노하게 했다가는, 일 자체가 무산될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다음의 일 또한, 성사시키기 어렵지.’
사장이 말했다.
“성훈 군. 잠시 실무자와 이야기를 해보지 않겠나?”
실제 현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들려주며, 설득할 생각이었다.
성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저도 실무자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사장이 수화기를 들었다.
“서 전무 하고 황 전무 있는지, 확인해 봐! 있으면 바로 내 방으로 오라고 해.”
약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중동 통이라면 응당 곽 이사를 부를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을 부른단 말이야?’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게.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