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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334화 (334/427)

건축의 신 334화

KT 프로젝트(02)

장인들과의 이야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디자인했던 것들의 대략적인 협의였으니까.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대목장 어르신. 지금 하시는 거 끝나시고 바로 올라오세요. 민수도 데리고요.”

대목장도 일어서며 말했다.

“알았다. 이놈아! 그리고…….”

곽 이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사님. 우리 성훈이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아무것도 모르니까, 좀 잘 가르쳐 주십시오.”

대목장의 뜻밖의 청탁에 놀란 곽 이사가 손을 빼려고 하자, 더 강하게 움켜잡으며 사정했다.

“혹여 기분 상하시는 게 있더라도, 어린놈이라 눈치가 없어, 그러려니 하시고…….”

“하하하. 성훈 군이야, 워낙 유능해서…….”

곽 이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누가 누구 눈치를 봐야 하는데, 이 어르신이 눈치도 없이…….’

다른 노인 같았으면, 손을 뿌리치며, ‘감히 누구에게 청탁을 하느냐!’며 호통을 쳤겠건만.

성훈이 대목장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법!

맞잡은 손보다 고개를 낮추며, 되레 사정했다.

“아이고. 어르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잘 부탁드려야지요. 이렇게 성훈 군과 민수 군이 현재로 와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어르신. 이러시면 안 됩니다.”

대목장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평생직장의 개념이 없어졌지만, 이분들 세대는 다르지.

한번 직장에 들어가면, 미우나 고우나 평생을 부대껴야 할 사이이니, 부모의 입장에서 어찌 걱정이 되지 않으랴!

게다가 곽 이사는 성훈의 까마득한 상관!

곽 이사에게 눈을 꿈뻑하며 눈치를 줬다.

‘언제까지 그렇게 악수하고 계실 거예요? 집에 가셔야죠!’

“아이고. 어르신. 아무 염려 마십시오. 성훈 군과 민수 군을 제가 모릅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마음 푹 놓으십시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아직도 대목장은 손을 놓지 않았다.

곽 이사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곽순일! 목숨 걸고 막아낼 터이니! 아무, 아무 염려도 하지 마십시오.”

그제야 손을 놓으며, 인사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사님.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대목장의 입발린 소리에 곽 이사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하! 하! 하!”

“성훈이 이놈아. 넌 인사 안 하고 뭐 하는 거냐?”

“네!”

건성으로 고개만 까딱였다.

“어이구. 내 네 녀석이 이러니,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느냐?”

“또 왜요?”

그는 곽 이사가 운전하려고 차 열쇠를 빼는 걸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아. 너는 이사님께 운전을 시킬 참이냐?”

“에? 내 차도 아닌데!”

곽 이사도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어르신. 그것이…….”

“얼른 받지 않고 뭘 하느냐? 이놈!”

평소에는 조용하면서, 상하 관계에는 유독 민감한 대목장이었다.

곽 이사가 말했다.

“어르신. 저는 제가 운전하는 게 편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올라갈 때라도 편하게 가셔야지요. 얼른 녀석에게 넘겨주십시오. 저놈이 성격은 급해 보여도 운전은 안전하게 잘합니다.”

“어, 어찌 제가…….”

우물쭈물하자, 손수 차 키를 받아서는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사님. 잘 모시고 올라가라. 가다가 졸지 말고. 응?”

“네! 알았어요.”

“괜히 이사님 쉬시는데, 운전 험하게 하지 말고.”

“알았다니까요. 들어가세요.”

대목장들의 배웅을 받으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은 곽 이사가 이마의 마른 땀을 훔치며 말했다.

“성훈 님!”

“왜요?”

“다음에 저 어르신한테 올 때는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네?”

“저는 빠져 있겠습니다.”

아까 대목장의 부탁에 많이 당황했으리라.

누가 누굴 부탁해!

“아직 대목장께서는 성훈 님에 대해 잘 모르시나 봅니다.”

모르는 것도 있지만, 손자 같아서 그런 것이리라.

설령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대목장은 내가 평생을 함께 가야 할 보물이었다.

그의 손과 축적된 경험이 내 작품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줄 테니까!

***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 킹메이커께서 오셨구만!”

책상에서 나와 소파로 다가오며 성훈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래! 일을 따온다더니, 성과는 좀 있었나?”

곽 이사를 통해 일을 가져온 것은 알고 있겠지만, 정확한 규모는 모르는 듯했다.

궁금해 하는 모습이 그걸 말하고 있었다.

“뭐 약간요.”

“그래. 알리 왕자와 관련된 거겠지?”

“네. 알리 왕자의 호텔 건입니다.”

사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복덩이가 굴러들어왔어. 하하하. 그런 인맥이 있을 줄이야.”

차를 권하며 말을 이었다.

“한잔 들게. 그런데 알리 왕자하고는 아주 친근한 사이라면서, 압둘 왕자하고도 그렇고 말이야.”

‘아주 친근? 곽 이사, 아주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쳤군.’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운이 좋아서 얼굴 봤고 몇 마디 한 사이입니다.”

성훈의 그 말에 사장이 눈매를 좁혔다.

‘뭐? 그렇게 친하지는 않아? 곽 이사 말로는 네 녀석 말이라면, 둘 다 껌뻑 죽는다던데?’

하지만 곽 이사가 말하면서도,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성훈이 그런 거 질색한다면서.

‘보통 이 나이 또래는 능력을 드러내지 못해서 안달인데, 이 녀석은 참 독특하단 말이야.’

당사자인 성훈이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하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나.

‘이런 친구가 영업을 하면 딱인데 말이지.’

중동 통인 곽 이사조차 혀를 내두르는 성훈이었다.

‘말이 왕자지, 그런 짠돌이들이 없습니다. 그런 왕자들을 후려치는 성훈 군입니다. 이제야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번의 알리 호텔 건도 성훈 군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일 따왔는데, 딴 얘기만 하시깁니까?”

성훈의 말에 사장이 뜨끔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잘 구슬러 봐야겠군. 친하지는 않다고 해도, 일단 말을 붙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게 어디야?’

세상 모든 일이 인맥으로 이뤄진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니던가?

‘녀석을 이용해서 알리 왕자나 압둘 왕자에게 연줄을 댈 수도 있는 거고 말이지. 언젠가 히든카드로 써먹을 일이 있을 거야.’

속내를 숨기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어떤 일을 가져 왔는지 볼까? 내가 충분히 만족할 만한 일이어야 할 거야! 흐흐.”

사장은 엄포를 놓으면서도, 기분 좋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상대가 알리 왕자라고! 못해도 수십억대의 일은 될 거란 말이지.’

성훈이 가져온 도면을 책상 위로 꺼냈다.

하지만 그 순간, 사장의 눈이 번뜩였다.

“엇!”

“왜요? 문제라도 있나요?”

성훈의 말에 사장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닐세.”

그의 눈은 도면이 아니라, 성훈의 손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장은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 친구가! 누굴 눈먼 봉사로 아나!’

사장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내가 수십 년간 시계를 모아왔지만, 유일하게 못 구한 시계가 그거다. 이 녀석아!’

그중에서도 ‘파테크 필리프’의 제품에 대해서는 광적인 집착을 보여온 사장이었다.

성훈의 시계는, 한정판 중에서도 진정한 한정판이 아니던가?

‘내가 그걸 구하고 싶어서 스위스 본사를 몇 번이나 방문했는지 아나?’

구할 방법이라도 알려달라는 부탁에 돌아온 대답은 ‘NO’라는 대답 한마디였다.

결국 그 시계가 차지해야 할 서재 장식장에는 사진만이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방문하자, 그 집요함에 귀찮았던지, 관리자는 그 시계를 왜 구할 수 없는지 슬쩍 일러주었었다.

“그 시계는 정확히 말하면, 우리 회사의 제품이라고 말씀드리기도 애매하오.”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사장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여기서 만든 것 아니오?”

카탈로그에 떡 하니 나와 있는 제품을 자기네 것이 아니라 하다니 말이야.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우리 회사가 만든 건 맞소. 그리고 우리 제품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명품이지만…….”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 게거품을 물었다.

“이건 작품이죠. 작품!”

사장이 미간을 좁혔다.

“혹시! 내가 돈이 없다고 생각…….”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설마요? 돈 없는 사람은 평생 가도 우리 제품을 만지지도 못하오.”

“그럼?”

관리자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도 제작의뢰를 받아서 만든 거요.”

“의뢰도 가능한 거요?”

“불가능이 어디 있소? 돈이면 죽은 사람도 살리는데. 대신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지요.”

돈이라면 남 못지않게 있는 사장이 아니던가?

그가 호기롭게 물었다.

“얼마 정도면 가능한 거요!”

그는 오른손을 쫙 폈다.

“오십만?”

관리자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오, 오백만?”

‘시계 하나를 제작하기 위해서 오백만 불을 쓰는 미친놈도 있나?’ 하는 생각이 사장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쩝!”

관리자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면 우리 시계가 세상에 널렸을 거요.”

사장의 눈 아래가 꿈틀거렸다.

“그, 그럼……. 오, 오천?”

그제야 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세상에 어떤 미친…… 누가……?”

놀라는 사장에게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의뢰자에 대해서는 말해 줄 수 없소. 다만 아랍인이라는 것만 아시오. 그가 의뢰하면서 자신에게만 팔라고 했소!”

사장은 억울했다.

“팔지 않을 거면, 카탈로그에 올리지나 말던가?”

왜 올려놓고 팔지 않는다는 말인가?

돈이 없어서 억울했던 적은, 살면서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관리자는 너무나 당연한 듯 말했다.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묻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작품이지 않소?”

‘당연하지!’

그러니까 스위스까지 와서 애걸복걸하는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지.

“너무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 카탈로그에 넣게 해달라고 어렵게 허락받았소.”

“살 수도 없는 걸…….”

“그래서 한정판이라 써두지 않았소!”

이만하면 뻔뻔스러움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붉으락푸르락하는 사장에게 그가 넌지시 말했다.

“지금까지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당신처럼 방문했소.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말해 주는 건, 당신뿐이었소.”

그 말이 위로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사장이 퉁명스레 물었다.

“어차피 구할 방법은 없는 것 아니오?”

“그건 아니지요. 자신의 지인들에게 준다고 했으니…….”

“자신이 직접 차는 게 아니라?”

“당연하지요. 당신 같으면 시계 하나에 오천만을 쓰겠소? 미쳤소?”

그럼 여러 개가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몇 개나 만들어진 거요? 알기라도 합시다. 그만큼 구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 아니겠소!”

관리자가 망설이다 답했다.

“백 개 값을 일시불로 지불한 거요.”

“그럼 적어도 백 개는…….”

“아니오. 지금까지 만들어진 건 스무 개 정도요. 매년 두 개씩 만들어 납품하고 있소!”

“그럼…….”

백 개가 아닌 건 실망이지만, 스무 개라도 어디인가?

처음보다 높아진 확률에 얼굴이 환해진 사장에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시오.”

“왜? 스무 개나…….”

“그가 그 시계를 얼마나 풀었는지는 알 수 없소. 그가 우리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으니까.”

“끄응. 그건 그렇지요.”

“아직도 자신이 하나만 차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 풀었을 수도 있소.”

“다 풀렸다면, 기회가 있겠구려?”

“그 기회가 당신에게 가기를 빌어주겠소.”

***

그 후, 그 관리인의 말대로 경매소에 계약금 백만 달러를 넣어둔 지, 오 년이 넘었다.

그 의뢰자의 지인들이 죽거나 혹은 사정이 어려워져 경매시장에 나오기를 바라며…….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바라보며, 사진으로 갈증을 달래던 손목시계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단 한 번도 실물은 본 적이 없는 그 작품이.

딱 답이 나왔다.

‘그럼 그 아랍 거부가 압둘이거나, 알리였겠군!’

눈앞의 성훈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 시계를 가진 녀석이! 그들과 친하지 않다고!’

목구멍을 차오르는 질투를 꾹 참았다.

남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성훈 군. 시계가 참 좋아 보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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