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27화
왕의 부탁(01)
왕이 퇴장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알리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렸다.
물론 모두 내가 아는 자들이었다.
‘카심을 따르던 놈들이니, 당연히 알지.’
권력을 좇던 자들이니, 누가 실세인지 아는 거지.
앞 다퉈 알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리 왕자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생각지 못한 상황에 알리는 머쓱하게 답했다.
“매일 얼굴 봤으면서, 무슨 가당찮은 말이오?”
보고도 못 본 척하던 자들이 하나같이 얼굴을 들이미니, 알리로서도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평소에 흠모하고 있었지만, 아시잖습니까? 저…… 카심…….”
여전히 카심의 눈치를 보는 것이 못마땅한 알리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호텔에 문제가 있다던데, 제게 해결할 기회를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제 아비가 지방은행장이잖습니까? 제가 말씀드려서, 가장 싼 금리로…….”
그의 말을 끊으며,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금리는 무슨 금리요? 왕자님! 제게 투자할 기회를 주십시오. 전 왕자님의 호텔이 빠른 시일 내에 정상화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왕자님께 조금이라도 힘이 된다면, 이 한 몸 바쳐…….”
이거 은근히 열 받는데?
나는 안중에도 없는지, 툭툭 밀치며 알리에게 접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제는 내 눈치는, 볼 필요가 없다? 그거지!’
방금 내 팔을 치고 간 놈의 이름을 불렀다.
“이봐요. 마킨!”
평민에게 이름이 불렸음이 아니 꼬았던가?
그간 내게 머리 숙였던 아니꼬움을 눈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뭔가?”
하지만 이런 피라미는 직접 상대할 필요도 없지.
“알리!”
알리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러나? 성훈?”
마킨을 직시하며 말했다.
“아까 이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내 찌푸린 인상에 알리도 인상을 찌푸렸다.
“왜? 자네에게 실례되는 말이라도 했나?”
고개를 갸웃하며, 눈썹을 으쓱였다.
“글쎄요?”
내 어정쩡한 대답에 알리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이봐. 마킨! 내 친우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얼굴에 핏기가 가신 마킨을 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는 내가 일본인인 줄 알았나 봐요.”
“뭐? 이놈이! 그런데?”
“일본 놈은 거시기가 좀만 하다며? 라고 묻던데요?”
물론 난 일본인이 아니니, 기분 나쁠 것이 없다. 물론 좀만 하지도 않고!
소세키 녀석들이 쌍 엄지를 들었던 몸이라고.
하지만 누구를 지칭하고 놀렸는지는 너무나 명확한 상황!
알리는 자신이 모욕당한 것처럼 분노했다.
“그랬단 말이지!”
알리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마킨이 사색이 된 채, 내게 애원했다.
“제가 언제 그랬…….”
‘그래! 그런 표정이라고. 당신이 내게 보일 눈빛은.’
하지만 저놈 하나 얻어터진다고, 내 위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냥 고자질쟁이가 될 뿐이지.
“알리! 그 사람 아닌가 봐요.”
내리치던 주먹이 뚝 멎었다.
“엥? 그럼 누구야!”
“헷갈려요. 눈빛을 보면 기억할 것 같은데…….”
알리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줄 서 봐. 성훈 앞에!”
군대 사열식처럼 긴장감이 넘친다.
“눈 똑바로 안 들지!”
호통을 치며 내게 물었다.
“누군지 말해 보게. 내 당장 박살을…….”
“좀! 기다려 봐요. 기억하려고 하잖아요.”
성질 급한 알리에게 잔소리를 하며, 일렬로 내 앞에 선 자들과 일일이 눈을 맞췄다.
얼굴에 비웃음을 띤 채로.
‘이봐! 실세를 보기 전에 그 옆에 누가 있는지를 보라고. 등신들아!’
하나같이 내 눈을 외면하기 바쁘다.
왕보다 환관에게 잘 보이라는 말도 모르나!
물론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다.
건장한 대한민국 남성이다.
신체에 하자가 있으면, 군대에 못 간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구!
“부왕께서 기다리신다고! 성훈.”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그들과 아이컨택을 하고는 말했다.
“알리! 저리 좀 가 있어요.”
“왜?”
“당신이 있으니까, 이 사람들 긴장해서 아까 눈빛하고 다르잖아요.”
“그래도…….”
“얼른 저리 안 가요!”
알리가 투덜대며, 압둘이 있는 쪽으로 갔다.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들에게 말했다.
“마킨, 오사마…… 사비르.”
내가 부르지 않았던, 남은 16명의 이름을 모두 호명했다.
그 숫자는 내 앞에 선 사람과 같은 수였다.
각자 이름이 불릴 때마다 흠칫했지만, 알리가 지켜보기 때문인지 여전히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이제 알리가 아니라, 나를 두려워해야 할 거야!’
그들에게 말했다.
“이리 와 봐요.”
서로 눈치를 보며 슬슬 다가왔다.
“빨리 안 와요? 국왕께서 기다린다잖아요.”
“네. 네.”
내 바로 앞에 촘촘히 재정렬 했다.
‘이 정도면 알리한테 안 들리겠지.’
“어이! 당신들, 운수대통했다고 생각했지?”
느닷없는 반말에 여러 가지 반응이 보였다.
당황하는 자, 얼굴이 붉어지는 자 등등.
그들을 보며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
“허 참! 내가 정말 이름을 기억 못 해서 말하지 않은 줄 아는 모양이지?”
의아해하는 그들에게 말을 이었다.
“아까 아크람이 말리지만 않았어도, 다 불렀을 이름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눈앞에 잃어버릴 뻔한 십 년이 아른거리겠지!’
“미리 말하지만, 아크람에게 말할 거야.”
그와 동시에 모두가 애원하는 눈으로 말했다.
“그것만큼은…….”
“그래야 아크람이 당신들 주시할 거 아니야. 혹시 알아? 너희 옛 주인, 카심을 못 잊고 내통할지!”
그럼 두말없이 사형이지.
그건 내란과 직결되니까!
그 정도로 간 큰 놈이 있을까마는.
협박으로는 아주 적절했다.
“절대 그런 일은…….”
“됐고!”
그들의 애원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아크람은, 웬만해서는 알리에게 말하지 않을 거야. 당신들을 대체할 사람들이 많지 않을 테니까!”
그래 봐야 오래가지는 못할 테지.
대체 가능한 젊은 신진들이 생기면, 일순위로 교체될 운명이니까.
왕권에 약간의 위협이라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남겨둘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정 때문에 이들을 남겨둔 건 아니거든.’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난 달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공손한 말이 나오지.
그 물음에 답했다.
“이 나라가 망하든 말든, 당신들이 알리에게 죽든 말든, 나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그, 그런…….”
사실인 걸 어떡하냐?
내가 네놈들에게 동정심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내가 당신들이 없다고, 손해 볼 거 있어?”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아무런 대꾸도 못 하는 그들에게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당신들 이름 말해 주고, 한국으로 가버리면 그만이라고.”
“어떻게 그런…….”
“참! 전화도 있구나.”
누가 네놈들 목줄을 쥐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라고.
이제는 알리 앞에서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굴리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네. 네!”
나직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작다.”
“네! 알겠습니다.”
“내 이름이 뭐라고?”
“김. 성. 훈. 입니다.”
“잘 기억해 둬라.”
이런 협박이 통하는 건, 아랍 문화권이라서 가능한 일이리라.
여긴 인권을 최우선시하는, 말랑말랑한 민주주의가 안 통하거든!
교리 때문에 사람을 처형하는데, 명분 만들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어디 있으랴!
날 기다리는 알리를 흘낏 보며 말했다.
“앞으로 지켜볼 테니, 행동 똑바로 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
한바탕 훈계를 하고, 알리에게 갔다.
“누군지 찾았나?”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알리가 물었다.
“잘 모르겠네요. 아랍 사람들은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아서…….”
알리는 콧잔등을 찌그리며 말했다.
“떠오르면 바로 말하게. 내 작살을 내줄 테니. 감히 내 친우를 욕해?”
알리에게 말했다.
“국왕이 기다린다면서요. 얼른 가요.”
회장 한쪽 구석에, 외톨이가 된 카심과 자미르가 보였다.
굳은 표정의 알리가 말했다.
“무슨 꿍꿍이일까?”
“신경 쓰지 말고 가요.”
저들의 남은 수단이 뭘까?
아까 말했던, 중앙은행장에 관련된 것!
어차피 왕이 임명하는 것, 왕의 신뢰를 받아야만 가능한 것.
그런 은행장이 카심의 사람이라는 것을 왕이 알게 된다면, 그대로 내버려둘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그들에게 시선을 둔 알리의 손을 끌며 말했다.
“뭘 하든 안 될 겁니다. 국왕이 해결해 줄 테니까.”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알리 자신이 직접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건 왕이 되는 자로서 당연히 헤쳐 나가야 할 알리의 일이지.’
***
응접실에는 젊은 집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옷을 갈아입고 계십니다.”
잠시 후.
왕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아까의 화려한 예복이 아닌, 수수하고 편안한 차림이었다.
알리와 함께 일어나, 왕에게 인사를 했다.
“됐네. 그만 안게나. 아까도 한 인사를 또 하는가?”
왕은 편한 웃음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크람의 부축으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성훈. 고맙네. 카심의 문제는 아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아크람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그 문제로 국왕께서 많이 골치 아파하셨지요.”
“그렇지! 그런데 자네 덕에 깨끗하게 해결되었어.”
편안한 표정의 왕에게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뭔가? 뭐든지 말하게.”
어떤 상이라도 주겠다는 듯, 웃는 얼굴이었다.
“중앙은행장을 잘 아시는지요?”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럼. 그건 왜 묻나?”
“아까 얼핏 카심과 자미르가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확실한 국왕의 사람이 아니면…….”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남의 나라 정치에 끼어드는 것은 실례이리라.
하지만 여기까지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알겠네. 다른 사람으로 바꾸도록 해 보지.”
아크람이 말했다.
“더 적합한 사람으로 찾아 올리겠나이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아크람 자네의 수가 제대로 먹혔어!”
아크람이 머쓱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제대로 먹힌 게 아니라…… 과하게 먹혔지요.”
왕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렇지. 그렇지! 이럴 줄 알았으면, 자네 말처럼 진작 초대할 걸 그랬어? 안 그런가? 아크람.”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해결될 줄은 저도…….”
“성훈이 ‘알라의 축복’이라는 자네 말이 빈말이 아니었어. 아크람, 자네의 공이 크네.”
아크람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 알라의 뜻이 이뤄진 것 아니겠습니까?”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 앞으로도……. 내가 알라의 곁으로 간 다음에도 알리를 부탁하네.”
알리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왕! 아직도 정정하신데. 그리고 아직 저는 부왕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거둬주십시오.”
아크람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 아크람, 충심으로 알리 왕자를 보필하겠습니다.”
응당 알리에게 동조할 줄 알았는데?
“아크람!”
놀란 알리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왕에게서 나왔다.
“물론 아크람은 의지가 되는 사람이지. 내 치세는 아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알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건 저도 압니다만, 아직 부왕께서는 정정하십니다.”
“흐흐흐.”
현자는 자신이 죽는 날을 예측한다고 했던가?
이 경우는 첨단 장비를 갖춘 의사들이 가르쳐 주겠지.
어쨌거나, 나는 내 목적을 달성했다.
이제 알리와 계약만 체결하면 된다.
애초의 목적이 그거였다고!
‘그런데 나는 왜 부른 거지?’
상을 줄 거라면, 내일 줘도 되는 거잖아.
멀뚱거리는 나를 아크람이 본 모양이었다.
“전하. 성훈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참! 손님을 불러놓고 딴소리만 했군.”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부자간에 주책을 떨었군.”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왕이 진지하게 말했다.
“성훈 자네는 알리의 은인일세. 그리고 나에게도 은인이지.”
“그런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내 목적이 있어서 한 건데, 이렇게 공치사를 받으니, 낯이 간지러웠다.
“그래도 은인인 건 사실이지. 알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알리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수긍했다.
“제게는 둘도 없는 은인입니다. 뭐로 갚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 마음 잊지 않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부왕.”
“성훈. 자네는 알리를 어떻게 생각하나?”
왕의 느닷없는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생각하긴요. 둘도 없는 물주죠!’
하지만 이 말을 왕 앞에서 할 수는 없잖아.
말문이 막힐 수밖에.
왕이 자문자답했다.
“아비인 내가 보기에는 많이 모자란 녀석일세.”
수긍도 부정도 못 한 채, 멀뚱히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자네도 알다시피, 알리가 좀 외골수라 마음 맞는 형제가 없다네. 그나마 제일 친한 녀석이 이웃 나라의 압둘이지.”
하긴 마음 맞는 형제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카심 따위에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으리라.
“성훈,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알리를 힐끔 보며 말했다.
“정확히 보셨네요.”
그 압둘과도 매번 투닥거리지만.
알리가 자못 진중하게 말했다.
“성훈! 부왕의 앞이네. 농담은 삼가게.”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농담 아닌데요! 게다가 융통성도 많이 부족하죠.”
“커 흑!”
내가 왜 이러냐고?
아까 응접실로 오면서, 알리가 투덜거렸거든!
‘부왕 앞에서 그 왕세자라는 말, 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잖나!’
‘그 덕에 잘 풀렸잖아요!’라는 내 반박에 알리는 이렇게 말했었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걸세!’
이게 외골수가 아니면, 뭐가 외골수야?
“하하하.”
왕이 웃으며 말했다.
“이러니, 내가 어찌 마음을 놓겠나?”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요.’
어깨를 으쓱하는 내게 왕이 물었다.
“내, 왕이 아니라, 아비로서…….”
“자네에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돈 문제라면 고민을 좀 하겠지만, 돈이라면 산처럼 있는 노인이 내게 그런 부탁을 할 리는 없잖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뭐든지요.”
왕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라의 축복이군!”
왕이 밤하늘을 보며 감사하며 말을 이었다.
“성훈! 많이 부족하지만, 알리의 형제가 되어 주게.”
‘엥?’
“부, 부왕. 뭐라 하셨습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알리가 물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랄까?
예상치 못한 부탁에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