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25화
왕의 한 수, 그리고 예정된 실수. (05)
국왕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어찌 불쾌하지 않으랴?
왕은 자리를 줄 생각이 없는데, 이미 카심은 왕의 행세를 하고 있는데!
‘반란에 대한 원로들의 염려가 턱없는 노파심으로 들리지는 않을 걸요.’
곧이어 얼굴이 붉어졌다.
곧 발작할 것 같은 느낌!
‘아직 그러면 안 된다고요. 아직 읊어야 할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숨 돌릴 틈도 없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 물론 카심 일왕자께서는 절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내 말에 카심을 두둔하던 소수의 원로들이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거 보쇼. 내가 뭐라고 했소! 아무리 카심 왕자가 건방지다고 해도, 그 정도의 사리분별은 있다고!’
‘그럼. 당연하지. 어디 무엄하게 국왕의 권한을 함부로 넘본다는 말인가?’
‘다행일세. 정말 그랬다면, 당장에 주리를 틀어도 모자랄 텐데 말이야.’
그들의 말을 들으며, 왕의 주름도 조금 펴졌다.
아무리 미워도 아비로서의 정이 어디 가겠는가?
***
국왕의 안도와 달리, 아크람은 눈매를 좁혔다.
‘이렇게 끝낼 인간이 아닌데, 아까 분명 송곳니를 세우는 걸 봤다네.’
아니나 다를까?
성훈은 전체를 관망하며,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타이밍을 재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럼 그렇지. 절대로 카심에게 유리한 말을 할 인간이 아니지.’
카심 뿐만 아니라, 그들의 패거리까지 같이 싸잡아 잡을 속셈이겠지.
성훈의 시선을 쫓았다.
그의 눈이 닿는 곳에 카심과 자미르가 있었다.
왕의 화가 가라앉았으니, 둘의 얼굴도 편안해야 마땅하건만, 오히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자미르의 얼굴은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뭐지? 왜?’
허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태풍은 지나가지 않았다.
이 고요는 지금 태풍의 눈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태풍이 천천히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순간, 아크람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디까지 휩쓸고 지나갈 생각인가?’
***
내가 카심을 봐 줬다고 생각했다면, 순진하신 겁니다. 국왕.
지금 왕을 진정시키는 이유가 뭐냐고?
생각해 봐!
이 정도로 끝나면 시시하지.
대부분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어중간하게 화내고 나면, 다시 화내기가 어정쩡할 때 말이야.
별거 아닌 일에 화를 내버렸으니, 다시 화를 내자니 좀스러워 보이고, 그냥 넘어가자니 뒤가 찜찜한 기분.
중간에 끊으려면 시작도 안 했을 거라고.
그러니까!
아직은 당신이 화를 낼 때가 아닙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곧 코피가 터질 정도로 화가 날 테니까.
아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묘한 표정으로 내 속셈이 뭔지 탐색하고 있었다.
‘사실만 줄줄 나열한다고 드라마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아크람!’
드라마의 생명은 완급 조절이 아니겠어?
안도하는 왕과 왕족들을 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그리고 사색이 된 카심과 자미르의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너희 둘은 다음에 내가 할 말이 뭔지 알지?’
자미르가 내 눈을 피했다.
‘내가 그랬지!’
자미르. 네놈만큼은 반드시 죽인다고!
한층 편해진 표정의 왕에게 불을 질렀다.
“카심 일왕자가 말하기를. ‘국방부 장관 자리는 이미 자미르가 하기로 예약되어 있어서 안 된다…….”
순간, 국왕의 관자놀이 혈관이 불끈 솟아올랐다.
“이런! 안하무인이 있나? 정말인가?”
카심이 벌떡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부왕! 모함입니다. 이건 절대로 모함입니다.”
“맞습니다. 부왕. 어찌 저런 외국인의 말을 믿으시는지요.”
자미르도 벌떡 일어서서 카심에게 힘을 보탰다.
그는 뒤돌아보며 원로들에게 간절한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의 편을 드는 원로는 아무도 없었다.
이에 왕의 호통이 울려 퍼졌다.
“닥쳐라! 카심!”
세 부자간의 눈에서 불똥이 튀고 있었다.
‘이것 보세요. 아직 제 말 안 끝났거든요.’
“모함입니다. 말을 듣지 마십시오. 저를 궁지로 몰아 알리를 대신 왕세자로 세우려는 간교한 계략입니다.”
카심의 항변에 자미르도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습니다. 오로지 있는 거라고는 저 동양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뿐입니다. 믿지 마십시오.”
분노한 왕에게 맞서, 두 왕자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다.
‘응. 계략도 맞고, 증거가 내 말뿐인 것도 맞아.’
하지만!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아!’
네놈들의 발목을 잡는 건 내 입이 아니야.
네놈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
그리고 이런 말 몰라?
한국말은 끝까지 들으라는, 그 명언 말이야!
눈싸움이 오가는 가운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카림 왕자가 물으시더군요. ‘왜 나는 안 되냐고!’”
다시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안 될 거다. 미국하고 무기 거래는 거의 자미르가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 노하우 따라가기 힘들 걸!’라면서 웃으면서 말씀하셨죠.”
왕이 소리쳤다.
“자미르!”
“네! 부왕!”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는 듯,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네가 카심을 대신해서 미국과 무기거래한 사실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그건 알리 형님이…….”
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알리도 모른다. 심증이 있더라도, 확신은 불가능하지.”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에게 왕이 물었다.
“이유를 아는가?”
할 말이 있었을까?
왕이 말을 이었다.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거든. 심지어 가족에게도.”
아크람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어떤 변명도 왕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리라.
왕이 물었다.
“이제 그대에게 묻겠다.”
왕의 손이 내게로 향했다.
“알리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어떻게 저, 성훈이 알고 있나?”
왕의 지적에 카심과 자미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왕도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 나는 아크람의 충언을 들었어야 했다. 자미르. 네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면서도, 나는 부자간의 정에 눈이 가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심경을 토로했다.
“내 정에 이끌린 오판이 나라를 부정부패로 물들게 했고, 이다지도 나를 괴롭게 했구나.”
왕이 어떤 말을 할지를 예감했음일까?
카심이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부왕…….”
하지만 왕은 철없는 첫째 아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카심. 그대는 몇 번이나 기회를 주었음에도, 어리석은 선택으로 자신을 망쳐버렸구나.”
카심에게서 눈을 거두며 아크람을 보았다.
하지만 그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으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전하. 염소 한 마리가 불쌍하다 해서, 수천수만의 양 떼를 등한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구제할 방도가 없구나.”
왕은 아크람과 다시 한 번 눈을 마주치고는,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이후로 카심과 자미르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 물론 왕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박탈한다. 또한, 이 둘은 이후 어떤 공직에도 임할 수 없을 것이다.”
왕의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카심과 자미르가 고개를 떨구었다.
***
카심과 자미르의 정치생명은 완전히 끝났다.
하지만 아크람이 보기에, 성훈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 눈빛이었다.
‘어차피 지금 얘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방법으로 말하겠지.’
지금 성훈의 눈이 카메라에 꽂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이 협박하고 있었다.
‘좀 더 내놔요. 안 그러면 다 불어버릴 거니까.’
그의 발언은 비싸게 팔릴 것이다.
해외 언론까지 덤벼들면, 아크람 자신이 아무리 통제한다 해도 완전히 감당하기가 불가능하리라.
아크람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마 그가 호명할 수 있는 숫자는……?’
저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왕족들의 숫자와 일치하겠지.
평생 숙일 일이 없었던 고개를!
아무 이유 없이 성훈 앞에서 숙일 이유가 없질 않은가?
‘필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게지!’
그 수가 무려 서른 명이 넘었다.
성훈의 수완에 혀를 내둘렀다.
‘능청스럽게 외국인이라고 핑계를 대다니.’
또한, 어떤 결과가 나올지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상대의 급소를 기가 막히게 찌른다.
사람을 한쪽으로 몰아붙인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이런 성훈이 어떤 행동을 할지는 충분히 예상이 가지 않던가?
‘기자들에게 다 까발리고 나서, 외국인이라 몰랐다고 능청을 떨겠지! 크윽!’
다른 방법으로 공략하면 되지 않을까?
허나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때는 이미 알리 왕자라는 강력한 방패를 등에 업고 있겠지!’
이른바 속수무책!
그 작전에 당하는 사람이 자신이 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아려왔다.
아크람 자신도 왕족들 내부의 청소를 바라지만,
‘나도 바라고 바랐던 일이지만…….’
아크람의 고민은 다른 것이었다.
‘성훈 님. 나라를 뒤흔들어 놓을 심산이시오?’
처량한 젊은 왕족들을 보자, 가슴이 아려왔다.
한창때의 나이!
어디에 꽂아놔도 제 몫을 할 수 있는 중년과 젊은이들이었다.
허나 아직도 완벽하게 정계에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그게 어찌 그들의 탓이라고만 할 것인가?’
국왕의 재위 기간은 생각보다 길었고, 아직도 왕이 신뢰하는 자들은 건재하다.
자연히 요직에 등용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 카심 왕자에게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겠지.’
단지 그 선택에서 실수를 한 것뿐.
누구라도 카심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카심이 왕이 되지 못할 거라, 예상이나 했었던가?
‘그 기간이 무려 30년이었답니다.’
지금 국왕의 분노로 봐서는, 호명된 자들은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알리의 성격상, 부왕의 말을 그리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인재 부족에 허덕이는 반쪽짜리 정권이 되겠지.’
성훈이야 그 자리 아무나 앉히면 되지 않느냐고 항변하겠지만, 왕족이 힘을 잃은 나라가 왕국으로 유지가 되겠는가?
‘견디기 어려운 진통을 겪게 되겠지요.’
그것 말고도 내부적 문제가 산재한 사우디아라비아.
나라가 겨우 유지되고 있는 것도 왕족이 아직은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젊은 시절 겪었던, 그 참혹한 내전을 살아생전에 또 보고 싶지는 않군요.’
성훈의 혀가 연신 입술을 핥고 있었다.
‘입이 근질거리는 게지.’
젊은이에게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아크람이 각오를 굳혔다.
‘일단 살릴 수 있는 데까지 살려보자.’
***
아크람의 눈 깜빡임이 심해졌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자꾸 눈치를 주는 거야?’
당연히 나는 아직 만족하지 못한다.
나와 내 조국을 비웃은 놈들이 아직 저기 많이 있다고!
내 마음을 알아챈 것인가?
한숨을 푹 내쉰 아크람이 물었다.
“혹여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국왕께는 한 마디도 빠뜨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럼 그렇지.
이심전심!
아크람도 이 정도로 만족할 리가 없지.
멍석을 깔았으니, 춤을 춰야지!
‘고개 숙이고 있다고 내가 기억 못 할 줄 알았지. 난 내 앞에서 욕하는 놈은 절대로 안 잊는다고!’
아크람은 내가 여기 왕족들, 모두를 날리는 걸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건 말 안 해도 안다고!’
하지만 앞으로는 날 만나도, 감히 눈도 못 마주치게 만들어 주지.
왕과 카메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카심 일왕자께서는 국방부 장관 외에도 여러 자리를 언급하셨습니다.”
카심 주변에 있는 인물들부터 차례차례 읊었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권력의 크기는 왕과의 거리에 비례한다고.
‘가까이 있는 놈들이 간신들이지. 환관 같은 놈들!’
“내무부 장관에 파드, 건설부 장관에 하디…….”
언급한 이름이 열 개가 넘어갈 때쯤인가?
“크흠. 크흠.”
아크람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쳇!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못 들은 척하면서 계속 말했다.
“압달아…….”
아크람이 미친 듯이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콜록!”
발작적으로 기침하면서도, 눈만은 동그랗게 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많이 날리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만 하시지요. 성훈 님!’
그의 눈이 애원하고 있었다.
어찌 그 간청을 외면할 수 있으랴!
‘이러다가 노인네, 숨넘어가시겠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