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24화
왕의 한 수, 그리고 예정된 실수. (04)
악의에 찬 거짓이라는 열변이 효과가 있었던 것인가?
왕의 감겼던 눈이 스스륵 열렸다.
힘없이 의자에 늘어진 몸과는 달리, 눈빛은 총총했다.
‘말해 보라. 뭐가 악의이고, 어떤 거짓인지?’
왕의 눈동자가 묻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던지, 자미르의 음성에 힘이 들어갔다.
“부왕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결과는 시간과 땀에 비례한다.’고.”
국왕의 말버릇에 악센트를 주며, 자미르는 왕과 눈을 맞췄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왕?”
왕의 주름진 눈매가 꿈틀거렸다.
제 가슴을 치며 말을 이었다.
“이 문장은 고작!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만들어졌다 하더이다. 그것도 조각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채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더군요.”
그리고 내게로 눈을 돌렸다.
“그렇지 않은가? 동양인!”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았다.
‘그게 네가 내놓은 비장의 패인가?’
패란 말이다.
상대가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내놓는 거라고.
그리고.
‘끝까지 동양인인가?’
그에게 말했다.
“김. 성훈입니다.”
“흥! 그걸 답변이라고 내놓는 건가?”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누구에게 당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한국에서 온 김. 성. 훈. 입니다.”
그리고 왕에게 말했다.
“저 말에 거짓은 없습니다.”
자미르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당신 차례라고. 국왕!’
아까 왕과 아크람의 만남에서 확신했던 건, 알리의 뒤를 밀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알리에게 흠집이 될 행동은 하지 않을 거다.
막아준다는 거지.
세종이 온전한 정치를 하도록 하려고, 태종이 온갖 비난을 각오하고 정적을 스스로의 손으로 모두 처단한 것처럼.
‘내가 아까 그랬지?’
그깟 사석 하나 때문에 대마를 버리는 멍청이는 없다고.
왕이 저 말을 듣고, 속으로 분노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문장 하나 때문에 알리라는 큰 대들보를 버릴 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확신이었다.
‘왜 그렇게 왕과 아크람의 말을 신뢰하느냐고?’
그들이 나를 속일 이유가 없잖아.
애초에 만리타국에 있는 나를 초대할 이유도 없다고.
나라는 포석은 알리를 부상시키기 위해, 아주 예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거라고.
그러니 의심할 여지가 없지.
하지만 지금 국왕의 결정이 내 생각과 다르다면?
그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했다고.
내가 국왕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까 만난 게 전부니까.
‘정에 흔들려 자미르의 말에 수긍할 수도 있겠지. 이대로 가면 카심 무리를 모두 쳐내야 하니까.’
그들 모두를 벌하는 것보다, 내게 주기로 한 상을 취소하고 이 연회 자체를 무위로 돌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난 또 다른 패를 내놓을 테니까!’
무슨 패가 그렇게 많으냐고?
내 눈앞에 고개 숙이며 눈 피하는 놈들이 모두 내게는 팻감이거든. 꽃놀이패.
서른 개의 패를 내놓으면서, 난 저놈들의 정치생명을 담보로 불꽃놀이를 할 거다.
한 놈을 조질 때마다 별이 떨어지는 거니까, 불꽃놀이라 할 만하지 않나?
고개 숙인 그들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 네놈들이 신나게 지껄인 말들이 모두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고!’
왕의 답을 기다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급했던 것인가?
“부왕. 저것 보십시오. 제 입으로 날림으로 만들었다고, 자백하고 있잖습니까?”
제 목숨이 걸리니, 주변의 찌푸린 시선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건가?
뒤에 자리한 원로들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감히 국왕의 결정을…….’
‘국왕께서 문장 교체를 결정하실 때,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는지는 알지도 못하는 어린 것이.’
그들의 불평만큼이나 왕의 얼굴도 구겨졌다.
왕국에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왕의 위엄.
누누이 떠올렸던 거지만, 카심의 패거리들은 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미르의 제 무덤 파는 소리를 조용히 경청하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더 파라. 깊게!’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나오지 못할 무저갱을.
왕의 불쾌함이 내게 농락당한 것으로 인한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경악한 표정으로 자미르가 말을 이었다.
“설마 모르셨던 겁니까?”
그는 과장된 표정으로 좌중에 호소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럼 알리 형님께서 부왕께 제대로 고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물귀신 작전을 제대로 쓰려는 모양이다.
‘어차피 당하게 생겼으니, 알리마저 끌고 들어가려는가 보네?’
기회라 생각했던가?
카심과 그의 무리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부왕! 이건 저 동양인의 농간입니다.”
자미르의 눈이 번들거렸다.
‘어떻게든 알리를 물고 들어가야 합니다.’
카심이 목소리를 높였다.
“부왕! 그냥 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이건 알리가 의도적으로 부왕을 농락한…….”
그들의 청원은 왕의 일갈로 끝났다.
“닥쳐라!”
맨 뒤의 카메라맨이 움찔할 정도의 일갈!
카심이 억울한 심정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어찌 부왕께서는 이리도 알리만 편애하시는지요? 비록 소자가 한 번의 실수를…….”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을 아크람이 잘랐다.
“카심 일왕자께서는 국왕께서 말씀하신 것을 잠시 잊으신 모양입니다.”
“이익!”
말을 끊은 것에 화를 내기도 전에, 아크람이 말을 이었다.
“그 문장 덕분에, 국왕께서는 오랜 근심을 해결하셨습니다. 국왕 전하 스스로 오만했다 하실 정도로 감탄하셨지요. 그리고 그것을……. 국왕께서는 ‘알라의 깨우치심!’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아크람의 이 말은, 더는 문장의 가치를 비하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왕에게 실례해도 큰일이지만, 알라에게 실례하면 신성모독이다.
나무에 묶여서 돌 맞아 죽는다.
이 경우에는 왕족이라 해도, 예외가 없다.
그런 사람들이 무슬림 아니던가?
부모 욕은 참아도, 알라 욕은 못 참는 사람들.
뜨끔한 카심이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런 의미가 아닌 건, 아크람도 아시잖소. 전 그저 부왕께 냉정한 판단을 부탁드렸을 뿐이었습니다.”
심호흡으로 숨을 가다듬은 왕이 말했다.
“아크람의 말이 맞다. 문장의 탄생은 순간적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채택 과정은 충분한 시간을 들였고, 왕가의 원로들과 논의 후 결정된 것이다.”
모두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늘 말했듯, 시간과 땀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로 되지 않는 것. 그것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그런 궁지에 처했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알라께 간구하는 것뿐! 이 문장은 그 간절한 기도에 대한 알라의 응답이었다.”
국왕의 입장은 명료해졌다.
그리고 자미르의 패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
성훈이 피식 웃으며, 아크람에게 눈짓했다.
‘아까 저놈 때문에 내 말이 끊겼다고요.’
아크람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 눈빛이 뭔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긴장하며 상황을 관망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완연한 포식자의 눈빛.
‘다 죽여버린다!’
사자로 군림했던 왕자들이, 그의 눈빛이 지나갈 때마다 눈을 피하며 고개 숙이기 바쁘다.
‘골치가 아프군.’
골치만 아프면 다행이게, 해결책이 없다.
자미르의 어쭙잖은 패 때문에 성훈은 상황을 완전히 파악해버렸다.
더 이상 내놓을 카드가 없는 카심들.
왕 앞에 선 성훈에게서 표현하기 어려운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확연한 입장 차이!
왕가를 지켜야 하는 아크람의 입장.
그리고 알리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아니 알리 빼고는 다 죽여버리는 것이 더 편한 성훈의 입장.
성훈에 대한 알리의 신뢰를 잘 알기에 그를 초대했다.
절대로 알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신.
그렇게 알리의 성공적인 정계 데뷔를 위해 초대했던 저 손님은, 후폭풍이 두려워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던 왕국의 급소를 찔렀고, 고름을 모두 짜내겠다며 입맛을 다시고 있다.
아크람은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지금! 누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가?’
국왕?
지금 분노로 제정신이 아닐 터!
원로들?
국왕과 똑같이 분개하고 있었다.
카심과 왕자들?
벌벌 떨며 눈을 피하기 바쁘지.
방송국 사람들?
이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보고 있었다.
‘지금쯤 전 국민이 분노하고 있을 터!’
왕국의 아픈 부분을 살살 긁으며, 여론을 제 편으로 만들었다.
나이만 먹었지, 경험이 부족한 왕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저 그물에 걸려들었고!
‘이를 어쩌면 좋을꼬!’
여우 새끼라 생각하고 불렀더니, 다 큰 범이었다.
그것도 송곳니가 시퍼렇게 날이 선!
한국으로 향했던 발을 찍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랴!
***
“끄응.”
아크람의 입에서 단발성의 신음이 나왔다.
‘어디까지 밀어드리리까?’
고작 이 정도로 끝을 보려고 승부수를 던졌던 게 아니라고요!
그를 독촉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은 그를 확실한 내 편으로 분류하기 어렵거든.
‘그는 국왕의 사람이지. 지금은 알리 편을 들고 있지만, 저 우유부단한 왕이 원한다면, 저 머저리를 최대한 구해낼 사람이지. 물론 알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겠지만.’
그건 그의 판단이고, 난 저런 머저리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다.
어차피 석유로 지탱되는 나라잖아!
저것들이 하는 일이 뭐 있다고.
왕족 대신 평민으로 채워놔도, 이 나라는 별 탈 없이 돌아간다고 확신한다.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왕에게 우유부단하다고 하냐고?
그때 아크람이 카심을 국방부 장관 자리에서도 쫓아내자고 했을 때, 그의 말을 들었다면 이런 자리를 만들 필요도 없었거든.
자연히 알리가 지금쯤 카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
‘나도 이런 연극 따위를 할 필요가 없었고!’
“어떻게 할까요? 아크람.”
아크람에게 물으면서도, 내 눈은 카심들에게 가 있었다.
‘승부수가 무위로 돌아갔으니, 후폭풍은 각오하고 있겠지. 싸그리 지구 밖으로 날려 보내주지.’
그가 꾹 다문 입술을 열었다.
“끙. 아까 하려던 말, 계속해 주시겠습니까? 카림 왕자가 했다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눈썹을 으쓱했다.
‘정말 다 말하리까? 몽땅 다? 어디까지 해야, 다른 놈은 내버려두고 알리만 밀어줄 거요? 이 이상 알리의 로열로드에 장애물이 없으면 하거든요.’
아크람이 움찔하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겼다.
어느 정도까지 말을 해야, 아크람의 원하는 바와 수위를 맞출 수 있을까?
‘아크람과 척을 져도 좋을 건 없거든.’
그의 갈등을 보여주듯,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내 질문에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성훈. 단 한 마디도 빠뜨리지 말고, 그대로 말해 주겠나?”
분노가 담긴 목소리의 주인은 국왕이었다.
왕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한 마디도 빠뜨리지 말라니.
‘자미르가 확실히 역린을 건드렸군.’
아크람도 예상치 못했던 모양!
“전하! 하지만 지금은…….”
아크람의 만류에도 왕은 요지부동이었다.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말했다.
“한 마디도 빠뜨리지 말고! 부탁하네.”
마음의 분노와 격동을 감추기 위해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리라.
고개 숙인 카림을 보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읊었다.
“카림 왕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왕. 세. 자.’ 형님께서 국왕이 되시면, 저한테 국방부 장관 자리를 주십시오. 라고 하셨습니다.”
원로들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국정을 애들 소꿉놀이로 생각했구만. 쯧쯧.’
‘국왕께서 현명하게 처신하셨소. 나라를 말아먹을 뻔 했구만.’
‘저리되면 국방부 장관 자리도 빼앗아야 하는 것 아니오?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누가 아오?’
내가 말했지?
나한테는 꽃놀이패라고.
내 입에서 ‘왕세자’라는 말이 나온 순간, 네놈들은 끝난 거였어.
‘이제 정산의 시간이지.’
아크람과의 결과 정산.
그는 적절한 선에서의 카심 패거리의 정리를 원할 테고, 난 알리를 확실히 밀어준다는 확신이 필요하고.
국왕의 의지는?
그는 상관없다.
기분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국왕의 비위를 맞추느니, 나는 아크람이 훨씬 더 믿음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