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23화
왕의 한 수, 그리고 예정된 실수. (03)
신음성을 내뱉은 아크람이 말했다.
“성훈 님. 국왕께서는 일 년 전, 카심 일왕자의 왕세자 자격을 폐하셨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습관적으로…….”
내 말에 알리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따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겠지.
‘내가 부왕 앞에서 그 왕세자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한 지, 오 분이 지났나? 십 분이 지났나?’
어쩌라고! 이미 내뱉었는데!
그때도 뻔뻔스럽게 습관이라고 뻗댈 거다.
‘다 저 좋으라고 한 일인데, 고지식하기는. 쯧쯧.’
그러니까 이런 쓰레기들한테 당하고 살지!
아크람과 대화하는 동안, 왕은 눈과 입을 닫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심경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을 터.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고요. 전하.’
이미 일은 터졌다.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그에게 결단을 종용해야 했다.
“제가 예법을 잘 몰라,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귀는 열어 뒀던 모양, 왕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실례랄 게 뭐 있겠나? 그걸 가르쳐 준 자들이 문제지.”
앞에 자리한 왕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또한! 그걸 단속하지 못한 내 잘못이고.”
무슨 변명거리가 있으랴?
카심을 비롯한 모두가 머리를 조아렸다.
한숨을 내쉬며 왕이 말했다.
“아크람이 물어볼 게 있을 걸세. 귀찮더라도 좀 협조해 주겠나? 성훈.”
카심의 긴장된 눈빛이 보였다.
그리고 자미르가 카심의 추종자들과 뭔가 다급하게 이야기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자미르. 개인적인 감정은 별로 없어. 있다면 눈곱만큼이나 될까?’
나를 무시해서라거나, 혹은 내 조국을 무시해서 그런 건 아니야.
이건 일일 뿐이라고!
어떤 패를 가지고 있을까?
‘남몰래 숨겨둔 비장의 패가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파멸을 각오해야 할 거다.’
내가 왜 이렇게 자신만만하냐고?
놈들의 상대는 내가 아니라 왕이거든.
내가 직접 저들을 상대했다면, 당장 힘으로 찍어눌렀겠지.
그건 방송국에서 나와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터.
강압으로 상황을 모면하고 뒷공작을 꾸미는 데는 익숙한 사람들로 보였으니까.
‘바위에 주먹을 쳐 봐야 손만 아프지, 실익이 없다고. 내가 그런 무모한 20대 청춘도 아니고.’
내 집안일도 아닌데, 굳이 내 손을 쓸 이유도 없질 않나?
카심과 자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열심히 발버둥 쳐 봐.’
어지간한 패로는 이 상황을 뒤집기 어려울 거다.
절대 안 받을 테니까.
나도. 그리고 왕도.
아까 국왕이 했던, 알리를 후계로 세우려 한다던, 그 말이 진심이라면, 왕은 절대로 패를 받지 않는다.
가끔 바둑을 두다 보면 그런 경우 있지 않나?
상대는 생사패로 보고 덤비지만, 내게는 꽃놀이패인 경우.
기껏 돌 몇 개를 살리기 위해, 대마를 죽이는 멍청이는 없다. 절대로!
***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하신다면.”
왕은 심히 피곤한 듯, 왕좌에 비스듬히 기댔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엄지로 미간을 꾹 눌렀다.
“아크람. 계속해 주겠나?”
아크람이 고개를 숙였다.
“네. 전하.”
그 짧은 순간에 그의 머리에는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드디어 결심을 하신 것인가?’
능청스럽게도, 어리숙한 연기를 하고 있는 저 어린 손님이 국왕의 옆구리를 찔렀다.
벌떡 일어서지 않고는 못 견디게!
그것도 빼도 박도 못하는 순간에 말이다.
‘얄미울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이 아닌가!’
굳이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일촉즉발의 분위기.
아크람 또한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허허. 여기서 이게 터질 거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다네.’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그 여파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경솔함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온 국민이 지켜보는 중이니, 인정과 꼼수를 곁들이기도 어렵다.
성훈이 알고 있는 바가 어디까지인지 모르니, 일단은 진행을 하면서 추이를 지켜봐야 하리라.
***
고개를 든 아크람이 물었다.
“성훈 님. 왜 카심 일왕자를 왕세자라 칭했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심문하는 분위기!
이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대환영이었다.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살생부라고. 크크.’
그리고 아크람이 굳이 이유를 묻는 것은 절차에 불과했다.
‘다음에는 누가 그렇게 불렀는지를 묻겠지.’
이미 일은 터졌고,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 희생양의 명부는 내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지.
기대대로 일이 흘러가자, 속으로는 웃음이 터졌지만, 심각한 척하며 카심 쪽으로 눈을 돌렸다.
‘긴장해라. 난쟁이 똥자루. 그리고 쓰레기들. 싸그리 정리를 해 주지.’
간절한 눈빛의 카심이 보였다.
아까의 고압적인 위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떨리는 눈동자가 말했다.
‘제발!’
그 간절함에 미소로 답했다.
방긋!
‘봐주면 뒤통수를 칠 놈이! 무슨 개소리를!’
아크람을 보며 말했다.
전혀 사심 없는 목소리로.
“다들 그렇게 부르던데요?”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제가 실례되는 행동이라도 한 겁니까? 아크람?”
알리와 압둘이 뜨악 하는 얼굴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멀뚱멀뚱한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봤다.
남들이 다 그렇게 불러서 나도 그랬다는데 왜!
‘어쩌라고!’
미안하지 않으냐고?
‘내가 왜? 전혀!’
스스로 판 무덤이라고.
난 거기에 손가락 하나 보탠 것뿐이야.
살짝 뒤를 밀어준 것뿐이라고.
오른손 중지로 아주 살짝!
‘양심의 가책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머리털 검은 짐승은 봐 주면 기어오른다.
아크람의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
눈 밑의 씰룩거림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성훈. 왕가를 털어버리자는 말이오?’
이 일은 사우드 왕가 최대최악의 스캔들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반역의 단초가 되든지.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
상황이 상황이니만치, 숨죽이고 있던 카심의 쪽에서 강한 항의가 터져 나왔다.
이제 막 서른이 되었을까 싶은 젊은 왕자였다.
“다들? 뭐가 다들이오? 아크람은 우리 이름도 모르는 저 외국인 나부랭이의 말을 믿는다는 말이오?”
씩씩대는 목소리가 그의 분노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예상하고 있었다고!’
모진 목숨. 허술하게 버릴 수 없잖아.
하지만 실수한 게 뭔지 알아?
위기의 상황에서는 최악의 결과를 가정하고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
사신이 낫을 휘두르는데, 제일 먼저 목 내미는 멍청한 두더지가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 생각해 봤어?
‘아랍에는 이런 격언이 없나 보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그의 뒤에서 자미르가 뱀 같은 눈을 흘기며,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저 멍청이를 시험 삼아 내보냈구만.’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이름을 말하지 못하면, 내 말의 신빙성이 사라질 테니.
어차피 제 이름만 거론되지 않으면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다 생각하겠지.
속에 훤히 보이는 한 수였다.
어쩔 거야? 이 많은 사람을 다 날릴 거야?
이거겠지.
‘차라리 손으로 하늘을 가려라.’
자미르, 네놈은 정말, 국민 알기를 길가의 돌멩이로 여기는구나.
아크람이 인상을 찌푸렸다.
“손님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십시오.”
말한 사람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지도 않은 말로 오해를 받았는데, 무슨 예의는 예의입니까?”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당연하지. 당장 죽게 생겼는데, 예의 따위가 무슨 소용 있어?’
그가 나를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너!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까 자미르 옆에 있던 놈이잖아. 이름이 카림이었지?’
아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법상으로는 문제가 있지만, 그 말에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일단 적당히 얼버무려야겠군.’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살리고 봐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성훈 님. 저 말도 일리가 있군요. 혹시 그 말을 한 사람의 이름을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꾹 눌렀다.
‘개작두에 스스로 목을 들이미는구나. 카림! 네가 첫 빠따다!’
카림이 나를 다그쳤다.
“저거 보시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지 않소? 저런 자의 말을 신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카림이 분노했다.
“지금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지금 웃음으로 얼버무린다는 건가?”
그가 왕에게 항변했다.
“저자는 알리 왕자의 친구라 했습니다. 이는 필시 알리 왕자가 카심 일왕자를 음해하려는 수작임이 분명…….”
그 뒤에 숨어서 자미르가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왜 웃는지는 생각 안 해 봤지? 자미르.’
왜 웃냐고?
‘내가 저놈 이름을 기억하면, 내 말의 신빙성이 100%가 된다는 사실은 생각 안 하나?’
그게 아니면 나를 띄엄띄엄 머저리로 봤다는 거겠지.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미안해! 자미르. 머저리가 아니라서.’
격해지는 분위기 속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카림 왕자님. 제가 어찌 왕자님을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저 보라며, 길길이 날뛰던 카림이 고성을 멈췄다.
이때쯤 내 입꼬리가 눈에 닿아 있었을 거야. 아마.
‘이제 상황 파악이 돼?’
벌겠던 카림의 이마가 새파랗게 질렸다.
“무, 무슨. 뭘 기억한다고?”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눈을 카심과 자미르를 향하고 있었다.
둘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다.
“아까 왕세자, 아! 죄송합니다. 하도 많이 듣다 보니 습관이 돼서…….”
다 보인다고.
이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움찔하는 게.
TV를 보고 있는 국민은 어떨까?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자, 아크람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주의하시면 되지요. 계속 말씀하십시오.”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왕ㅅ…… 아니, 카심 왕자님께 떼쓰는 걸 다 봤다고요.”
“뭐? 내가 언제?”
눈을 부라리는 그를 직시하며 말했다.
“아까 들은 그대로 말할까요?”
“흥! 누가 겁먹을 줄 알아! 어디! 말해 봐!”
‘강아지도 안 되는 게, 네 집 안마당이라고 짖고 보는 거냐?’
주제도 모르고, 분위기 파악도 안 되는 어린놈이 내 앞에서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난 멍석 깔아주면 못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죽여달라면 죽여줘야지!
어차피 이런 놈은 알리에게도 전혀 불필요한 존재였다.
물론 나도 이놈하고는 엮이기 싫고.
“카심 일왕자가 국왕이 되…….”
하지만 내 말은 다른 이의 발언 때문에 끊어지고 말았다.
“부왕! 꼭 들으셔야 할 말이 있습니다.”
연회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큰 소리가 들렸다.
자미르였다.
‘그래. 똥줄이 타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아크람이 그의 말을 저지했다.
“국왕께서 듣고 계십니다. 어찌 이런…….”
뒷자리 노인들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왕세자 폐위를 당했으면, 자중했어야지.’
‘너무 오래 그 자리에 있었소. 그럴 만도 하지.’
‘그럴 만도 하지? 국왕이 포커 해서 따는 자리요? 자격이 없으면 응당 내쳐야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카심을 비난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카심은 이 자리가 얼른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겠지.
‘끝나면 돌아갈 자리가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겠지만.’
돌아간다 해도 원래의 그 자리는 아닐 것이다.
‘감히 내 사람을 건드려? 죽을라고.’
자미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억울합니다. 저자는 애초부터 우리를 속이려고 우리말을 못하는 척하고 우리에게 접근했습니다.”
개소리!
내가 문장 얘기밖에 더했냐?
날 응접실로 부른 건 저 카심이라고!
자미르의 말이 이어졌다.
“부왕. 저 동양인이 하는 말을 전부 믿으시면 안 됩니다. 악의에 찬 거짓입니다.”
억울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네.’
아크람이 내게 눈짓하며 의중을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 봐라.’
카심의 정치적 기반을 소멸시키고, 알리를 띄우는 자리였다.
어느 쪽이든 의혹이 남아서는 국민을 완벽하게 이해시키기 어렵다.
‘흠 없는 왕을 만들고 싶다고.’
내놔라.
네놈이 자신하는 한 수를.
그래 봤자 안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