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21화
왕의 한 수, 그리고 예정된 실수. (01)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번잡하지 않고, 절제된 분위기였다.
이어 마이크를 착용한 PD가 눌린 목소리로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셔터 소리 최대한 줄이고! 조명도 좀 떨어지고!”
“국왕께서 몇 년 만에 주최하신 공식 행사다. 우리는 국왕의 건강한 모습만 담으면 되는 거니까, 최대한 방해되지 않게 행동해!”
***
정ㆍ재계인사들이 줄줄이 나와 왕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래 봤자 모두 사우드 왕가의 일원들이었지만.
5분가량의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고, 아크람이 왕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오늘 국왕께서 이 자리를 주최하신 것은……. 왕가 문장의 변경과 그에 따른 변화를 국왕께서는 기꺼이 즐거워하셨고, 그 디자이너에게 손수 치하하기 위하심입니다.”
카심이 뚱한 표정으로 제 가슴을 쳐다보며 투덜거렸다.
“이봐! 이 문장이 그렇게 대단한 거야? 이게 없으면 우리가 왕족이라는 걸 모르냐고? 안 그래?”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 입술만 비틀 뿐이었다.
아크람의 말이 이어졌다.
“이게 뭐 그리 칭찬할 일이냐고 생각할 일원도 있겠지만, 국왕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셨습니다.”
왕이 좌중을 찬찬히 둘러보는 가운데, 아크람은 계속 말을 이었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왕가의 차량에 깃발을 부착하고 다녔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가의 일원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었고, 그것에 백성들은 존경을 표했지요.”
“하지만 지금! 그걸 달고 다니시는 분들이 계신지요?”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었다.
성훈은 잠시 의아했다.
‘그럼 왕족이라는 걸 어떻게 드러내냐고? 그러고 보니 아까 들어오는 차량에서도 깃발을 보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아크람은 계속 말을 이었다.
“왕께서도 그걸 처음 보시고는 섭섭해 하셨습니다만 이내 마음을 바꾸셨지요. 왕가의 문장이 국기보다 더 화려하고 멋있게 차에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떤 이는 아예 엠블럼을 떼버리고 왕가의 문장을, 또 어떤 이는 본네트에 통째로 문장을 새기셨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카심 왕자님.”
지적을 받은 카심이 씁쓸히 입맛을 다셨다.
그의 롤스로이스 리무진에는 왕가의 문장이 5개나 붙어 있었다.
엠블럼 대신 하나, 본네트에 크게 하나, 그리고 차량 양쪽 도어에 각각 하나씩, 그리고 트렁크 도어에도 또 하나!
더 붙이고 싶었지만, 두서없이 난잡해질 것 같아서 거기서 멈춘 것뿐이었다.
그 덕에 1km 밖에서도 차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그 차가 카심의 것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흠흠. 그건 왕가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일이지요.”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카심이 차에 문장으로 도배한 이유를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멋있잖아! 안 그래?’
그 전에는 왕국기도 볼품없다고 공식적인 행사 외에는 달지 않았던 카심 치고는 괄목할 만한 변화였고, 그 시기 즈음에 엠블럼을 왕가 문장으로 바꾸는 것이 유행했었다.
어쩌면 지금의 알리를 이토록 유명하게 만든 것은 카심 본인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무도 그의 앞에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지만 말이다.
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전쟁의 시대를 살았다. 우리 영토와 석유를 탐내는 이, 우리의 성지인 메카를 노리는 무도한 자들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뒷자리에 앉은 하얀 수염 기른 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우리는 왕가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결사 항전했었지. 그렇지 않은가?”
노인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선조와 전우의 목숨으로 지켜낸 문장은 애물단지가 되었더군. 볼품없다며 아예 달고 다니지 않는 녀석도 보았다.”
왕의 눈이 카심을 향했다.
카심은 그 시선을 외면하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아크람이 순화해서 말했지만, 당시 나는 분노했었다. 왜! 왕가의 문장이 이리도 천대받는다는 말인가? 그들은 왕가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없다는 말인가?”
준엄한 호통에 좌중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오만이라는 것을 알라께서 깨우쳐 주셨다.”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연회장의 끝까지 울려 퍼졌다.
“알라께서는 화려하면서도, 그의 위엄이 어린 문장을 보내주셨고, 그것으로 어린 왕족들의 자부심을 고취하셨다.”
어느새인가 왕의 말투는 부드러워져 있었다.
“허허. 한순간이더군. 온 나라가 왕가의 문장으로 도배되는 것은.”
왕의 말을 들으며 성훈이 속으로 미소 지었다.
‘얼마나 큰 상을 주시려고 이리 치켜세우는 겁니까?’
“그동안 이 늙은 머리를 가득 채웠던 염려와 고민이, 이 문장으로 인해 해결되었다.”
왕의 양손이 하늘로 올라갔다.
“알라의 보살피심이 아닐 수가 없도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고개를 숙였고, 양팔을 하늘로 추어올렸다.
이 엄숙한 모습은 방송국 카메라를 통해 전국으로 실시간 방송되고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왕이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이에 나는 크게는 국왕으로서, 작게는 가문의 수장으로서 이 문장의 디자이너인 ‘성훈’에게 상을 수여하고자 마음먹었다.”
누가 반박을 하랴?
장내에 왕의 결단에 찬성하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심의 진영에서만 못마땅한 표정으로 형식적 박수를 쳤을 뿐!
하지만 왕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이 문장이 왕가의 문장이 되게끔 뒤에서 조용히 노력한 사람이 있다.”
‘응?’
왕의 입에서 거론된 인물은 뻔했다.
눈치 챈 카심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나는 그 노력 또한 마땅히 치하를 받아야 한다 생각했노라.”
알리 쪽을 힐끔 쳐다보자, 그도 몰랐던 듯 눈을 마주치며 당황해 했다.
오직 말하는 당사자, 국왕과 아크람만이 평온한 표정이었을 뿐이다.
‘아까는 아무 말도 없더니, 이거 한 방 먹었네.’
어쩌면 카심의 방해가 있을 것을 우려하여,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성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겠군요.”
압둘이 알리를 보며 말을 받았다.
“이제부터는 대놓고 자네를 밀어주겠다는 거!”
‘이거 대박인데?’
몇 년 만에 왕이 주최하는 공식 행사.
아픈 몸을 끌고 나온 국왕.
그런데도 정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주제.
거기서 언급되는 유일한 왕자의 이름.
‘그게 왕가의 명예를 높였다고 칭찬하는 거잖아.’
국왕에게 향하던 존경과 염려는 모두 알리에게로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어쩐지 조목조목 짚어가며 내 디자인을 칭찬할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고!
거기다가 알리에게도 상을 수여한다?
기자들이 진을 친 이 마당에.
‘이건 날 부르기 전에 이미 계획되었던 모양이군.’
아니 어쩌면 다 써놓은 각본에 나라는 조연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어쩐지 곧 관 뚜껑 덮을지도 모른다고 구라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일 년 이내라는 조건은 왕의 건강을 고려한 계산이었던 것이다.
‘미리 알았으면, 내가 조건을 제시했을 텐데…….’
하지만 상관없다.
‘알리가 왕 되고 나서 뜯어먹으면 되니까.’
명분은 만들기 나름이고.
깔아준 멍석에서 춤을 쳐줬으니, 그 정도는 받아도 되겠지.
어쨌거나 불만은 없었다.
‘나야 좋지. 알리가 힘을 받는다면.’
그리고 한쪽으로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다.
‘우리가 이런데, 카심 쪽은 어떤 느낌일까?’
***
술렁거림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자미르. 이런 말이 있었나? 알리에게도 상을 내린다니?”
당황한 카심이 제 가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이게 이런 자리에서 상을 줘야 할 만큼의 큰 공이던가?”
당황스럽기는 자미르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때였다.
“부왕께서 아까 말씀하셨잖습니까! 하지만 그 말에서 딴죽을 걸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들 또한 차 엠블럼 대신 새로운 문장을 붙이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걸 붙이면 촌스러운 깃발을 달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또한, 사우드 왕가 일원 외에는 아무도 그 문장을 사용할 수 없다.
그건 왕가의 문양이니까!
누구나 알고 있는 불문율이었고, 엠블럼 대신 사용하기에도 충분히 아름답고 세련되어 있었다.
평민과 자신들을 구분 짓고, 신분 격차를 드러내는 것!
그것은 문장이 가진 역기능이었다.
물론 그 때문에 함부로 경거망동하는 일도 줄었지만 말이다.
단지 ‘비싼 차.’가 아니라, 왕족의 ‘비싼 차!’
이 문장은 그들의 자부심뿐 아니라, 허영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리된 지도 어언 일 년이 넘었다.
그걸로 자랑하고 다녔는데, 어디에서 딴죽을 건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서 당하라고!”
흥분한 카심의 목소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럴 거면 적어도 부왕께서 내게 한마디 언질이라도 했어야 했던 거 아니야? 자미르.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어이없는 말에 자미르가 남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천지에 왕이 왕자 허락받고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이런 말을 지금의 카심에게 기름을 끼얹는 것.
카심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
“저도 금시초문입니다. 전하.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지금은 부왕의 공식적인 행사입니다.”
카심이 눈을 부릅뜨며 잇소리를 냈다.
“하지만 말이다.”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으로 보아 심적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일단 진정하시지요. 기자들도 와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아무도 좋게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왕이 내놓은 한 수는 제대로 먹혔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카심의 진영이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거든.
이것으로 국왕은 자신의 의지를 일부 카심에게 전했다. 그리고 국민에게도.
‘큭. 늙은 생강이 여간 맵지 않네.’
아크람이 매처럼 카심의 진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조급한 마음에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아크람의 눈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공으로 수십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아니군.’
하지만 알리는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이면, 카심 형의 뒷공작이 장난이 아닐 텐데…….”
압둘이라고 그 의미를 모르랴!
“어쩌겠나? 이미 벌어진 일, 이제부터는 자네 스스로 헤쳐 나가야지. 국민도 충분히 국왕의 의중을 이해했을 걸세.”
어쩌면 국왕은 두 아들의 정면 승부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하지만 내게는 왕이 아닌, 아비로서의 마음이 느껴졌다.
맏이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겼건만, 보기 좋게 기대를 배신당했고, 셋째에게 넘기려고 하니 남은 힘이 이것밖에 없었으니.
‘어쩌면 이게 왕이 공식적으로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지원일지도 모릅니다.’
성훈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럼 그 마지막 한 수, 제대로 써먹어야죠.”
알 리가 물었다.
“뭔가 수가 있나?”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아직 나는 수를 놓지도 않았다고요.’
왕이 선언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왕가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알리에게도 상을 수여하고자 한다.”
***
흥분한 카심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아직 우리에게는 쓰지 않은 패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저 동양인 놈?”
“네.”
“하지만 간사한 놈이잖아. 만약에 놈이 만약 마음이 바뀌어서 우리말대로 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럼 제가 직접 나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왕께서 우리말을 믿겠어?”
“물론 모함이라 생각하시겠지요.”
“그럼 방법이 없는 거잖아.”
자미르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럼 알리 형을 부르면 됩니다.”
“알아듣게 말하라고.”
예상치 못한 답에 카심이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들이 자신들을 힐끗거렸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저는 알리 형이 거짓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십 년을 겪고도 모르십니까?”
그 말에 카심이 반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차기 왕 자리가 걸린 거라고. 이런 상황에서 부왕의 기분을 거스를 말을 하겠냐고?”
“아직 알리 형을 모르시는군요. 그는……. 왕을 안 하면 안 했지. 거을 고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주변의 기자들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체면 깎이는 짓을 절대 안 하는 놈이지.”
“제 잘난 멋에 사는 사람은 그게 약점입니다. 사소한 거짓말도 넘기지 못하지요. 스스로 자존심이 상해서 말이죠.”
“크큭. 확실히 놈에게는 그런 면이 있지.”
“그리고 우리는 알리 형의 입에서 단 한 문장만 끌어내면 됩니다. ‘이 문장을 만드는데 걸린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자미르의 말에 카심의 눈이 번뜩였다.
“전하. 그것만으로 상황 종결! 그렇게 날림으로 만든 것을 부왕께서 인정하실 리가 없습니다. 부왕의 성격은 전하께서 가장 잘 아시잖습니까?”
“알다마다. ‘결과는 시간과 땀에 비례한다.’ 부왕께서 입에 달고 사시는 말이지.”
“생각해 보십시오. 전하. 알리 본인이 그렇다고 하는데, 부왕께서 안 믿으시겠습니까?”
그제야 카심이 숨을 골랐다.
“알리가 그렇게 할 거다? 확신할 수 있냐?”
끝까지 의심하는 카심이었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하지 않던가?
카심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미르가 뱀 같은 눈을 번들거렸다.
“여태껏 그 고지식한 성격 탓에 셀 수도 없는 손해를 봤지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만약 거짓을 고하면…….”
카심의 염려에 단언하듯 말했다.
“스스로 수치스러워 왕을 양보할 인간입니다.”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
아크람이 성훈을 앞으로 불렀다.
“예의를 갖추십시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왕에게 인사했다.
늘 하던 대로.
미국인에겐 미국말로, 일본인에게는 일본말로,
그리고 아랍인에게는 아랍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