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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320화 (320/427)

건축의 신 320화

왕세자(06)

“일시적으로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전하의 기반은 여전히 견고하다네.”

당연하겠지.

삼십 년간 독주했는데, 그 정도도 안 되면 등신이게?

그의 인맥은 사우디아라비아 전체를 아우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설령 카심이 국방부 장관까지 물러난다 해도, 그의 기반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 있는 놈들을 몽땅 날린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어차피 수면 위에 있는 것들이니.’

하지만 수가 많으면 국왕에게도 부담이 될 것이며, 일시적으로 알리에게 힘을 실어준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다.

“삼십 년의 세월이었습니다. 당연하지요.”

“크크. 잘 아는군.”

“큰일을 두고 허언하실 분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뜸은 그만 들이시지요.”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그만 패를 까라고!’

“밖에서 몰아치고, 안에서 흔들면, 아무리 알리 형이라도 어쩔 수 없지.”

안과 밖?

밖이야 그렇다 치고, 안이라는 건 뭐지?

아무렇지 않게 능청을 떨려 물었다.

“밖이라는 건, 돈으로 몰아치겠다는 거군요.”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

헌데 구체적인 방법은?

자미르에게 물었다.

“만약 국왕이 알리를 신뢰한다면 도와줄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거기다 아크람도 있구요.”

자미르가 비릿하게 웃었다.

“당연히 그 정도야 예상하고 있지. 그러니 대놓고 방해할 수는 없어.”

“무게 균형을 잡는답시고, 아크람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

“곤란하지.”

‘그럼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건데?’

예상되는 바가 없어, 조용히 그에게 눈짓했다.

“반대로 문제가 없다면, 부왕이나 아크람이 대놓고 도움을 주기는 어렵지.”

“당연하지요.”

그랬다간 추잡한 물밑싸움이 본격화될 것이다.

체면과 명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암투만이 벌어진다.

그걸 왕과 아크람이 바랄 리가 없다.

“하지만 어떤 수를 쓰실지 상상이 되질 않네요.”

자미르가 간교한 눈빛으로 말했다.

“현 중앙은행장이 전하의 사람이라네.”

그 한 마디만으로도 그들이 왜 승리를 자신하는지, 모든 이유가 설명되었다.

거기서 약간만 금리조정이 들어가면, 시중 은행에서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거잖아.’

게다가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무리 왕이 되고 싶다고 해도, 민생이나 세계정세 따위는 뒷전이라 이거냐?’

뜨악한 나에게 말했다.

“대의를 위해서는, 안타깝지만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네.”

“끄응. 그렇지요.”

비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성공만 한다면, 확실히 알리는 망한다. 모든 은행이 그에게서 등을 돌릴 테니까!’

그리고 알리와 비슷한 상황인 자들도 줄줄이 도산하겠지.

‘다른 건?’

그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대답 대신 자미르는 입술을 비틀었다.

“거기까지만!”

“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알 수 있겠지? 왜 알리 형이 망할 수밖에 없는지?”

더 들을 수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계획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알았으니까.

어차피 드러나게 진행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이미 실행된 후에는 되돌릴 방도가 없다.

‘이래저래 죽어야 할 이유가 늘었구나.’

자신만만한 자미르에게 물었다.

“벌써 진행이 된 모양이군요? 그리 확신하시는 걸 보니.”

그가 검지를 흔들었다.

“아니지. 이건 최후의 수단이라고.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라지만, 이건 우리도 타격이 크다고. 함부로 진행할 게 아니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나왔지만, 겉으로 능청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과 아크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면 진행하겠다는 말이군. 아크람한테 일러야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더는 끼어들기도 애매하고.

그러면 국왕이 알아서 할 것이다.

‘감사원에서 털든, 행장을 바꾸든. 그건 요령껏 하면 되는 거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어쨌거나 알리 왕자의 파산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군요.”

자미르가 간사하게 웃으며 나와 눈을 맞췄다.

“이제 자네가 뭘 하면 되는지 알겠지?”

“제 어깨에 세계 경제가 달렸네요.”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크크큭. 어린 친구가 기회를 잡을 줄 아는군.”

“사내가 피치 못한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내부적으로는 어떤…….”

“그건 일이 끝난 다음 말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런 것까지 말해 줄 정도로 아직은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자네같은 사람은 결정을 했을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눈웃음치며 말했다.

“네. 이런 말씀을 들었는데, 더 고민한다면 그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요.”

자미르가 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당연하지. 그럼 부왕 앞에서 어떤 식으로 말할 건가?”

기대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내가 왜 대답해 줘야 하는데?

나도 ‘어떻게 하면, 이들의 계획을 더 들을 수 있을까?’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더 이상의 정보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거든.’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벌써 시간이 다 된 것 같군요.”

“응? 아직 십 분이나 남았는데?”

“아크람이 저더러 십 분 전에 미리 나와 있으라고 하더군요.”

“아크람이? 왜?”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나가지 않으면 그가 저를 찾지 않겠습니까? 그럼…….”

아크람이라는 말에 카심이 먼저 일어섰다.

“괜히 의심을 살 필요는 없지. 일어나지. 자미르.”

자미르가 걸어 나오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네 앞날이 이 일에 달렸네. 실수하지 말고.”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서가던 카심이 뒤돌아보며 물었다.

“자미르. 정말 이놈에게 호텔 인테리어를 맡길 거야?”

“그건 아민이 결정할 일이지요. 곧 그 녀석의 것이 될 텐데.”

“그럼 이놈은?”

자미르가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부왕께서 분노하실 텐데, 과연 이놈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럼 내가 거짓말한 게 되잖아?”

“부왕께서 그리 결정하시면, 우리도 어찌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리고 뭐?”

“이런 박쥐 같은 간사한 놈에게는 본때를 보여줘야지요. 흐흐흐.”

둘이 마주 보며 웃었다.

물론 나도 따라 웃었다.

카심이 나를 도외시한 채 말했다.

“그런데 정말 아민으로 되겠어?”

“그럼요. 녀석이 그 호텔에서 일한 지 벌써 십 년입니다. 지금 바로 이어받아도 될 겁니다.”

“그럼 여객사업과 항공사업은?”

“자바르와 이브라힘 정도면 되겠지요.”

“알겠네. 자네가 알아서 하게.”

살생부에 세 명의 이름이 더 올랐다.

‘뜻밖의 수확인걸. 아민, 자바르, 이브라힘.’

***

자리로 돌아왔다.

나와 카심들이 담소를 나누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알리가 투덜거렸다.

“성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보군.”

나 대신 카심이 대답하며 빈정거렸다.

“왜! 해코지라도 할 거라 생각했나?”

알리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누가 형님께 물었습니까?”

퉁명하게 대꾸하며 노려보는 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알리. 뭘 꾸미는지 몰라도 하지 마라. 이미 아크람과 말을 맞춰뒀겠지만.”

이미 카심은 알리와 아크람의 공조를 의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무슨 생뚱맞은 말이오? 형님.”

카심은 검지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뭘 해도 안 될 거야. 이미 대세는 기울었으니까.”

영문도 모르고 졸지에 비난을 당한 알리의 미간이 대번 찌푸려졌다.

알리에게 들으라는 투로 카심이 말했다.

“동양인. 자네만 믿겠네. 자넨 계약 걱정은 하지도 말고 견적이나 뽑아오면 돼!”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얼마가 나올지는 알고 계십니까?”

“얼마가 나오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가격 협상을 하지 않는다네. 오로지 품질만 보지.”

‘크. 자랑이다. 협상도 할 줄 모르는 거겠지.’

해 본 적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가 자미르를 보며 물었다.

“기껏해야 몇 푼이나 하겠어? 안 그래?”

자미르도 그에 동조했다.

“뭐가 되었든, 최고급이어야만 해.”

“저는 비쌉니다. 물론 우리 장인들도요. 고작 땅에서 나는 석유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흥. 그건 맘대로 생각하고.”

어차피 해줄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실행하지도 못할 공수표를 날리고 있었다.

‘어차피 나도 당신들한테 볼일은 끝났어. 잘 가!’

카심이 사라지고, 알리가 퉁명스레 물었다.

“이번에는 무기라도 팔아먹을 셈인가?”

단가 이야기를 하는 게 귀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런 거라면 봉을 제대로 물었어. 제 말마따나 협상이라고는 모르는 인물이니까.”

중년의 질투에 코웃음 치며, 화제를 바꿨다.

“벌써 당신 호텔을 인수할 생각을 하고 있던데요?”

“무슨 그런 미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그러니까요.”

“어처구니가 없군. 건설이나 호텔에 대해서는 개뿔도 모르는 것들이!”

자신만만한 알리에게 제동을 걸었다.

“아민이라고 아세요?”

“아민? 왜?”

“그 사람이 이어받을 거라던데요? 당신 호텔.”

“뭐라고?”

일순 알리가 휘청거렸다.

압둘이 그의 몸을 받치며 말했다.

“그는 호텔의 부지배인 중 하나야.”

“아!”

그래도 어딘가 총지배인이 아닌 것이!

“내! 이놈을 당장!”

험악하게 인상 쓰는 알리에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바르와 이브라힘도요.”

“뭐라고?”

압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훈. 혹시 저 인간들이 자넬 속이는 거 아닐까? 일부러 알리와 이간질하려고?”

그 말에 피식 웃어줬다.

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요.”

“왜 그렇게 확신하나?”

“아랍어로 말하던 걸요?”

아까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아랍어를 모르죠.”

“아직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 아랍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알리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그럼 부왕께도?”

“그럴 리가요? 이렇게 토브까지 입었는데.”

먼지 한 톨 없는 새하얀 토브를 탁탁 털었다.

“자네가 우리말을 하면 놈들이 기겁을 하겠군.”

알리의 호탕한 웃음에, 압둘 또한 상황이 예상되는 듯, 웃음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기겁을 할 건 아랍어로 말한다는 사실이 아닐 겁니다.’

“하여간 내 이놈들을 주리를…….”

흥분하는 알리를 달랬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히 조사하세요.”

압둘도 덧붙였다.

“그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충분히 조사해서 결정해도 늦지 않네.”

저들은 내 앞에서 경솔하게 행동한 것을 후회해야 할 것이다.

“아까 카심 왕자와 했던 말은 그게 다인가?”

압둘의 물음이었다.

“왕세자 전하께서 국왕 앞에 가면 알리 험담을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고요. 호텔 인테리어를 저한테 맡긴다면서요.”

“그 말을 믿나?”

믿었던 수하들에게 배신당한 느낌에 부루퉁해 있던 알리가 역정을 냈다.

“거참! 성훈. 왕세자란 말 좀 하지 말래도.”

알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지만, 씨익 웃으며 눈썹을 으쓱였다.

“하하. 입에 붙어서 그런가 봐요. 자꾸 실수하게 되네요.”

“부왕 앞에서는 조심해 주게. 행여라도 편찮으신 분께 좋지 않은 영향이 갈 수도 있으니.”

내게 재차 엄중하게 주의를 시켰지만, 난 머쓱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곧 같은 실수를 해야 하거든요.’

알리를 안심시켰다.

“명심할게요. 그런데 습관이라 쉽게 고쳐지지 않네요.”

쉽게 고칠 수 있다면 습관이라 부르지도 않겠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흐. 성훈.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습관이란 말을 하는가? 응?”

따지듯 묻는 알리를 압둘이 말렸다.

“너무 그러지 말게. 그 말은 자네 형제들에게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끙.”

대답이 궁해진 알리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알리를 놀리듯, 압둘이 물었다.

“성훈. 국왕 앞에서 정말 알리 험담을 할 작정인가?”

“훗! 노력은 해 봐야죠.”

그 전에 별일만 없다면?

“뭐야?”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은 알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호텔 인테리어를 모두 제게 맡긴다는데, 아무래도 저 같은 소시민은…….”

“쳇! 마음대로 하게나.”

아크람이 단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성훈. 이제 곧 오실 모양일세. 압둘. 자네도 일어나지.”

“그래야겠군.”

아크람이 연회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국왕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아크람이 단상 아래로 내려갔고, 박수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국왕이 아크람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했다.

‘이제 연극을 끝내야 할 시간이군.’

나는 제안을 할 뿐이다. 결론은 국왕이 내리는 것.

‘아비로서의 부정이 우선인가? 아니면 나라를 책임지는 왕으로서의 책무가 우선인가? 당신의 선택만이 남았소.’

내 눈에 시시덕거리며 웃고 있는 카심의 무리가 들어왔다.

국왕이 왕좌에 앉았고, 박수 소리도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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