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317화 (317/427)

건축의 신 317화

왕세자(03)

“이보게. 성훈! 도대체 자네까지 왜 이러는…….”

알리의 목소리 끝이 뗠려왔다.

귀에 거슬리는 왕세자 소리를 뼈를 깎는 심정으로 참았는데, 성훈마저 그러자 울화통이 터진 모양이었다.

앞서 하는 이야기들을 다 들었을 텐데 말이다.

‘눈치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

카심에게 다가가는 성훈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압둘의 저지에 막히고 말았다.

알리의 눈썹이 송충이처럼 꿈틀거렸다.

꾹 다문 턱에서 일그러진 쇳소리가 삐져나왔다.

“이건 부왕의 의지를 무시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성훈이 외국인이라 쳐도…….”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성훈은 외국인이야. 그리고 이슬람의 법도도 모르는, 손님이지.”

“그래도…….”

압둘이 눈썹을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설령 모른다고 해도, 누가 성훈이 그 법도를 무시한다고 하겠나? 저렇게 토브에 구트라까지 걸치고 있는데.”

어딜 봐도 성훈의 복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잖아.

‘저는 당신네 문화를 존중합니다!’라고.

“저것 봐. 대놓고 외국인이라고 하고 있잖아.”

누가 봐도 어눌한 아랍어를 구사하며, 카심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저건 또 왜 저래? 아까는 나보다 더 말 잘하던 녀석이!”

“외국인이라 그거지.”

그는 알리의 어깨를 도닥이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저걸로 성훈에게 해가 미치는 일은 없을 거야.”

아크람이 늙은 몸을 이끌고 직접 초대한 손님이었다.

저들이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결례를 저지른 것만으로도 아크람의 불쾌한 눈빛을 온몸으로 느껴야 할 테니.

압둘이 확신하며 말했다.

“성훈의 행사를 막는 건, 아크람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격이라고. 그리고…….”

말하라는 듯 묵묵히 바라보는 알리에게 말을 이었다.

“설령 그게 자네라고 해도 마찬가지일세.”

맥 빠진 목소리로 알리는 말했다.

“후. 누가 그걸 걱정하나? 당연히 알아서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겠지!”

알리의 입이 툭 내밀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걸 그냥 넘어가자고?”

압둘은 항변하는 알리의 눈을 슬며시 피했다.

‘국왕의 명령을 무시하는데, 그냥 넘어가자고?’

이미 답은 나와 있질 않나?

‘안 넘어가면 어쩔 건데?’

알리는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자네도 성훈이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저건 알고도, 일부러 저러는 거라고!”

압둘은 복장이 터지는 듯, 가슴을 텅텅치는 알리를 달랬다.

“그래. 나도 알아.”

“그걸 아는 자네가 나를 말리는 건가? 내 아버지의 말이 무시당했는데?”

허나 그의 맏아들을 비롯해 조카들까지도 저렇듯 대놓고 왕의 말을 무시하는데, 알리의 말이 무슨 설득력이 있을까?

또한, 그 사실을 알리에게 짚어줘 봐야 무엇하랴!

또 한 번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어쩔 수 없잖아. 나도 저게 남의 일 같지가 않다고.’

압둘도 답답한 가슴을 달래며 알리의 손을 꾹 잡았다.

“아니까 말리는 거야. 자네 속을 뻔히 아는 사람이 일부러 자네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저러는 건 아닐 거야.”

“그럼 뭔데?”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봐. 자! 물 한 잔 마시고. 그렇지. 숨을 크게 쉬라고.”

알리는 살 맞은 멧돼지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호흡을 진정시켰다.

***

어눌한 아랍어에 카심이 고개를 돌렸다.

“뭔가?”

나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응! 누구지?”

나에게 묻는 말이 아니었다.

눈동자는 자미르를 향해 있었으니까.

그는 내가 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아마도 아크람이 불렀다는, 그 동양 화가가 아닐는지요?”

어렵사리 추측할 수 있었으리라.

이곳에 동양인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거든.

자미르가 내게 물었다.

“자네. 어디서 왔나?”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직 서툽니다.”

동문서답.

자미르가 돌아서며 피식 웃었다.

“전하. 아랍어를 전혀 모르는 모양입니다.”

카심이 내 웃음에 화답했지만, 내용은 웃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허 참. 손님이라고 부른 것이 우리 말도 할 줄 모르는 반푼인가?”

“오히려 잘된 일이지요. 국빈이라 존대해 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신경 쓰실 정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마주 보며 웃고 있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일단 끝나고 보자. 그때도 내가 신경이 안 쓰이는지.’

그가 삐딱한 눈으로 내 복장을 위아래로 훑었다.

“흠. 그런데 자미르. 왜 이 친구는 토브를 입고 있는 거냐?”

자미르 역시 위아래로 훑고는 씨익 웃었다.

“우리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력이 강하니, 존경의 의미에서 저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훗. 자국의 전통에 자부심이 없나 보군. 남의 나라 옷을 저렇게 태연하게 입다니.”

“그럴 만도 하지요.”

“그게 왜 그럴 만한 거지? 내가 왕세자로 외국에 나갈 때, 토브 외에 다른 옷을 입는 걸 봤나? 그건 기본이라고.”

자미르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야 왕세자 전하께서는 우리 사우드 왕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시고, 또한 역대 이래로 지금이 가장 강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멍청이라도 그 의미를 모르랴!

현 국방부 장관인 자신을 칭송하는 것이 아닌가?

“크크크. 이런 사실을 부왕께서도 아셔야 할 텐데.”

“왕세자 전하의 충심은 머지않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는 뒤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나? 형제들?”

공식적인 자리인지라, 큰 소리는 못 내고, 서로 앞 다투어 칭송을 시작했다.

“전하께서 미제무기를 사들임으로써 그들을 우리의 강력한 우방으로 만드셨지요.”

“그럼! 미국이 우리 말이라면 꿈뻑 죽지.”

“그게 다 미국의 최대 고객인 왕세자 전하 때문이지.”

***

떨어져서 듣고 있던 알리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저게 말이냐? 방구냐?”

“크크큭.”

압둘은 웃음을 참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쿠웨이트로서는 심각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카심이 얼마나 무기 거래에 허술하게 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이미 소문이 다 났는데, 뭘 더 깊이 알아볼 필요가 있겠는가?

“국방부, 저 머저리들! 기름을 있는 대로 퍼다 바치면서. 우방? 흥!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이 우릴 도와줄 것 같아? 오히려 더 좋은 무기를 권하겠지. 이기고 싶으면 이걸 사라고. 결국, 죽어나는 건 우리뿐이라고.”

“하긴 이 중동이 무슨 전략적 가치가 있어서 지원을 오겠나? 한국이면 몰라도.”

중동의 전략적 가치가 얼마나 될까?

기름을 제외한다면…….

성훈이 그 말을 들었다면, 혀를 찼을 것이다.

‘누구는 돈이 없어, 원조란 원조는 다 받으면서도 기술을 빼돌리고, 그걸 바탕으로 무기를 팔아먹는 나라가 됐는데. 쯧쯧.’

어떻게든 생존을 위해, 자주국방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한국에 비하면, 카심의 방법은 허술하다 못해 무방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는 북한의 위협 때문에 유달리 무기 성능과 수량에 민감한 편이다. 반면 예산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결국, 좋은 물건을 많이 사면서도 값도 싸야 한다는 매우 극악한 조건을 안고 협상에 임한다.

그럼에도 미국에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등쳐먹은 일이 수차례!

물론 그 또한 북한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며,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겠지만.

‘한국인이 단가 깎는 데는 도사라구요.’

성훈이 한 말이었지만, 알리는 다른 말을 했었다.

‘아냐. 한국인은 단가를 후려치는데 도사야. 적어도 자넬 보면 그래.’

하여간 이건 지난 일이고.

“압둘. 더 열 받는 게 뭔지 알아? 시가보다 비싸다 해도 저것들은 협상을 하려고 들지 않아.”

“비싼데 안 깎아? 미친 거냐?”

이해하지 못한 압둘이 고개를 갸웃하자, 말을 이었다.

“단가가 커야, 리베이트도 클 테니까. 우리 국방부 머저리들이 전 세계 무기 단가를 최대치로 올려놨지. 등신들.”

카심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뿐, 알리는 그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러니 미국이 우리를 뭐로 보겠어? 최대 고객? 지랄하네. 봉으로 봐! 절대 봉!”

***

자미르의 말이 이어졌다.

“중국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가난하고 인구만 많은. 어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카심이 수염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남의 나라 옷을 입어? 흥! 수치를 모르는 족속이군.”

“이게 바로 왕세자께서 만드신 우리나라의 위상입니다.”

카심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훗. 아크람은 그런 나라 사람을 뭐 볼 거 있다고 부른 거야? 게다가 저런 별 볼 일 없는 인간을 위해 바쁜 왕족들을 모이게 하다니.”

나도 마주 보며 미소의 농도를 높였다.

‘이런 썅! 못 알아듣는다고 마구 지껄이는군. 개처럼 오라 가라 부른 게 아니라, 정중하게 초대를 받은 거다. 이 똥덩어리들아! 그리고 이게 존중을 해 주는 거지, 어떻게…….’

허나 지피지기백전불태!

‘많이 비웃어라. 곧 내 눈도 못 마주치게 해줄 테니까.’

지금은 어떤 놈이 수족인지 알아야 살생부를 만들든지 새기든지 하지.

‘압둘이 그랬잖아. 덩어리가 커서 한 방에 못 치운다고. 대가리들만 적당히 추려내 주면, 그 후는 알리가 알아서 정리하겠지.’

이곳을 주시하는 알리에게 씨익하고 웃어줬지만, 그는 수치스러웠던지 내 시선을 외면했다.

‘부끄러울 수밖에. 형제라는 것들이, 이렇게 몰상식해서. 이게 사우드 왕족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면, 나 같아도 숨고 싶겠다.’

자기편이 아니라고, 국빈을 앞에 두고 무시하는 나라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알리는 항변할 수도 없으리라.

지금 무대에 있는 선수는 나였다.

‘기다려요. 잠시 후 다시 교체할 테니. 어디까지나 난 구원투수니까.’

이 중에는 알리를 조심하는 사람도, 나를 경계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전하. 이는 아크람이 권력을 남용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기분이야 상하지만, 남용이라고 몰아붙이기는 애매하지 않아? 부왕의 명이었다고.”

“그 늙은 혓바닥으로 부왕을 녹였겠지요.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을 때,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왕에게 왕세자 직위뿐만 아니라, 국방부 장관도 다른 사람을 앉혀야 한다고 주청한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카심의 눈 밑이 증오로 꿈틀댔다.

“이 말을 부왕께서 믿으실까?”

“이번 일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중립을 표방한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알리 형의 편을 들지 않습니까?”

“이게 알리의 편을 드는 거라고?”

“이 동양인이 누굽니까? 왕가의 문양을 그린 화가가 아닙니까? 알리 형이 뭐로 부왕의 마음에 들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끄응. 그렇지.”

말은 끼워 맞추기 나름이고, 판단은 자기 기준을 따르기 나름이다.

“이번 일은 다시금 알리 형의 위세를 세워주기 위해서 꾸민 일이 확실합니다. 저는 이 일에 대해 엄중히 추궁하고 그가 더 이상 왕국 수석 집사를 맡지 못하게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심이 자미르와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알겠네. 내 그럼 자네만 믿지. 한번 판을 짜보게.”

“맡겨만 주십시오.”

사람이 인사를 하러 왔는데, 멀대마냥 세워두고 자기들 할 말만 지껄이고 있다.

‘더 듣고 있다가는 귀가 썩을 것 같아!’

적어도 왕자라면 영어 정도는 알아듣겠지.

“왕세자 전하. 문양 제작자로서 감사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감사의 인사에도 여전히 적대적인 시선이었다.

“흥. 감사랄 게 뭐 있나? 나는 한 일이 없는데, 오히려 감사라면 저기 알리에게 해야지.”

“그래도 차세대의 가장 큰 어르신이시니, 인사드림이 마땅하고, 또한 제가 도안한 문양을 가슴에 새겨주셨잖습니까?”

되레 나를 놀리듯 물었다.

“감사라…… 자네는 이 문양이 얼마나 갈 것 같은가? 내가 왕이 되면 바뀔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나?”

‘대놓고 까네.’

나 또한 좋은 감정은 없지만, 대어를 잡으려는데 이런 대접쯤이야 웃으며 넘길 수 있지.

‘일단 미끼는 던져 봐야 할 거 아니야? 그치?’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리 생각하셨군요. 운이 좋아 알리 왕자의 눈에 들었지, 사실은 볼품없는 작품입니다.”

“뭐가 없어? 볼품?”

원하든 원치 않던, 자신의 것이 무시당하는 것은 싫은지 인상을 구겼다.

‘뭐! 어쩔 건데! 내 작품인데, 어떻게 평가하든!’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뚝 떼며 너스레를 떨었다.

“고작해야 만드는데, 한 시간이나 걸렸을까 싶은 작품인 걸요.”

그제야 카심이 목을 내밀며, 내 눈을 맞췄다.

“뭐? 하, 한 시간?”

“쓰. 아마 그것도 안 걸렸을 걸요. 조각하는 시간까지 포함한 거니까, 실제로는 일이십 분? 아마 그럴 겁니다.”

자미르도 놀란 눈으로 재차 물었다.

“고작 일이십 분으로 만든 게, 부왕의 눈에 들었다고?”

“저도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날림이 아니라 좀 더 공을 들였다면, 더 나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손댈 수 없을 것 아닙니까? 쩝.”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사실은 손도 못 대. 저건 순전히 영감으로 얻어걸린 거라고.’

다시 한 번 저런 작품을 만들라고 하면?

솔직히 자신 없다.

적어도 내가 마음에 쏙 들어할 자신은.

자미르가 확인하듯 다그쳤다.

“더 나은 문양을 만들 수 있다고?”

그 말에 고개를 쳐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 보세요. 자미르 왕자님. 제가 만든 문장입니다. 그것도 고작 일이십 분에요.”

자미르가 카심의 손을 끌었다.

“전하. 잠시만…….”

쑥덕이는 소리가 다 들렸다.

“전하. 이건 기회입니다.”

“저 동양인이 저토록 자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알리가 했던 건데, 왕세자께서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자. 선택해. 알리는 그 문양 하나로 국왕의 눈에 들었다. 넌 무엇으로 네 아버지를 만족시킬 거냐?’

카심과 자미르의 등이 보였다.

‘일단 너희 둘. 제일 먼저 털어주지. 그리고 얘기하다 보면 대가리들을 쳐들겠지.’

카심이 돌아섰다.

“이봐. 자네! 부왕 접견 후에 시간 좀 낼 수 있나?”

“아마 그건 어려울 겁니다. 국왕 접견 후에 바로 귀국할 예정이니까요.”

이 일이 끝나면 당신 얼굴은 볼 일 없어!

“그럼 지금은 어떤가?”

“괜찮습니다.”

“그럼 응접실로 가서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겠지.”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광입니다.”

카심이 내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저리 가서 잠시 얘기 좀 나누세나. 자미르. 자네는 먼저 가서 응접실을 비우라 이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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