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16화
왕세자(02)
아직도 카심의 훈계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자격도 안 되는 녀석이! 네 능력 이상을 노리니, 그렇게 망하는 것 아니냐?”
알리의 눈가 주름이 파르르 떨린다.
“아직 망한 것도 아니고, 또한 사업을 하다 보면 잘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겁니다.”
“흥. 나를 봐라! 내가 실패한 적이 있더냐?”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압둘에게 물었다.
“저 인간, 기름 장사한 것 아닙니까?”
압둘 집안도 기름 장사꾼로 먹고 사니 입술을 비틀었지만, 맞는 말에 뭐라 반박할 것인가?
“그렇지. 기름…… 장사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게 실패할 수도 있는 겁니까? 그냥 기름 퍼 올려서 팔면 되는데.”
그것도 자기네 기술로 하나?
다 외국 기업들이 들어와서 퍼 올려주는데!
‘땅 짚고 헤엄치기.’란 이 경우를 말하는 거겠지.‘
그런데 실패가 어쩌고저째!
압둘의 입에서 인정하기 싫은 말이 흘러나왔다.
“끄응. 그도 그렇지.”
그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등신! 그게 자랑이다. 자랑.”
압둘이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떵신? 그게 무슨 말인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알리라고 내 마음과 다르랴?
허나 이 이상 분위기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은 듯, 꾹 참고 있었다.
허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뒤에서 누군가 카심과 장단을 맞췄다.
“부왕께서 잘한다 잘한다 하시니, 진짜로 그런 줄 알았던 모양이지요.”
보자보자 하니, 진짜로 냄새가 난다.
“압둘. 저 똥파리는 또 뭡니까?”
“있어. 자미르라고, 일왕자의 오른팔 격이지.”
호응에 힘을 얻은 카심의 날선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 되지도 않는 후계자를 노리니까, 그런 사달이 나는 것이다. 쯧쯧. 그게 인력으로 되는 일인 줄 알았더냐?”
알리의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원한 적 없다고 해도, 왜 만날 때마다 그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알리의 말은 그의 귀에 닿지도 못했다.
“부왕께 후계를 포기한다고 말씀드려라. 네가 그렇다고 하면 부왕께서 달리 무슨 말씀을 하시겠느냐?”
“형님. 그 말씀은 더 이상 하시지 마십시오.”
“그러면 이 형이 네 사업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마. 그래도 내가 돈 버는 건 잘 하지 않느냐?”
“휴!”
말이 통해야 대화를 할 것이 아닌가?
일방적으로 제 할 말만 하는 상대에게 알리는 지친 듯,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그만 왕에 대한 미련을 접고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떠냐?”
알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형님! 후계는 부왕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게 얼마나 무엄한 일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허나 카심은 오히려 코웃음 쳤다.
“허 참. 고맙구나. 알려줘서.”
명백한 비웃음에 알리로서는 속에 천불이 날 일이지만, 여기서 똑같이 목소리 높여 대응했다가는 불에 기름을 얹는 노릇이니, 속으로 끙끙 앓는 수밖에 없었다.
***
여기서 더 다툼을 키워봤자, 득이 없었다.
그게 카심이든 압둘이든, 아니면 알리 자신이든.
인내하는 알리에게 또 다른 말이 들려왔다.
“왕세자 형님. 그만 화를 참으시지요. 이미 알리 형은 끝났습니다. 아시질 않습니까?”
“하지만 여전히 부왕께서는 이 녀석을 신뢰하지 않느냐? 자미르.”
자미르가 손을 마주 비비며, 카심의 옆에 섰다.
몸을 꿰뚫을 듯 알리가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는 그 시선을 슥 피할 뿐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부왕께서 형님을 잠시 왕세자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신 것은 왕세자 형님을 더 강하게 키우기 위하신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으십니다.”
‘저 똥파리 같은 놈. 분명히 부왕께서 왕세자라는 호칭을 없애셨건만.’
알리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여기서 왕세자 자격을 논할 수는 없다.
‘그건 내가 국왕 자리에 욕심이 있다는 반증.’
노골적으로 사업을 방해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무리 부왕이 강력하게 자신을 민다고 해도, 하는 족족 사업을 말아먹는 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인가?
새하얘진 주먹을 보며, 속을 되뇌었다.
‘일 년만. 딱! 일 년만 참자.’
***
자미르의 말이 이어졌다.
“이미 알리 형은 부왕의 안중에 없을 겁니다.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서 호텔을 살리겠습니까? 한번 떠난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 법입니다.”
은근한 달램에 카심의 마음도 누그러졌다.
“흥. 그래도 일부는 돌아와야 하지 않겠어? 알리도 먹고 살아야지.”
“역시 너그러우십니다. 왕세자 전하.”
왕세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알리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하지만 이 자리에 알리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그러게. 내 말을 들으면 좀 좋아. 알리, 저놈은 저 고집 때문에 한 번 큰일을 당할 거야. 아마.”
“무엇보다, 이런 자리에서 수하들과 다투는 것은 왕세자 전하의 위엄에 누가 되는 일입니다. 진정하시지요. 이제 왕세자로 다시 책봉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전하.”
간단한 논리가 아니던가?
대안이 없으면 원안, 그 외의 답은 없다.
카심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 그럴까?”
“이미 자격은 차고 넘치십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결국은 부왕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알리 형을 당당하게 실력으로 누르셨는데, 누가 감히 자격을 논하겠습니까?”
자미르의 눈이 뒤쪽을 향하며, 동의를 구했다.
수많은 똥파리들이 떼 지어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흐.”
카심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승자의 미소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알리를 누르는 것은 그동안 당해 온 수모를 덮기에는 부족해지만, 지금 당장의 위엄을 살리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자미르의 눈이 압둘에게 향했다.
“그게 다 압둘 왕자님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응?”
카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건가?’
대충 감이 왔다.
저게 왕자인가?
저 나이 먹도록 주변에서 떠받드는 것밖에 알지 못하는 모양인데?
인간 자체가 멍청해서라기보다는.
인생의 단물만 엑기스로 먹어온 여왕벌의 느낌이랄까?
여왕벌로 태어났으니 여왕벌로 살아가고, 평생을 남의 수발로 살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도망도 못가고 죽는. 그런 여왕벌.
내가 밑바닥 인생이라서 그런 건가?
저곳의 왕은 자미르.
똥파리의 왕, 자미르.
그 꼭두각시, 카심.
‘그 횡령이라는 것도 저놈이 계획한 게 아닐까?’
허나 진실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저건 속도 없고, 생각도 없는데, 왕이라는 망령에만 미쳐 있는 놈이군.’
왕이 되면 나라를 말아먹을 놈이다.
‘실제 정치는 자미르 저 간신배 녀석이 하겠군.’
카심은 자미르의 꿀 바른 입술에 홀려, 그가 하는 말이 전부 진실인 줄 알고 살아가겠지.
자신은 희대의 성군이라 믿으며!
누가 카심을 두려워 하겠는가?
자미르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오가는데.
내 나라가 아니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내 나라 정치도 관심없는 나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질 않나?
‘여긴 내 물주의 나라라고. 그리고 곧 왕이 될 물주라고.’
눈에 보이는 장애물은 치워야 한다.
가급적 빨리!
사소한 거라도. 눈에 거슬리면 발로 치워야지.
‘잘하고 있다. 무덤을 파라.’
속으로 박수를 쳤다.
‘가급적이면 크게 파라. 크게.’
명분?
까짓거 없으면 만든다.
거짓말?
안 한다.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카심이 물었다.
“말이 안 되잖아?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라고.”
그래서 처음에 압둘을 보고 빈정거린 모양이었다.
단지 알리의 친우라는 이유로.
자미르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압둘 왕자의 선전 덕에 알리 형의 호텔이 저리 폭삭 망한 거 아닙니까?”
한편의 촌극을 보며, 한심한 마음이 들었다.
‘바보들만 모인 거냐? 그게 아니면 카심 일인체제가 너무 길었기에, 천적이 없었던 거냐?’
압둘이 퉁명스러운 답으로 불편함을 표했다.
“서로 최선을 다해 선의의 경쟁을 한 것뿐! 사업에 봐 주면서 하는 건 없소!”
그제야 눈치챈 카심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그래. 그렇군. 내 자네의 공을 잊지 않겠네.”
압둘이 불쾌하게 얼굴을 굳혔다.
“일왕자께 치하를 받을 생각은 없소.”
눈치 없는 것이 천성인가?“
타국의 왕자를 신하 대하듯 하면서, 미안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불쾌할 만 하군. 네 녀석이 왕이 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늘었다.’
저렇게 오만한 똥 덩어리가 왕이 되면?
주변 나라에 똑같이 할 거고.
왕들은 그 꼴이 보기 싫어서라도 무기를 사재기하겠지!
“미안허이. 압둘. 내가 잊지 않고 싶은 것이니.”
기분이 좋아진 그가 말을 이었다.
“아까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말게나. 순수하게 축하의 의미로 말한 것이니.”
압둘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똥파리 자미르가 또 끼어들었다.
“하지만 공과 과는 명확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 그게 또 무슨 말인가?”
“아무리 타국의 왕자라고 해도, 왕세자를 일반 왕자로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아닙니까?”
참다못한 알리가 일갈했다.
“이봐. 그건 아버지의 명령이라고.”
자미르가 알리에게 맞섰다.
“그건 일시적인 부왕의 변덕이시죠.”
“너희들끼리 그렇게 부르는 건 참고 넘어간다 해도, 외국의 그것도 왕자에게 그게 강요할 일인가? 자미르?”
뿌득 뿌득 이를 갈며, 알리가 말을 이었다.
“형님이 그렇게 하라 하신 겁니까?”
카심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니!”
“그런데 왜 다들 그리 부르는 겁니까?”
카심이 삐닥한 얼굴로 물었다.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 걸, 일일이 찾아다니면 말려야 하는 거냐?”
“아니면 그렇게 입에 붙은 걸 어쩌라고! 입을 찢어서라도 말려줄까?”
“뿌득. 그래도 형님이 하지 말라시면. 아닙니다. 젠장.”
표독스레 쳐다보는 카심의 시선에 알리는 고개를 돌렸다.
자미르가 덧붙였다.
“알리 형. 제가 태어날 때부터 카심 형님은 왕세자셨습니다. 그걸 알리 형은 부정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진정으로…….”
***
‘구구절절 더 볼 것도 없군.’
곤경에 빠진 알리를 구해내야 할 차례였다.
‘반대로 네놈들은 똥통에 처박아주지.’
왕 노릇은 네놈이 왕이 된 뒤에나 해 처먹어라.
그럴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압둘 왕자님.”
“응?”
성훈이 그의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응? 왜?”
그는 손을 내밀라는 눈치에 영문도 모르고 손을 내밀었다.
“선수교체!”
짝!
그의 편 손에 손뼉을 마주치자, 압둘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수가 있는 건가? 섣불리 끼어들었다가는 자네뿐만 아니라, 자네 나라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외부인이 섣불리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리라.
허나 지금처럼 왕이 카심을 껄끄러워 하는 상황이라면 승산이 있다.
압둘의 말대로, 단지 명분이 없을 뿐이라면?
‘그 명분, 내가 만들어주지.’
왕이라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아무리 맏아들이라도 용서할 수 없도록.
‘국왕! 내, 돗자리를 펴주지. 그 위에서 한번 칼춤을 춰 보시오.’
뒷감당이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괜찮아요. 저라면.”
“그게 무슨 소리야?”
의아해하는 그에게 말했다.
“알리가 발작하지나 않도록 잘 달래줘요. 알겠죠?”
압둘이 봐도 알리는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붉어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압둘이 말했다.
“이미 한계치군. 알았어. 알리는 더 열 받지 않도록, 내가 잘 달래도록 하지.”
‘이제는 카심이 아니라, 나 때문에 열이 받을 테니까.’
어쨌거나 이제는 압둘이 책임지고 알리를 막아주겠지.
‘카심아. 카심아. 네가 걷어차 놓고는, 이제 와서 아까운 것이냐?’
사람이란 간사하여 있을 때는 귀한 줄 모르지만, 없어지면 남 탓을 한다.
“후!”
숨을 크게 들이쉬고, 카심을 불렀다.
“왕세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