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13화
취업선물(05)
왕과 헤어지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아크람이 물었다.
“성훈 님. 아까 말씀을 들어보니, 이미 계획이 서 있는 것 같던데…….”
그의 말에 뒤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궁금하십니까?”
아크람도 눈썹을 휜 채 마주 보고 웃었다.
“아무렴요. 알리 왕자님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까요.”
나도 말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극비리로 진행되어야 하는 사안이었다.
‘지금 내 뒤에 후발주자가 있을 텐데, 함부로 진행해서 날파리가 끼어드는 건 사양이라고.’
알리는 당연히 나를 선택한다고 해도, 다른 왕자나 갑부가 이 일을 진행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될 수도 있었다.
과연 그들이 대목장 같은 목수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대충 비슷하게 만드는 사람을 찾겠지.’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그게 그거 같을 테니까.
그 뒤의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하다.
대충 얼기설기 만들어진 작품을 한국의 미라고 떠들어 대겠지.
아직은 그런 모형만을 생각하지, 이처럼 호텔의 인테리어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 정도로 대규모의 투자를 하지도 않을 테고.’
하지만 투자자가 있다고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투자금의 회수가 짧은 시간에 이뤄진다는 확신이 들면, 준비가 덜 된 후발주자라도 공사를 하기 위해 뛰어들 것이다.
‘그렇게 날림 공사를 치고 빠지기 식으로 하게 되겠지.’
응당 원조가 되어야 할 내 작품은 좀 괜찮은, 품질 좋은 작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크람.”
“네. 말씀하시지요. 성훈 님.”
“당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건 알아요.”
적어도 그가 죽었을 때의 모습을 본 나는, 아크람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심지가 굳은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의 인자한 웃음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 일은 알리와 단둘이서 상의를 하고 싶네요.”
그는 알았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낮에는 새가 있고, 밤에는 쥐가 있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알리 왕자님께 이런 믿음직한 동반자가 있다는 것은 실로 알라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크. 이 아저씨가 사람 얼굴 부끄럽게.’
하지만 이런 일로 얼굴이 붉어져 속내를 들킬 수는 없는 법.
‘그래. 동반자 맞잖아! 뭐!’
“저야말로 알리 왕자와 인연이 닿아서 고마울 따름이지요. 평생을 함께 갔으면 좋겠습니다.”
하고픈 말을 목으로 삼켰다.
‘초 S급 고객으로 말이죠.’
아크람이 손을 내밀며, 다시 길을 청했다.
“저 아이가 응접실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잠시 쉬고 계시면, 제가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안내자에게 말을 이었다.
“아주 특별한 귀빈이시니, 불편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게나.”
안내자의 인사를 받으며, 아크람을 발길을 돌렸다.
***
응접실 소파에서 밖을 내다보며, 알리와 어떤 말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연회 시간이 다 되었나 보군.’
왕궁 앞 주차장으로 삐까번쩍한 슈퍼카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씁쓸하네. 쯥!”
저렇게 살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질 수 있으니, 성취감이라는 것이 있을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거울 앞에 섰다.
“타고난 복인 걸. 뭐. 곧 부르러 오겠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이리저리 옷태를 살폈다.
“제법 잘 어울리네.”
순백의 토브에 내 디자인이 심장어림에 새겨져 있다.
쿠트라를 쓴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지금 난 행복하다고.”
자위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지난 삶에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 모두 하고 있는데, 뭐가 부러울까?
세상에 나같은 사람이 또 있으려고.
“이런 삶도 괜찮잖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걸 이루어갈 재능과 노력할 수 있는 의지 또한 굳건하다.
“거기다 날 도와줄 사람들도 많다고. 저 사람들보다야 내가 백 배는 행복하지.”
-똑! 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시종이 모습을 드러내고 인사를 건넸다.
“잘 쉬셨습니까?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
왕은 아직인 모양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성훈!”
‘알리인가?’
여기서 내 이름을 평대로 부를 사람은 둘뿐이다.
알리 아니면 압둘.
좀 더 굵직한 목소리로 보아 알리임이 분명했다.
그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일찍 오셨네요. 일은 잘 마무리되었어요?”
“응. 잘 처리했네.”
그는 근엄한 얼굴로 왕이 등장하는 왕좌 옆의 출입문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저 지나가다 잠시 인사나 나누는 것 마냥.
다른 사람이 본다면 그렇게 보리라.
나도 그와 함께 같은 방향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 일도 당신 호텔에 관련된 일인가 보죠?”
콧수염의 꿈틀거림이 곁눈질에 들어왔다.
“사실은 그 일 때문에 온 걸세.”
그는 정면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아바마마와 인사를 하고 나면, 다른 형제와도 인사를 해야 할 테니, 자칫하면 못 볼 수도 있다고.”
그는 주변을 눈으로 훑더니 내게 물었다.
“성훈. 내 집사에게 들었네. 나를 위해 사업을 구상한 게 있다면서?”
일부러 그에게 들어가라고 한 말이지만, 집사는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전달한 모양이다.
‘뭐. 날 위해 만든 일이지만, 당신을 위한 것도 맞죠.’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당신의 일에 도움이 될까 해서, 생각한 게 있기는 해요.”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내게 말을 했어야지. 이 친구야. 뭔데?”
“그럴 시간이 없었잖아요.”
투덜거리는 말이었지만, 사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기를 원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하기 싫었거든.
‘영업하러 왔으니, 일 좀 주세요.’라고.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왜?
물론 지금 알리가 다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이용하는 면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이 인간한테 부탁이라는 걸 들어보겠어? 안 그래?’
그리고 부탁을 하면 나중에 신세를 갚아야 한다.
‘빚지는 것보다 지우고 더 좋잖아!’
그가 재촉하며 말했다.
“자. 이제 말하라고.”
힐끗 쳐다 보니,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진짜 특별한 거 아니니까.”
내 말에 알리는 콧방귀를 끼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킁! 그래. 자네한테는 별 게 아니겠지. 이 문양도 고작 십여 분 만에 만들어낸 거니까.”
그 별 게 아닌 게 뭔지 들어나 보자는 투였다.
‘이제부터 시작이지.’
내 제안이 그의 마음에 들어야 다음 이야기의 진척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도, 이건 그의 인생도 달린 일이니까.
‘난 어디까지나 제시만 할 뿐이야.’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잘 된다는 확신은 있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
어쨌든 선택은 그의 몫!
‘하지만 사람을 선택할 수는 없지. 그건 나만 할 수 있는 거거든.’
적어도 지금은 나 이외의 대안은 없을 것이다.
기대하는 어투에서 반쯤 넘어온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생각이 든 거지만, 이건 다른 사람보다는 알리가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목이 탔던지, 알리는 지나가는 시종의 쟁반에서 물잔을 들어 벌컥 마시고 물었다.
“준비됐어. 말해 보게.”
“압둘 왕자 호텔에 전시된 제 작품 아시죠?”
알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당연히 알지. 그거랑 똑같은 거 나한테도 만들어주려고?”
동일한 작품이 있었다면, 압둘에게 밀리지 않았을 거라는 계산이 있어서 이리라.
‘물론 그것도 나 말고는 대안이 없기는 하죠.’
다른 팀이 만들어서는 그런 품질을 기대하기 어렵겠지.
아니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거라면 좋아. 오백만 달러가 들어도 좋아. 내가 당장 구매하지.”
압둘의 이백만 달러의 2.5배를 제시하는 알리였다.
‘아이고. 왕자님. 성급하기는…….’
이게 압둘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점이었다.
호탕하고 베팅을 잘하는 반면, 세밀한 곳에서 압둘보다는 배려가 부족했다.
‘그랬다가는 압둘 왕자랑 싸움 나죠. 그건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물론 압둘과의 다툼을 두려워할 알리도 아니지만, 그런 어이없는 것으로 둘의 사이가 벌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면 난 두 고객을 동시에 잃어버리는 꼴이 된다고요.’
그의 말에 웃음을 얼버무리며 말을 이었다.
“아뇨. 그것보다 더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거예요.”
“다른 모형인 건가? 흐흐흐. 녀석 것보다 더 큰 거겠지?”
생각만으로도 흐뭇한지, 그의 입은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고작 오백만 달러 때문에 여기까지 왔겠어요?’
고작 오륙십 억으로 누구 코에 붙이겠어.
전혀 내 성에 차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걸 영업했다고 들고 갔다가는 사장에게 비웃음을 당한다고요.’
“그럼 뭐야?”
조급한 티를 내지 않으려 근엄한 얼굴로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에서 단내가 났다.
‘역시 그는 전통 건축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군. 이러면 더 이야기가 쉬워지지.’
“알리. 만약에 말이에요. 그 모형이 실재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실재?”
“네. 갑돌이의 눈으로 봤던 것과 똑같이 말이죠.”
그는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좁혔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실재로 구현된다는 말이지?”
잠시 후 그가 눈을 떴다.
그의 푸들푸들 떨리는 콧수염이 그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여전히 정면을 응시한 채, 그가 말했다.
“크크크. 그게…… 진짜로 가능하다는 말이지?”
“네. 당신이 투자를 한다면요.”
슬며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금 물었다.
“압둘 녀석의 모형을 실제 사이즈로 구현하겠다. 그거지?”
“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장인들이 공사를 담당하게 될 겁니다.”
그의 반응을 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하게 된다면 말이죠.”
“성훈. 그건 말이야. 대박이야. 당장 계약하지.”
호탕한 성격답게 계약을 언급했다.
‘이거 일이 너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데.’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날 탓하려는 거 아니야?
알리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무리 사정이 급하다고 해도 시장조사는 해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시장조사를 어떻게 하려고? 전 세계인을 상대로 리서치라도 할 건가?”
나도 예의상 물어본 말이라,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구체적으로 방법을 찾으라면 그것도 방법이겠지만, 거기까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고요.’
돈 많은 관광객을 상대로 무슨 조사를 해야 할까?
‘사실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사이 알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딴 게 왜 필요해. 이미 녀석의 호텔에서 답이 나왔는데. 당장 시작해 주게.”
내가 할 말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쪽으로는 또 결단이 빠르다는 말이지.’
그의 오랜 사업 경험에서 나온 확신이었다.
성공에 대한 확신!
“그럼. 구체적인 건 설계를 진행하면서 상의하도록 하죠.”
알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야지. 이건 사람 사는 집이니까. 그깟 모형하고 비교하면 안 되지. 암!”
그 모형의 설계자 앞에서 작품을 까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정면을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
“이 이야기는 압둘에게 해도 상관없겠지?”
“당신이 상관없다면요.”
이미 말했다시피 우선권은 그에게 있었고, 압둘에게만 말하는 것은 내게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알고 있는 게 좋지.’
압둘이 있어야 알리를 제어할 수 있다.
서로 지기 싫어하기에, 팽팽한 균형이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압둘은 보험이지.’
사우디아라비아의 상황은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왕과 아크람이 최선을 다해 알리를 돕겠노라 약속했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미래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만에 하나라도 알리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작품이 공중분해 되어버린다고.’
시치미 떼며 물었다.
“하지만 굳이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알리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궁금하지 않나?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심술궂은 웃음이 알리의 얼굴을 덮었다.
그가 팔을 들어 시계를 보며 말했다.
“녀석이 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지. 흐흐흐.”
압둘은 왕족이지 양반은 아니었다.
그 말을 뱉는 순간, 내 등 뒤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훈!”
아랍에서 내게 평대하는 사람은 딱 둘이다.
알리.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