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12화
취업선물(04)
“이렇게 손님을 오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응당 초대한 제가 가야 합니다만.”
아크람의 미안함에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크람이 오셨다면, 알리 때문에 제대로 할 말도 못했을 걸요.”
그제야 아크람이 빙긋이 웃었다.
“그도 그랬겠지요. 하하하.”
그리고 그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예행연습을 하시러 오셨으니, 이쪽으로…….”
그의 말에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복잡한 예법이 있는 건가? 형식적인 건 딱 질색인데…….’
그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크람! 진짜로 연습을 하시게요. 그냥 간소하게 인사 예법만 익히면 안 될까요?”
아크람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특별한 예법은 없습니다. 이슬람에서는 타인의 종교를 존중하지요.”
“아! 그렇습니까?”
유대교와는 달리,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럼 시아파 수니파 하는 건, 내부 교리에서 갈등이 빚어지는 건가?’
이런 쪽으로 둔감했고 관심도 없었으니,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아크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성훈 님은 귀빈이시니까요. 최대한 존중해 드려야지요.”
“하지만 제가 토브를 입고 구트라를 착용한다고 해서 결례가 될까요?”
물론 아크람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말이었다.
‘난 국왕에게 잘 보일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알리도 충분히 좋은 후원자가 될 수 있지만, 국왕도 내 편으로 만들어 두면 금상첨화일 터!
‘2대를 쌓은 신뢰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지.’
자신들의 문화를 존중해 주겠다는데, 과연 국왕이 싫어할까?
생각대로 아크람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말로 무슬림들을 대할 때, 최고의 존중이겠지요. 왕족들이 성훈 님을 보는 시선도 확연히 바뀔 것입니다.”
딱히 요구하지는 않지만, 해서 결례가 될 것은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전통을 존중한다면, 우리나라의 전통도 존중받겠지요.”
그 말에 아크람이 싱긋 웃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역시 예의를 아시는 분이시군요.”
나는 그저 내가 존중받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아크람이 말을 이었다.
“그럼 진짜로 예행연습을 하러 가볼까요?”
“네? 여기서 하는 게 아니었나요?”
“인사를 하려면 상대방이 있어야지요. 실은…….”
‘실은?’
아크람이 말을 이었다.
“국왕 전하께서 성훈 님을 은밀히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예상에 없었던 일인데?’
원래 아크람과 의논을 하려고 했었다.
‘아크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그림자인 아크람보다는 국왕 본인을 만나는 것이 이야기는 빠를 것이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약간 당황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아크람의 말에 망설임을 접을 수 있었다.
“실은 알리 왕자님의 일로 걱정이 많으십니다. 성훈 님의 고견을 듣고자 하십니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건 기회다.’
아니 위기일 수도 있지.
새로운 삶에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 아닐까?
과연 나의 역량으로 그를 상대할 수 있을까?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님에도, 몸이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얄팍한 지식이나 경륜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런 내 기분을 알아차린 건지, 아크람이 물었다.
“다음으로 미룰까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스에서 대부를 만날 때보다 긴장되는 건가?
적어도 그들처럼 무도한 사람은 아니겠지.
양날의 검을 앞에 두고 손을 내밀었다.
‘겁내지 말고 부딪치자고. 도든 모든 윷을 던져야 결과가 나오는 거잖아.’
아크람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이 적절한 때인 것 같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전통 복장을 착용하며, 아크람에게 왕을 만나면 존경을 표해 달라는 당부를 재차 들었다.
“사실. 그게 전부지요. 외국인에게 철저한 이슬람 예절을 강요할 정도로 그런 속이 좁은 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크람의 안내에 따라 국왕의 서재로 향했다.
***
서재에는 전통 복장을 한 남자가 의자에 기대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왕이리라.
아크람이 내가 온 것을 알렸다.
“전하. 성훈 님을 모셔 왔습니다.”
잠시 후, 의자가 천천히 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
갈색 피부에 주름진 이마.
후덕해 보이지만 관자놀이에 어렴풋이 보이는 검버섯.
하얀 수염 안의 꾹 다문 입술은 강한 의지를, 그와 상반되게 눈동자를 살짝 덮은 꺼풀은 그의 온화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사우디아라비아 역사상 최장기간 집권한 왕인가?’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성기를 누렸다.
물론 그게 석유 때문이라고 해도 별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위엄 있는 얼굴이었지만, 긴장되지는 않았다.
‘알리가 나이를 먹으면 저 얼굴이 되겠군.’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똑같이 생겼었으니까.
아크람이 국왕에게 가기 전 내게 작게 속삭였다.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이십니다. 일어서시면 인사를 건네시지요.”
그리고 그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는 국왕에게 다가가 팔을 부축했다.
국왕에게 다가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김성훈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는 나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구려. 반갑소. 성훈 군. 파흐드라 부르시오.”
“저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말씀을 편하게 해 주십시오.”
아크람이 조용히 시간이 많지 않음을 말했다.
“전하. 궁에 눈들이 많습니다. 잠시 인사차 들렀다고 얘기해 두었사오니…….”
“알겠네. 아크람.”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호랑이가 늙어 자리를 비울 날이 길지 않았느니, 그 새끼들이 호시탐탐 빈자리를 노리겠지.’
어느 나라라고 다르랴!
국민이 선출하는 왕이 아닌 바에야.
“일단 왕가 문양에 대한 감사는 해야 하지 않겠나?”
나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성훈 군. 왕가 문장을 새롭게 디자인해 주어 고맙소.”
“만족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로 인한 수익보다는 알리와 이어질 수 있었던 명분이 내게는 더 의미 있었다.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파흐드 국왕이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겠네.”
그리고 아크람이 바로 말을 이었다.
“성훈 님. 여기서 나눈 대화는 비밀에 부치셔야 합니다.”
입조심을 요구하는 아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 일로 알리가 쓸데없는 견제를 받는 걸 원하지는 않습니다.”
아크람이 조용히 왕의 옆으로 시립했다.
국왕의 눈을 직시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자네가 알리의 든든한 후원자라 생각하네.”
“네?”
“자네로 인해서 알리는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지.”
“무슨 말씀이신지?”
아크람이 눈짓하며 말했다.
“자세한 건 따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훈 님.”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왕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알리를 다음 왕으로 세웠으면 한다네. 이제 나도 알라의 곁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후사를 준비해야지.”
“아직 정정하십니다.”
내 입바른 소리에 왕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내 나이 여든일세. 언제 부름을 받아도 늦은 건 아니지.”
그는 내가 아는 역사대로라면 5년 동안은 건재할 것이다.
‘그동안 알리에게 충분히 힘을 실어주시고 가셔야 합니다. 전하.’
왕이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군. 정정하다고.”
“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훗. 고맙네. 그리 봐줘서.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지.”
“네. 말씀하시지요.”
“알리에게는 지금이 최대 위기가 아닌가 싶네.”
“전하께서 도와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국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또 대놓고 도와주기는 곤란한 상황이지.”
아크람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성훈 님께 말씀드리기 어려운 사정이 있지요.”
“이해합니다. 아크람.”
왕이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녀석은 다른 자식들과는 다르다는 말이지. 안 그런가? 아크람.”
“네. 맞습니다. 성훈 님. 알리 왕자님은 전하께 기대지 않고 스스로 기업을 일군 유일한 왕자이십니다.”
‘엥? 무슨 능력으로?’
믿을 수 없다는 내 표정을 보고, 아크람이 설명을 이어갔다.
“적어도 왕궁의 재정에 손을 벌리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하신 분이지요.”
말이 안 되잖아.
그렇게 손 벌리지 않고, 무슨 수로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호텔을 짓는다는 말인가?
아크람이 설명했다.
“알리 왕자님의 종잣돈은 자신이 받은 용돈과 어머님 앞으로 되어 있는 저택으로 마련한 돈이었습니다. 직접 전하께 손을 벌린 적이 없지요.”
“아!”
“다른 왕자님들이 유전을 하나씩 꿰차고, 국고에 손을 대는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이셨지요. 그분은 수많은 왕자 중에 유일하게 홀로서기를 해내신 분입니다.”
국왕이 왜 알리를 신뢰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으니까.
“응. 맞아. 내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내게 기대지 않고 자수성가를 했지. 다른 아들들과는 차원이 달라.”
아크람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다른 왕자들이 알라께서 주신 것을 소비하고 있을 때, 알리 왕자께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업을 활성화시켰지요.”
“그래. 시작은 호텔 하나였지만, 그 호텔에 고객을 편하게 유치하기 위해 유람선과 여객기 사업도 확장했지.”
“그리고 관광산업으로 인해 생기는 부가 효과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럼. 석유 수출로 버는 돈보다 많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알리 왕자님의 사업으로 인해 파생되는 일자리까지 헤아린다면, 그 효과는 가히 유전사업과 비견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 두 노인의 입에서는 알리에 대한 칭찬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까 시간이 없다고 한 사람은 아크람 이었는데…….’
지금은 제 자식 칭찬이라도 하는 것처럼 화기애애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도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냥 대형 물주인 줄 알았는데, 이러면 평가가 달라지는걸.’
A급 물주에서 스페셜 급 물주로 말이다.
‘왕가의 지원 없이도 이렇게 성장했는데, 왕이 되면 얼마나 더 크겠냐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부쩍부쩍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리 자랑을 들으며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이 급한 만큼 나도 급했으니까.
상황을 종합해 본 알리의 상황은 느긋하게 대처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느긋하게 이야기하다니. 어휴. 우리나라에서는 자식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합니다. 어르신들.’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나라마다 다를까?
아쉽지만 그들의 대화를 끊으며 말했다.
“전하. 시간이 얼마 없으니, 직접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제게 원하시는 게 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사면초가에 처해 있는 알리를 도와줄 수 있겠나?”
진지한 물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아크람을 만나려 했던 겁니다.’
물론 나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에게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나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거든. 이들이 나를 얼마나 믿어주는지도 중요하지.’
“전 건축가입니다.”
그들에게 운을 떼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건축밖에 없을 것입니다. 과연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내 말에 왕이 빙긋 웃음 지었다.
“그래서 자네를 보고 싶었던 걸세.”
아크람이 그의 말에 설명을 덧붙였다.
“맞습니다. 성훈 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아무도 알리 왕자님을 경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국내에서는 대놓고 알리 왕자님께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국내에서는 안 되니, 국외에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제 작품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제가 원망스럽지 않으십니까?”
“그건 알리의 선택이었지.”
내 눈을 직시하며 국왕은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알리에게 분명히 기회를 주었고, 그 기회를 획득하지 못한 것은 알리이니, 누굴 원망할 일이 아니지.”
“하지만 그 때문에 생긴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 일로 자네를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네. 알라께서 주신 시험이니, 응당 감사함으로 받아야지.”
‘훗! 누가 부자간 아니랄까 봐,’
둘이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왕이 말을 이었다.
“나는 오히려 기대하고 있다네. 이 시험을 넘긴 알리가 얼마나 성장할지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알리 왕자와 계획했던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왕이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자세한 건 아크람과 상의를 하게나. 아무래도 알라께서는 자네와 알리의 인연을 선하게 이어두신 것 같아.”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알리의 신상에 문제가 없도록 깊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히려 내가 할 말을 하고 있군. 신경 써 줘서 고맙네.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내 자네에게 반드시 마음의 표시를 하겠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국왕이 재차 당부했다.
“모쪼록 티 나지 않게 알리를 도와주게나.”
아들이 그동안 이뤄놓은 것이 다치기나 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거면 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