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11화
취업선물(03)
처음 묵었던 방보다 더 크고 화려한 곳이었다.
그리고 왕가라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비행기에서도 보았던 문양이 다양한 방식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어떤 곳은 금박으로, 다른 곳은 녹색의 문양으로.
‘좀 있으면 연락이 오겠지. 그동안 좀 쉬어볼까?’
푹신한 소파에 등을 누이며 고개를 젖혔다.
‘일 년만인가?’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여기서부터 내 해외 활동이 시작되었거든.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알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높은 자리에 있어야 큰일은 한다고?’
일면 맞는 말이지만, 꼭 그런 건 아니질 않은가?
높은 자리가 일하는데 수월한 건 사실이지만, 꼭 그 자리에 있어야만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낙하산을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사장에게 딜을 넣을 수 있지.’
일을 따갈 테니, 팀장으로 임명해 달라고.
사장이 거부할까?
‘아닐걸. 내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직함은 줄 것이다. 그리고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겠지.’
나 하나 때문에 돈 되는 일을 포기할 사장이 아니다.
‘그 말은 곧 자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지.’
허울 좋은 높은 자리보다, 내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영향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요점은 그가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재 건설 사장은 내게 호의적이었다.
그와 대화를 하면서 의아한 점이 몇 개 있었다.
‘나는 사장을 잘 모르는데, 그는 나를 오래 지켜본 듯한 눈치였다고.’
사장이 말하는 행간에 그런 뉘앙스를 느꼈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누가 말단 신입에게 맘대로 해보라고 하겠냐고! 그림을 잘 그려서? 훗!’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림 때문에 호감을 가진 거라면, 디자인을 시켰겠지.
영업을 맡길 리가 만무했다.
‘대기업 사장이라는 자리가 핏줄로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더 의아한 점은 이거였다.
‘날 정확히 안다면, 내 제안에 고민을 좀 했을 건데, 그게 아니라 흔쾌히 응했다는 거지.’
물론 곽 이사가 입단속을 잘했겠지만, 나에 대한 정보가 허술하다는 말과 같았다.
‘여기서 나라는 존재를 각인시켜야겠어.’
신뢰이든 시험이든 이것만은 확실했다.
그가 내게 일을 맡겼다는 것!
‘즉 이 일의 첫 단추를 내가 끼운다는 거지.’
반드시 규모가 큰일이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사장이 무시하지 못하게 어필하는 것이지,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니까.
소파가 너무 편했던 모양이다.
생각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방안을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아!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지.’
예상했던 대로 아크람이었다.
“아크람 집사님. 알리 왕자 일로 여쭤 볼 게 있어서요.”
아크람도 내게 용건이 있었던 모양인지, 질문을 던졌다.
-성훈 님. 혹시 저택으로 가시면서, 왕자님께서 부탁했던 것이 없습니까?
“부탁이라뇨?”
-음. 역시 그럴 거라 예상했습니다.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실 분이 아니지요.
그의 말에 상황이 그림으로 그려졌다.
아크람은 알리가 내게 부탁을 해서라도 지금 상황의 해결책을 찾기 원했던 것 같고, 알리는 자존심 때문에 차마 부탁을 못 한 거겠지.
‘중심이 되는 알 리가 움직일 생각이 없으니,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판을 짜야겠군.’
평생을 함께할 수도 있는 파트너가 여기서 자긍심이 무너져서는 곤란하다.
‘평생 날 껄끄러워 할 거라고.’
아크람에게 물었다.
“조용히 만나 뵙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아크람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제가 알리 왕자님께 연락을 드리지요.
“네?”
누구는 007 작전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뭐라고?
그에게 되물었다.
“집사님. 일부러 알리를 피해서 연락드린 거라고요.”
내 곤란함이 전해졌는지, 수화기 너머에서 아크람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성훈 님. 핑계는 여러 가지 아니겠습니까? 혹시 사우디아라비아 왕궁의 예법을 아시는지요?
“하. 하. 하. 모르지요.”
-국왕 전하께 무례를 범하지 않으시려면 간단하게라도 예행연습이 필요할 겁니다. 곧 연락이 갈 터이니, 준비하고 계십시오.
그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군.’
나 혼자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
아디바와 나니아가 내게 쉬운 상대였듯이, 아크람에게는 알리가 그런 존재인 것 같았다.
‘저런 건 반드시 배워야겠어.’
아랫사람임을 자처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에 윗사람을 제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
그렇게 하면서도, 그 과정에 불쾌함이나 무리가 전혀 없다는 것!
괜히 아크람을 중동 최고의 집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
알리의 집사인 타미르가 나를 궁으로 안내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알리의 허락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외려 알리는 미안해하며 말했다.
‘성훈!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아크람이 그 점을 넌지시 지적을 해 주더군. 아바마마를 뵙는데,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지. 얼른 가 보게. 난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 연회가 시작하기 전에 입궁하도록 하지.’
그렇게 알리의 배웅을 받으며 리무진에 올랐다.
타미르가 물었다.
“성훈 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네. 말씀하세요.”
“우리 왕자님께서 지금 상황이 안 좋으십니다. 조금 있다가 궁에 가시면 알게 되시겠지만…….”
대충 아비다 들에게 들은 것도 있었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뒷공작을 많이 하는지 아는 바에야…….
‘결정적으로 석 달 동안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못하면, 대출금 상환이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만, 인지도의 하락으로 인해서 왕위계승권 순위에서 뒤로 밀려나게 되겠지.’
자세한 것은 모르는 척 시치미 떼며 말했다.
“여러 방면으로 압박을 받고 계시겠지요.”
집사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제가 보좌를 잘못한 탓이지요.”
“그래도 타미르가 있으니, 알리 왕자가 저렇게 건재한 거겠지요.”
‘알프레드’ 없는 ‘브루스 웨인’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성군으로 칭송받는 것 또한, 아크람의 존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리라.
그리 걱정할 것은 없지 않냐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출금 때문이라면 크게 걱정하실 일이…….”
타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대출금 따위야 어떻게든 해결하실 수 있을 겁니다.”
중동 왕자들의 자금 사정을 아는 이상, 저 말이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그럼…….”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나 버린다는 게 문제지요. 국민의 인식이 바뀔 테니까요.”
타미르는 진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여쭤 보는 말씀입니다만, 아크람 님을 뵙고자 하시는 데는 혹시 해결할 방책이 있어서 그러시는 것인지…….”
그의 말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의 얼굴도 덩달아 밝아졌다.
“아! 역시 그러하시군요.”
“물론 아크람 집사님께서 도움을 주신다는 가정하에 가능하겠지만.”
그는 그렇다면 걱정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께서는 도와주실 겁니다. 대놓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서 그렇지, 알리 왕자님을 가장 신뢰하고 계시지요. 수많은 왕자 중에 유일하게 국왕께 기대지 않고 홀로서기를 하신 분이니까요.”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평범한 일개 왕자에 불과했던 알리가 왕위계승권에 접근하는 데는 아크람의 보이지 않는 후원이 있었을 테니까.
그가 기도하듯 손을 모으며 말했다.
“알라께서 도우셨습니다.”
과장되어 보일지 몰라도, 급격하게 밝아진 그의 표정에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성훈 님. 이 타미르,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겠습니다.”
“아직 해결된 것도 아닌데…….”
“지금 알리 왕자님 주변에는 모두 적들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왕자님께서 운이 좋아 지금의 상승 가도를 달린다고 생각들을 하지요.”
“지금 알리를 본다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흥!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입니다.”
콧방귀를 뀐 타미르가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왕자들이 돈을 물 쓰듯 낭비하고 다닐 때, 알리 왕자님만이 우리 사우디아라비아의 미래를 걱정하셨습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내 물주로서만이 아니라, 그는 자신의 나라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내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알리는 반드시 살려내야겠어.’
그런 와중에도 타미르는 열성적으로 알리를 변호하고 있었다.
“알리 왕자님은 한 번의 실책 때문에 몰락해서는 안 되는 분이란 말입니다.”
타미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타미르가 울먹이며 고개를 재차 숙였다.
타미르는 묻지 않았지만, 내게는 이미 계획이 서 있었다.
‘문제는 그때까지 알리가 건재해야 한다는 거지.’
기껏 계획을 완성했는데, 결과를 받을 알리가 없다면, 죽 쒀서 개 주는 거나 뭐가 달라.
그걸로 이득을 본 다른 왕자가 과연 나를 얼마나 신뢰할까?
또한 나는 그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어떤 놈이 득을 볼지 내가 어떻게 예측하냐고?’
내 편견이겠지만, 중동의 석유 부자들은 다른 사람 알기를 거지처럼 보는 자들이었다.
그런 놈들 배 불리기보다는 됨됨이가 되어 있는 알리가 백 배는 낫다.
지금 아크람을 만나는 것은 내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알리가 버틸 수 있는지, 또 그렇게 지원할 수 있는지 의견을 타진하러 가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크람이라면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알리에게 말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문제겠지만.
‘그 고집쟁이가 남의 말을 듣겠냐고!’
그럼 방법은 뒤에서 공작하는 거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
귀찮기는 하지만, 그게 가장 안전하고 알리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방법이었다.
‘알리! 잔바람이라고 했죠?’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무시하기에는 그 바람이 너무 거셌다.
나도 사실 깜짝 놀랐다고!
그런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물론 그게 부자들이 모이는 중동의 호텔이라는 무대였기에 가능했으리라.
호텔 ‘로열 쿠웨이트’에 전시된 작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물론 압둘은 나름의 계산이 있었기에 전시했겠지만.
‘이건 충분히 먹힌다. 고객에게 어필할 수 있다!’라는 확신 말이다.
‘천생 장사꾼이 아닐 수가 없어. 인정한다.’
내 작품으로 고객을 끌어모은 건, 그의 수완이니까.
나라면?
‘생각도 못 했는데, 무슨 비교가 되겠어?’
하지만 그의 그 계획은 내게도 인식의 변화를 일으켰다.
뭐냐고?
‘내 작품이!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세계에 확실히 먹힌다는 거지.’
그걸 확실하게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운이 좋아 잔바람을 일으켰지만, 알리 당신에게는 모래폭풍을 일으켜 주지.’
눈에 보이는 가능성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내 안의 김성훈이 물었다.
‘야! 시장조사는 어떡하고! 맨땅에 헤딩할 생각이냐?’
되레 그에게 반문했다.
‘시장조사? 그게 왜 필요한데? 압둘이 이미 다 확인시켜 줬는데!’
‘로열 쿠웨이트’가 중동의 고객들을 싹쓸이해간 마당에, 더 무슨 시장조사가 필요할 것인가?
그에게 말했다.
‘지금은 서둘러야 할 때라고!’
한시가 급했다.
박람회에서의 성공을 봤으니, 다른 기업에서도 나처럼 전통문화를 상품화시키는 곳이 나올 것이다.
‘한국인의 모방 실력도 어느 나라 못지않다고!’
그것도 같은 한국의 것임에야, 나를 앞지르는 것은 금방일 것이다.
그 전에 내 브랜드를 세계인의 뇌리에 박아두어야 한다고.
한국 전통문화 하면 바로 ‘김성훈’이라는 이름 석 자가 머리에 떠오르도록 말이다.
‘어영부영 시간을 허비하다가는 상한가에 주식을 팔지 못한다고!’
승부는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거니까.
아크람을 설득시킬 수만 있다면, 알리는 앞으로도 계속 내 후원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확실하고 끈끈한 관계가 되겠지.’
타미르가 나를 불렀다.
“성훈 님. 내릴 채비를 하시지요. 이제 거의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도착했는지, 궁이 저만치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