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08화
첫 번째 일거리(04)
내 목적은 알리에게서 일을 따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알리에게 부탁하지 않느냐고?
내가 왜?
도움을 청하는 순간, 내가 부탁하는 모양새가 된다고!
대상에 따라 반응은 바뀌는 법.
부탁하는 이에게 같이 부탁하는 사람이 있을까?
선택권은 부탁받는 사람에게 있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난 그럴 생각도, 이유도 없었다.
잠시지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두 왕자의 호의를 내 필요에 따라 경쟁시키고 마음대로 이용하는 건, 너무 얍삽한 거 아니야?’라고.
실제로도 나는 그 둘을 같은 저울에 놓고 경쟁시켰다.
지난 삶의 나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을 했었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아무 능력이 없었더라도, 그 둘이 나를 좋아했을까?’라고.
알리와 압둘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마냥 좋은 사람들도 아니다.
오히려 냉혹한 자본가에 가깝다.
‘상대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야?’
그들이 돈을 투자하는 만큼, 그들에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 주면 된다.
그들은 좋은 작품을 받아서 좋고, 나는 인정받아서 좋고!
구구절절 설명들이 왜 필요한가?
지금의 내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나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왜 내가 아쉬운 소릴 하며 일을 받아야 하느냐고!’
***
“오랜만에 푹 자겠네.”
비록 좁은 자리이기는 하지만, 한숨 자기에는 충분했다.
‘두 번째 사우디행, 이번에도 좋은 일로 가득하기를.’
눈가리개를 하고 좌석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수면에 대한 기대는 5분도 지나지 않아 깨어지고 말았다.
“성훈 님?”
누군가의 부름으로 안대를 벗었을 때, 정장 차림의 두 아랍인이 서 있었다.
여러 번 깨웠었는지, 스튜어디스의 난처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비비며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
그제야 중년의 아랍인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내게 인사를?’
경계의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 소속, 알라위입니다.”
“그런데요?”
막 선잠에서 깬 터라, 목소리가 거칠었다.
그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는데, 목소리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흠흠. 그런 거 아닙니다. 목이 깔깔해서……. 죄송합니다.”
중년인이 눈짓했고, 스튜어디스가 급하게 탕비실로 달려갔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공손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목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려는 거겠지.
“어떤 용건이신지 모르지만, 그렇게 불편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제가 불편해서 그러는 거죠.’
내가 권력자도 아니고, 이들이 내 앞에서 이러는 것도 불편했다.
짐작이 되는 건, ‘알리가 무슨 지시를 내렸나?’하는 정도뿐이었다.
가져온 물을 마시고 목을 풀었다.
“네. 그런데 어떤 용건이신지?”
안정된 목소리가 들리자, 그도 표정을 풀었다.
“긴 여행이 될 겁니다.”
“…….”
“미리 연락을 주셨더라면 준비를 했을 텐데…….”
“알리 왕자님께서 부탁하신 건가요?”
“흠흠.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말과는 다른, 긴장된 태도로 보아 100% 확실했다.
하지만 왕자로서의 체면도 있으니 모른 척하기로 했다.
잘 대접하려는 거지, 해를 끼치려는 건 아니질 않은가?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괜찮으시다면, 다른 자리에 가셔서 편하게 가셨으면 합니다.”
스튜어디스를 슬쩍 바라봤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는 건 싫거든.’
그녀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 사우디항공은 항상 귀빈을 위해 자리를 남겨두는 관례가 있습니다.”
그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희는 그 자리를 ‘로열시트’라고 부릅니다. 다른 승객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맹세코 없을 겁니다.”
“제가 이 자리를 고수하면, 알라위 씨께서 곤란하시겠군요.”
그가 말없이 머쓱하게 웃었다.
알면서 뭘 묻느냐고 말이다.
“가시죠.”
안대를 접어 비치대에 넣으며 일어섰다.
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해해주셔서.”
그의 안내에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일반석과는 다르게 차려입은 스튜어디스가 내가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랍 전통복장을 간소화한 투피스 정장에 세련된 미모의 스튜어디스였다.
‘훗! 공기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과연 비즈니스석다웠다.
편하게 발을 펼 수 있는 스툴이 있고, 좌석마다 모니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 거죠?”
뒤따라 올라오던 알라위가 말했다.
“거기가 아닙니다. 성훈 님! 안내해 주세요.”
그녀가 얌전한 얼굴로 인사하며 말했다.
“이쪽으로.”
‘응? 막혔는데?’
살짝 당황해서 눈썹을 씰룩이자, 그녀가 벽의 버튼을 눌렀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 양옆에 서 있던 두 미녀가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고개 숙이며 내게 인사했다.
화려한 문양의 전통복장에 깊은 눈매를 가진 여인들이었다.
‘어! 이건 뭐지?’
멈칫하는 내게 알라위가 말했다.
“여기가 로열시트입니다. 들어가시지요. 성훈 님.”
“알라위. 당신은?”
너희들은 들어가지 않느냐는 말이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는 바로 뒤편의 일등석을 가리켰다.
‘이거야, 원!’
그가 두 승무원에게 눈짓했다.
“불편함이 없도록 모셔주십시오.”
살짝 당황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살다 살다 이런 환대는 처음이었으니까.
‘이게 어떻게 로열시트냐고? 룸이지!’
로열시트라기에 일등석 중에서 좋은 자리일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 잠깐 난감했지만, 그 사이 알라위는 내 등을 떠밀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불편함이 있으시면 저를 불러 주십시오.”
‘휴!’
안으로 들어서자 들어온 벽을 제외한 3면의 창에서 밝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
“‘아디바’라고 합니다. 왕가 문장의 디자이너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이나’라고 합니다. 저 또한 영광입니다.”
둘 다 유창한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느낌이 다른데요?”
내부의 천정과 허리 몰딩이 나의 디자인으로 둘러져 있었다.
약간 변형된 부분도 있었지만, 그 느낌을 그대로 살리고 있었다.
“로열시트니까요. 원래를 우리 왕족들만을 위한 공간이지요. 왕족을 제외하고는 성훈 님께서 첫 번째 사용자이십니다.”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 작품에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랄까?
소파로 안내하며 나이나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좀 꺼렸겠지만, 성훈 님이라면 저희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안내하는 동안, 아디바는 바에서 얼음과 위스키를 꺼내고 있었다.
“한국어를 잘하시네요?”
나이나가 쿠션을 내 등에 받쳐주며 말했다.
“저희 둘 다 8개 국어는 한답니다.”
“대단하군요. 정말.”
화장 때문에 나이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목소리로 보아 많지 않은 나이임이 분명했다.
‘나랑 비슷한 나이인데, 이 정도라고.’
일반석 스튜어디스들도 용모와 학력을 따지는데, 차원이 다른 이곳은 두말해 무엇하랴!
내 놀란 눈을 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한국어는 취미로 익힌 거예요. 재미있는 나라니까요. 개인적으로 팬이기도 하구요. 그렇죠. 언니?”
아디바가 과일 쟁반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알리 왕자님께서 입이 닳도록 칭찬하시는 성훈 님의 나라이기도 하구요.”
둘 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루한 여행이 되지는 않겠군.’
재기발랄하며 지적인 그녀들을 보며, 그런 확신이 들었다.
바닥에서 전해지던 진동이 그녀들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사라졌다.
***
성훈과의 통화를 끊고 알리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또 압둘 녀석과 먼저 만나게 할 수는 없지!”
어제 아침에 전화를 받고 얼마나 약 올랐던가?
물론!
압둘의 전화였다.
-알리. 오늘 아침 신문 봤나?
“무슨 신문? 쿠웨이트 유전에 불이라도 났나?”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알리에게, 압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흐흐흐. 객쩍은 친구? 그렇게 속이 좁아서야!
“이익! 여우 같은 압둘. 분명히 내가 베팅은 많이 했다고!”
-쯧쯧. 그래서 내가 자네를 둔하다고 하는 거야.
알리의 콧잔등이 꿈틀거렸다.
“무슨 헛소리야!”
-성훈이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쯧쯧.
압둘의 고개 젓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돈 이외의 것으로 베팅했어야지.
알리가 으르렁거렸다.
“이미 끝난 일로 놀리려고 전화한 건가?”
-설마.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나?
씩씩대는 알리에게 압둘이 빙글거리며 말했다.
-신문이나 보고 살아! 특히 일 면 기사가 뭔지 정도는 알아야지. 에잉!
“듣기 싫어! 끊어!”
알리가 서재 밖으로 소리쳤다.
“오늘 자 신문들 다 가지고 와! 뉴욕타임스건 뭐건 몽땅 말이야!”
잠시 후 가져온 신문 일 면에는 압둘의 호텔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세기의 명감독 스티브가 극찬한, 코리아의 전통 건축! ‘로열 쿠웨이트’를 장식하다.>
이름 좀 있다 하는 신문에는 모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이게 기사냐? 광고지!”
비서가 말했다.
“기사를 가장한 광고로군요. 압둘 왕자님께서 돈을 좀 쓰신 모양입니다.”
촌스러운 압둘의 얼굴이 떡 나와 있고, 성훈의 작품들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쯧쯧. 용쓴다. 용써! 졸부 아니랄까 봐, 돈 지랄을 했구만!”
알리는 그렇게 비웃었지만, 그 웃음은 그날 저녁을 넘기지 못했다.
해가 저물 무렵, 그의 저택으로 ‘리야드 호텔’ 지배인이 방문했다.
“무슨 일인가?”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응?”
지배인의 얼굴로 보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였다.
“고객들의 예약 취소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석 달 동안은 예약이 불가능하다 할 정도로, 호황이었던 리야드 호텔이었다.
시설과 서비스로 손꼽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자랑이었다.
원유 수출을 제하고는, 외화 수입의 반 이상을 차지했기에, 소유주인 알리의 자부심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신화가 지금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알리가 다급하게 물었다.
“왜? 이유가 뭐야?”
좋지 않은 소식이니 전하기 어려웠으리라.
지배인이 머뭇거렸다.
“저…… 그것이!”
“말 돌릴 생각하지 말고 사실대로 얘기해! 서비스가 문제야? 아니면 식단? 침구? 고객들이 원하는 대로 모두 바꾸란 말이야!”
하지만 지배인은 전혀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압둘 왕자의 ‘로열 쿠웨이트’의 예약이 꽉 찼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거 잘 되는 거랑 내 호텔이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루에 수백만 달러가 사라지고 있는데, 과연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지배인이 흥분하는 알리를 달래며 말했다.
“우리 호텔에서 예약을 취소한 수만큼, 그 호텔의 예약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게 뭘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절대로 믿고 싶지 않은 결과였다.
“그럼…….”
“네! 우리 고객이 다 그쪽으로 가버린 거지요.”
알리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이마를 짚었다.
“방법을 찾아봐!”
지배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당장 방법을 찾아! 숙박비를 반으로 낮추더라도, 그 손님들을 다시 데려오라는 말이야! 알았어?”
지배인이 간단히 인사하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저걸 짓느라, 얼마나 큰돈을 들였는데. 크.’
지배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유는 단 하나였다.
성훈의 모형!
기껏해야 200만 달러짜리 모형이었다.
그게 15억 달러짜리 호텔을 흔들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냐만은, 이미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을 어쩌겠는가?
알리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당장 생각나는 타개책이 없었다.
성훈 밖에는…….
‘저 모형을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해 볼까?’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기회를 못 잡은 자신을 탓해야지.
성훈에게 부탁했다가는 ‘따라쟁이가 될 생각이냐!’고 타박만 받을 것이 뻔했다.
똑같이 카피하면 되지 않냐고?
‘그럼 녀석이 날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을걸!’
하나 마나 한 고민이었다.
답이 없는 문제로 머리를 싸매는 알리였다.
그러던 차에 오늘 마침, 성훈의 연락을 받은 것이었다.
알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떻게든 성훈을 붙잡아야 해.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