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305화 (305/427)

건축의 신 305화

첫 번째 일거리(01)

난 지금 직원 휴게소에 자판기 커피를 마주하고 앉아 있다.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인사과에 가서 말씀하시면, 설계 2팀 사원증이랑 출입카드 줄 겁니다. 그거 가지고 우리 팀으로 오시면 됩니다.”

곽 이사의 이 말만 믿고 인사팀으로 갔는데, 결과는 대기발령이었다.

인사팀장이 응접실로 나를 안내했다.

소파에 자리를 권하고, 손수 원두커피를 내려와 내게 권했다.

“성훈 씨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치켜들며 그가 말을 꺼냈다.

마른 인상에 각진 안경의 깐깐한 이미지와는 달리, 부드러운 말투였다.

“곽 이사님의 입장을 배려해서, 대기발령으로 해 두었습니다.”

왜 들은 것과 다르냐는 내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사님께서도 충분히 고민하신 문제겠지만, 이런 막무가내식의 인사를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한참 어린 내게도 존대를 하며, 차근히 사정을 설명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가만히 경청하는 내게 그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저는 아직 성훈 씨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지금 상황에서 알 수 있는 건, 곽 이사님의 움직임으로 보아 일반인이 아니다. 그 정도겠죠.”

‘정체를 모르는 데도, 자기 일은 해야겠다?’

고집이 느껴지는 입매, 그러면서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이군.’

그러면서도 적을 만들지 않는 타입으로 보였다.

그와의 시간은 내게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이런 유형도 있었군.’

회사에서 그보다 많은 청탁을 받는 사람이 또 있을까?

현재 건설 인사팀장.

‘인사’라는 사장의 권한을 대행하지만, 사장보다는 대하기 편한 자.

이리저리 떡고물을 챙기며, 편한 대로 살아갈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사장의 신뢰?

그런 것은 이미 한 몸에 받고 있을 터!

신뢰할 수 없는 이에게 인사를 맡기는 사장은 없다.

인사가 만사인 건 누구나 아는데.

그런데 그 인물이 자기 일을 하겠다고 한다.

곽 이사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 있어도.

그가 말을 이었다.

“저는 사내 정치, 그런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막무가내 인사를 묵과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일에 대한 책임감이랄까?

“충분히 검토한 후에, 인사발령을 내겠습니다.”

그의 의지가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인사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라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인사란 원래 이런 거니까요.”

차분한 어조로 미안해하는 그를 보니, 얼굴에 조용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응?’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내 손을 잡았다.

“저도 이 회사가 건설이라고 현장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면, 실망했을 겁니다.”

“네?”

“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각자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해야겠죠.”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목적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기분 좋게 사무실을 나왔다.

***

그리고…….

지금.

“하! 이거 참!”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앞에 있는 것들은 무조건 부수며 달려왔다.

현장 일이라는 게, 그런 것들 아니던가?

안 된다고 하면 되게 만들고, 그러고도 통하지 않으면 깨부수기를 몇 차례.

“이건 현장에서 느낄 수 없었던 거라고.”

벽이 느껴졌다.

현장이 무관들의 무대라면, 여기는 문관들의 세계랄까?

꼬장꼬장한 유생을 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깨부숴서는 안 되는 것.

그들의 룰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닌, 그것이 맞는 것이기에 존중해 줘야 한다.

“차라리 최 이사나 곽 이사가 난 대하기 편하다고! 같이 맞붙으면 되니까.”

보이지 않는 적은 내 꼬리를 잡고 있는데, 나는 지금 여기 멈춰 서 있다.

“내가 이런 대기업에서 일해 본 적이 있어야지.”

지난 삶에서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당면한 난관이었다.

애초에 탄탄하게 구성된 팀에, 권력을 이용해 강제로 비집고 들어가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게 당연히 될 거로 생각했다는 거.

‘솔직히 곽 이사의 부탁이면 이 정도는 가뿐하게 해낼 줄 알았거든.’

내가 곽 이사와 특이한 관계라 못 느끼는 거지, 실제로 대기업의 이사라고 하면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게 더 적은 직함이 아니던가?

지난 삶에서 본 대기업 이사라는 직함은, 그 당시 내게는 하늘보다 높았다.

허나 현실은 그 또한, 대기업의 부품일 뿐이었다.

‘그게 가능하면 구멍가게라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 이 답답아!’

조급한 마음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

‘못난 놈!’

알량한 권력이라 비웃었던 주제에.

그걸 특권이라고 누리려 하다니.

모순이잖아.

또 강제로 그렇게 만든다고 치자.

곽 이사와 인사팀장 둘 중의 하나, 혹은 둘 다 그들의 입지에 균열이 생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게 뭔데?’

일반 사원 자리 하나?

이득보다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크잖아.

곽 이사는 결과를 전해 듣고, ‘당장 요절을 내겠습니다.’라며 뛰쳐나갔지만, 결과가 바뀌리라는 기대는 들지 않는다.

‘곽 이사가 맞상대하기에는 수준이 너무 높아.’

그는 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아군으로 품어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어디 가서 그런 사람을 구하겠어?’

품지 못하더라도 적으로 만들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멍하니 있을 거야?’

내 안의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편하게 쉬려고 올라온 게 아니거든.”

이 시간에도 내 뒤를 쫓는 자들은 야금야금 거리를 좁혀 오고 있을 것이다.

종이컵을 구기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제 남이 주는 일이 아니라, 내가 일을 만들어 가야 할 때다.

***

곽 이사가 씩씩대며 인사팀 문을 벌컥 열었다.

“박 과장. 내가 아까, 김성훈이! 설계 2팀으로 배정하라고 했는데, 왜 아직 안된 거야!”

사무실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박 과장이 튀어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이사님…… 그게…….”

“뭐가 문제인 거야?”

“그게 저희 팀장…….”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반려시켰습니다.”

“엉? 누구야?”

곽 이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접니다.”

맨 안쪽자리의 인사팀장이 안경을 치켜들며 곽 이사를 응시했다.

‘아까는 없더니.’

깐깐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지고 들어가면 될 것도 안 되지.

“왜! 뭐 때문에! 아까는 된다고 했잖아!”

“곽 이사님. 흥분하지 마시고.”

박 과장이 그를 말렸다.

그의 판단으로는 별문제가 없었다.

특채로 들어오는 인원들, 임의적으로 적소에 배치하면 되는 문제였기에, 그렇게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팀장이 보기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박 과장, 너! 두고 보자. 나를 이렇게 창피하게 만들어?’

하지만 지금의 상대는 과장이 아니라, 팀장이었다.

“내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어?”

그를 옆으로 제치고 팀장의 책상 앞으로 가, 인사팀장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팀장은 그가 오든 말든, 서류만 뒤적이고 있었다.

그게 더 곽 이사를 열 받게 했다.

“이유를 설명해! 허 팀장.”

“설계 2팀 티오 넘칩니다.”

이유를 설명하랬더니, 딱 이유만 설명하고 있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얼굴을 들지도 않는다.

‘아오! 그걸 누가 모르나? 벽창호야!’

아무리 이사라 해도, 아니 설령 부사장이라 해도, 인사권에 간섭할 수는 없는 법.

누가 뭐라 해도, 인사권은 사장의 고유권한이니까.

“그것 말고, 나한테 배정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라는 말이야!”

그제서야 인사팀장은 얼굴을 들었다.

“9월에 3명 끌어간 거 기억나시죠?”

“그래! 그때는 일이 바빠서 어쩔 수 없었잖아.”

“그거 원래는 설계 3팀으로 갈 티오였습니다.”

“그런데 뭐?”

“그때는 설계 3팀 양 이사님이 양보해 주셔서 그냥 넘어갔지만.”

“그다음에 채워 줬다면서!”

저만 생각하는 곽 이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팀장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때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뭘?”

“설계 2팀은 금년 중순까지는 티오 배정 없다고요.”

“아! 이 사람아. 그건 그때 일이고!”

“휴!”

인사팀장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도 곽 이사님 팀에 인원 충분합니다.”

“충분하고 안 하고는 내가 판단해!”

팀장이 조용히 안경을 벗었다.

“틀렸습니다.”

“엥? 틀려? 뭐가!”

“인원이 필요하고 안 하고는 사장님이 판단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장님께 결재는 올려 봤어? 왜 자네가 중간에 자르고 지라…… 아니 난리야!”

팀장의 눈가에 주름이 생기려다 사라졌다.

“결재를 올릴지 말지를 결정하는 게 제 일이죠.”

사실인데 어쩌랴?

“그래도 올려볼 수는 있잖아. 사람이 왜 이렇게 고지식해?”

그가 올리면 대부분의 경우는 그대로 결재가 떨어진다.

그만큼 사장이 그를 신뢰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래서 ‘인사문제는 팀장 결재만 받으면, 최종 승인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으니.

“고지식해서 저한테 맡기신 겁니다.”

“내가 사장님께 가서 말씀드려도 되는 걸, 왜 자네한테까지 와서 부탁하는 줄 알아?”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이 사람아. 다 서로서로 좋자고…….”

곽 이사의 말에 팀장이 결재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사장님께 함께 가서 말씀드리시죠.”

그의 행동에 곽 이사가 뜨끔했다.

“함께?”

인사팀의 일에 끼어들었다는 걸 몸소 증명하라고? 미쳤어?

곽 이사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들었다.

“이사님.”

“왜 그러오?”

사장을 들이댔으니, 곽 이사의 반응이 퉁명스러울 수밖에.

애들 골목 싸움에 UFC 파이터를 데려온 것과 뭐가 다른가?

팀장은 잠시 고민 중인 듯 했다.

곽 이사가 툴툴거렸다.

“말할 거 있으면 하쇼!”

생각을 정리한 듯, 결재판을 펴들었다.

잠시 내용을 훑은 후에 말했다.

“박 과장.”

아까 곽 이사의 전화를 받은 직원이었다.

“네. 팀장님!”

“볼펜 가져와!”

그는 서둘러 달려와 공손히 볼펜을 내밀었다.

곽 이사가 당황했다.

‘씨! 사인하면 끝인데.’

“허, 허 팀장. 이거 보게.”

곽 이사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볼펜을 들고 말했다.

“오타야!”

“네?”

문장의 중간에 ‘ㄴ’을 적어 넣고 결재판을 박 과장에게 건넸다.

“오타라고! ‘과계’가 뭐야! ‘과계’가.”

“아! ‘관계’, 죄송합니다. 오타가 났습니다.”

허 팀장이 주의를 주며 말했다.

“이 상태로 어떻게 결재를 올려?”

“죄송합니다.”

머리 숙인 과장에게 허 팀장이 물었다.

“대기발령 결재 건, 오늘 꼭 결재 올려야 하나?”

박 과장이 고개를 들고는 살짝 웃었다.

“아니, 아닙니다. 내일 아침까지 올려도 됩니다.”

팀장이 서류를 박 과장에게 내밀었다.

“그럼 내일 아침까지 내 책상에 올려놓도록.”

“네. 알겠습니다.”

“다시 작성해 와!”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박 과장이 인사하며 돌아섰다.

“이사님.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일어서는 그의 얼굴에는 아까의 미안함이 남아있지 않았다.

“험험. 아닐세. 내가 오히려 흥분해서 미안하이.”

허 팀장이 곽 이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다시 결재를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곽 이사가 그 의미를 왜 모르랴?

내일 아침까지 어떻게든 사장에게 허락을 얻어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월권이 아니면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으리라.

“혹시라도 사장님을 뵙고 대기발령 건에 대해 말씀을 하게 되시면…….”

“그러면?”

허 팀장이 눈썹을 으쓱했다.

“혹시라도 변경사항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곽 이사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허 팀장이 말했다.

“저도 월급쟁이인데, 사장님의 의견과 일치하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곽 이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 듯 말 듯, 아리송한 표정.

“음. 내가 그동안 허 팀장에 대해 오해를 한 것 같소.”

그가 씨익 웃으며 안경을 주워들었다.

“그런 오해 많이 받습니다. 이제부터 바빠지실 것 같은데, 서두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 왜?’

그제야 곽 이사의 귀에 주변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친구가 그렇게 대단해?’

‘글쎄 디자인 최 팀장도 그렇게 사정을 하더니.’

‘그러게, 미친개까지 덤벼들 줄은 몰랐는데.’

‘미친개가? 왜?’

‘아까 전화통으로 지랄하는 거 못 들었냐? 자기 팀으로 보내라고.’

‘쳇! 지랄해 봤자지. 어디 우리 팀장님께.’

‘설계 3팀 양 이사님은 거기 비하면 양반이셔.’

소곤거린다고 주의했지만, 곽 이사의 귀에는 확성기를 틀은 듯 잘만 들렸다.

곽 이사가 어색하게 악수를 청했다.

“험험. 바쁜 일이 있는 걸 깜빡했소. 다음에 술 한잔합시다.”

“네.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다급한 마음에 악수를 끝내자마자 돌아섰다.

‘이것들이 나보다 먼저 움직였다는 말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이미 경쟁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걸음을 서둘렀다.

쾅!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일들 봐요. 괜히 소문 흘리지 말고.”

허 팀장의 말에 어수선하던 사무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주위를 확인한 팀장이 안경을 쓰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까 검토하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