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03화
서울행(05)
언양 00 불고기집 매화실.
소피는 석쇠 위의 불고기를 연신 뒤집고 있었다.
“어머! 냄새가 너무 좋아요!”
“그래. 소피도 많이 먹어.”
맞은편의 한 교수도 장난기를 걷어내고, 진지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제 울산 도시계획 문제만 처리하면 여기 일은 끝나는 거겠네?”
“네. 교수님께서 지금까지 해 오셨으니까, 쉬다가 지겨우면 옆에서 좀 도울까 싶네요.”
한 교수가 피식 웃었다.
“아서라. 그냥 쉬어. 막상 시작하면 죽자고 덤벼들 놈이…….”
하지만 그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씨익 웃으며 그에게 소주병을 내밀었다.
“교수님. 한잔 받으시죠.”
찰랑이는 술을 보며 그가 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네 녀석 덕분에 나도 많이 배웠구나.”
“영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한 교수가 혀를 차며 웃었다.
“쯧. 그러게 말이다. 어쨌거나 너무 무리하지 마라. 서울 올라가기 전에 또 한 번 들르고.”
그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의 한국 생활은 나와 함께한 거나 진배없으니, 어찌 그 감회가 다른 이와 같을 수 있으랴!
두 사이에는 사제지간을 넘어선, 가족 같은 정이 있었다.
“알았어요. 건축가들은 잘 관리되고 있나요?”
“응. 대단한 인재들이야. 하나하나가 모두 메인 건축가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지.”
한 교수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럴 겁니다. 이미 검증된 사람들이니까요.’
그들이 내게는 제갈량이요, 여포였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젊었다.
지난 삶에 봤던 것처럼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계를 상대하는데, 어찌 대충 준비하고 나갈 수 있으랴!
아무리 명검이라도 다뤄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들의 강점과 취약점을 먼저 파악해야 했다.
그걸 점검하고 보완하는 역할을 한 교수가 맡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행 연습이 필요했지.’
고심 끝에 선택한 무대가 울산이었다.
“도시계획은 차질 없이 마무리되어 가는 거죠?”
한 교수가 구워진 고기를 내 접시에 올렸다.
“그래. 거의 마무리됐어. 하지만 우리 계획이 얼마나 적절했는지는 몇 년 후에나 확인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겠죠. 계획과 실제는 다른 거니까.”
도시계획이든 건축이든 이론만으로 할 수밖에 없다.
모든 시작은 점 하나, 선 하나에서 비롯된다.
실패를 통한 노하우가 적용된다 할지라도, 수많은 시민을 상대로 하는 것에는 알지 못하는 변수가 많았다.
하지만 한 교수는 자신했다.
“그래도 이보다 울산에 더 잘 어울리는 도시계획은 없어! 그건 확신해.”
그것들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을 그때가 세계에 진출하는 날이 될 것이다.
넉넉잡아 5년 안에 말이다.
“학교 일은 이제 거의 마무리됐는데, 서울에서 할 계획은 다 세운 거냐?”
한 교수는 나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네.”
“앞으로 네가 할 일이 막중하구나. 어르신도 말씀은 안 하시지만, 네가 무리할까 봐 걱정하시는 낌새더라.”
내 든든한 후원자들은 모두 울산에 있었다.
말하지는 않지만,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뭐. 오히려 교수님께서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죠.”
“알기는 아는 거냐? 재미있는 일 할 때, 나중에 우리 빼면 안 된다?”
그가 웃으며 잔을 비우고는 내게 내밀었다.
잔을 밀며 말했다.
“아뇨. 전 운전해야죠. 여기…….”
쪼로록.
잔을 받은 한 교수가 말했다.
“참! 그런데 그거 알고 있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밑도 끝도 없이.”
“아니다. 아직 말할 때가…….”
숨기는 듯한 모습에 말꼬리를 잡고 물었다.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뭔가 염려가 되니까 말씀 꺼내셨으면서.”
씨익 웃는 나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그가 결국 말을 꺼냈다.
“우리 팀에 S대를 나온 친구들이 많이 있잖니?”
“그런데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자기네 모교에서도 전통학과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하더구나.”
“정말요?”
“그러니까 아직 확실치는 않다고…….”
미간을 좁히는 내게 한 교수가 얼버무렸다.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중요하죠.”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다.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까 봐, 망설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겠지.’
씁쓸한 한숨을 목으로 넘겼다.
“교수님과 한잔 더 할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 되겠군요.”
그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왜? 바로 움직이려고?”
“네.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죠. 감히 추월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벌려야 하니까요.”
한 교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마지막 가는 날인데, 성훈이랑 술 한 잔 못 기울여서 어떡하나. 섭섭해서.”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발주자의 강점은 추월당하는 순간, 사라진다.
내 접시에 연신 고기를 퍼 나르느라, 정신없던 소피가 그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네. 성훈 씨도 한잔하세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내일 바로 서울로 올라가야 돼.”
소피가 한 교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또요?”
뜨끔한 한 교수가 손을 내저었다.
“아냐! 나 때문에 가는 거 아냐? 안 그러냐?”
한 교수의 과잉 반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다른 일로 가는 거야.”
“이번에는 언제 내려와요? 모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당분간은 내려오기 어려울 거야. 계속 거기 있을 거거든.”
그녀가 입을 삐죽이며 울상을 지었다.
“그런가요?”
“그래. 좀 더 도와주고 싶었는데, 미안하네.”
그녀가 도리질 쳤다.
“아니에요. 지금도 충분해요.”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그럼. 울산에서 마지막 술자리겠네요?”
“그렇게 되는 건가?”
그녀도 나도 애써 섭섭함을 감췄다.
소피가 말했다.
“그럼 한잔하세요. 교수님이 섭섭하시겠어요.”
“운전은 누가 하고?”
내 물음에 소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띤 채 말이다.
“제가요!”
그녀가 운전을 자청하고 나섰다.
“소피. 당신이?”
“네! 왜요? 못 미더우세요?”
일 년 전, 그녀와의 하룻밤이 생각났다.
“음. 그때 우리가 뭐 때문에 노숙을 했더라.”
소피가 모를 리가 없지.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와 반대로 내 입꼬리는 짓궂게 올라갔다.
“시속 40km의 실력으로?”
소피가 눈을 홉떴다.
아무리 그래도 안 무섭거든!
“오늘 내로 울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놀리는 말에 한 교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그래? 그 정도야?”
뚱하게 삐쳐 있는 소피를 힐끗 보며 말했다.
“괜히 제가 프랑스에서 노숙한 줄 아세요? 아우. 한겨울에 동사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요.”
소피가 달아오른 얼굴로 뾰로통하게 답했다.
“그때는 완전 초보였다고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
“그럼요. 비교가 안 되죠. 제기 아우토반을…….”
“아우토반을 뭐?”
“저, 정속주행 한다고요.”
한 교수가 말했다.
“그래. 40키로면 어때! 천천히 가도 안전하기만 하면 돼!”
“40키로 아니라니까요!”
소피의 신경질을 뒤로 하고, 한 교수가 말했다.
“이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운전은 소피아 양에게 맡기고 한잔 하자꾸나.”
그녀는 턱을 내밀며, 당차게 말했다.
“이제는 맡겨도 안심할 수 있을 거예요. 진짜!”
‘풋. 그래. 천천히 가도 안전하기는 하더라.’
그녀에게 자동차 키를 건넸다.
“믿어! 소피. 안전운전.”
“알았어요.”
“자. 그럼 거국적으로 한잔할까? 받아라.”
“그럴까요?”
잔을 내미는데, 소피가 소주병을 들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제가 한잔 따라 드릴게요.”
한국에서 여자가 술 따르는 의미를 아는 것인가?
다 함께 따르고 건배하는 것과는 다른 분위기다.
강제하는 것이 아니기에, 성추행은 아니라 해도, 어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성훈이 피식 웃었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외간 남자에게 술 따르면 안 된다는 것 몰라?”
소피가 배시시 웃었다.
“알아요. 하지만 성훈 씨는 달라요.”
한 교수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성훈아. 한 잔 받는 게 뭐 어때?”
성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사람들 보기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도 제가 마음이 안 편합니다.”
소피의 얼굴에 실망이 어렸다.
한 교수가 투덜거렸다.
“목석 같은 놈. 술 한 잔 받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나 같으면 좋다고 받겠구먼. 저런 미인이 술 따르는 기회가 얼마나 있다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한 교수가 술잔을 냉큼 비우며 말했다.
“허허. 소피아 양. 그럼 나한테나…….”
다분히 장난끼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소피아의 눈매가 하늘로 치솟았다.
“외간 남자한테 술 따르면 안 되는 거라면서요. 흥.”
소피가 자동차 키를 들고 일어섰다.
“화장실 다녀올게요. 두 분이 맘껏 따라 마시세요.”
그녀가 사라지고, 한 교수가 물었다.
“소피아가 싫으냐?”
왜 그녀가 싫겠는가?
“그녀가 저한테 호감이 있다는 건 압니다.”
“그걸 아는 녀석이 그래?”
“소피가 아직 사랑이 뭔지 몰라서 저러는 거예요. 어린 치기에 호감과 착각하는 걸 수도 있고.”
한 교수가 진중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쩌려고?”
“좀 더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감정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생각해 보려고요.”
그때도 여전히 이렇다면, 나도 내 마음을 드러내도 괜찮지 않을까?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 아니냐? 때로는 불타는 사랑도 있을 텐데.”
어쩌면 나 스스로의 미안함인지도 모른다.
사랑해 줄 자신이 없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좋은 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함부로 취하지 못하는 것은 중년의 양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장가를 빨리 갔으면, 저만한 딸이 있을지도 모르는데…….’하는 자격지심 말이다.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고 말하지만, 과연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녀에게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
한 교수가 물었다.
“소피아가 진심이 아닐까 걱정하는 거냐?”
“아직 스스로 판단할 나이는 아니라는 거죠.”
“너. 서양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냐?”
그걸 어찌 모르랴!
어순은 물론이고, 알파벳도 모양 자체가 다른데!
잠자코 있는 날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난 소피아가 어순 틀리는 것도 한 번 못 봤다. 쓰는 건 아직 좀 서툴더라만.”
“한글 익히는 건, 한국에 관심만 있으면 하는 거고. 대장금 팬이라잖아요.”
“눈치가 없는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속을 알 수가 없어. 이 능구렁이 같은 놈.”
“훗.”
더 무슨 대꾸를 하랴!
그냥 말없이 웃었다.
한 교수가 아쉬움을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보통 정성으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야. 알지?”
그의 답답한 심정이 내게 와 닿았다.
“네. 다 아는데, 저렇게 여려서는 제 옆에서 못 버텨요.”
카약에서 떨리는 어깨를 감싸주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가?
‘그때의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한 교수는 전혀 그의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네. 어제 나한테 하는 걸 봤으면 네놈이 절대 그런 소리 못할 텐데.’
그는 급히 잔을 비우고 성훈에게 내밀었다.
억울한 속을 풀어줄 것은 술밖에 없었다.
“뭐? 여려? 그런 애가 총장을 상대로 저런 계약서를 작성하냐?”
“일과 감성을 같이 놓으면 안 되죠. 쟤. 알고 보면 굉장히 마음 약한 애예요.”
“마음이 약해? 허 참! 그런 애가 나를 이렇게 곤죽으로 만들어? 두 번 약했다가는 사람 잡겠다!”
소피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좀 더 겪어보면 마음이 달라지리라 생각했다.
“피. 고작 하루 보셨으면서.”
“하루에 이만큼 당했으면 다 아는 거지?”
한 교수가 보는 소피는 얼굴만 천사지, 일에 관해서는 마녀 같은 여자였다.
흠잡을 데 없는 얼굴로, 계약서의 흠은 얼마나 귀신같이 잡아냈던가?
‘읽을 줄 알면, 쓸 줄도 알던가!’
어제 소피의 일은 응당 성훈이 맡았어야 하는 거였다.
‘꿩 대신 닭이라고, 난 네 녀석의 할 일을 대신 도와줬던 거라고.’
처음에는 그나마 딱딱했지만 부드러웠는데, 현재 사장과의 통화 후에는 그녀가 돌변했다.
아니! 말과 행동은 다름이 없었다.
달라진 건, 냉기가 풀풀 흘렀다는 거지.
‘척 봐도 성훈이가 좋아 죽는데, 받아주질 않으니 딴 곳에 푸는 거지.’
거기다 겹쳐 심술을 부린다고, 성훈을 현재 사장에게 팔아넘겼으니, 소피의 분노가 모두 자신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훗! 그렇게 고분고분한 애한테 무슨.”
성훈의 말에 한 교수는 가슴을 텅텅 쳤다.
“으이구. 이 멍청아!”
‘소피아가 고분고분한 상대는 너뿐이란 말이다.’
“훗!”
짧은 웃음에 한 교수는 더 기가 막혔다.
“허허. 이거 참. 말을 말자.”
잔을 비우며 그가 확신했다.
“하여간 너한테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딱 어울리는 배필이야.”
성훈이 그의 말투를 똑같이 따라 하며 대꾸했다.
“어쨌거나 전 아직 사귈 생각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한 교수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과연! 네 뜻대로 될까?’
소피아가 밝은 표정으로 불고기 두 접시를 양손에 들고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