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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302화 (302/427)

건축의 신 302화

서울행(04)

전화를 끊고 소피를 돌아보았다.

“이제 됐어. 지금부터는 학교에 공방을 만드는 일에 집중해.”

“고마워요. 성훈 씨.”

그녀도 총장과 계약을 말하면서,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다만 경험이 부족했던 거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멀리서 왔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나중에 그녀의 회사가 가진 판매망은 분명히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공방 설립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도움을 줬으니 이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당장은 이득이 되지 않지만, 나중에 유럽에 진출할 때! 그때는 어마어마한 힘이 될 걸!’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데, 한 교수가 놀리듯 말했다.

“그래. 연인 사이에 무슨 내외를 하고 있어.”

소피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고, 나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교수님까지 이러시기에요? 연인은 무슨. 소피랑 저랑 나이가 얼마나 차이 나는데…….”

한 교수가 빙글거리며 코웃음 쳤다.

“흥. 네 살이냐? 궁합도 안 본다는 그 네 살?”

“어쨌거나 자꾸 그렇게 남녀 관계로 엮지 마세요. 소피가 어색해하잖아요.”

눈치를 보니, 계속해서 놀리려는 심산이었다.

‘쯧쯧. 나이도 지긋하신 양반이…….’

주제를 돌릴 겸, 소피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소피가 후계자 수업을 받는 거야?”

그녀에게 나이 차가 꽤 나는 늦둥이 남동생이 있기에 묻는 말이었다.

“아빠는 ‘알프’를 사업가로 키우고 싶은 생각이 없으신가 봐요. 아직은. 나중에 사업에 관심을 보이면 생각해 보시겠대요. 그 전까지는 제가…….”

유럽이라 남녀 차별은 덜하겠으나, 전혀 없기야 하겠는가?

‘임시직이라는 거네.’

아무리 냉혈한이라고 해도, 이제 두 살배기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준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으리라.

내 마음을 아는지, 묘한 미소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위로했다.

“힘든 짐을 짊어졌구나. 소피.”

어린 그녀가 짊어지기에는 회사가 너무 컸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규모를 키워갈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야망을 버리지 않는 한, 계속 말이다.

“괜찮아요. 비서 아저씨도 있고, 공장에 도와주실 할아버지 친구분들도 많으세요.”

그게 사실일지 몰라도 나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부재로 그렇게 힘들어했던 소피였다.

그로부터 일 년이나 지났다고 하지만, 아직은 가족의 품이 그리울 터!

‘거기가 그렇게 좋았으면, 여기 왔겠어? 더 좋아하는 게 있으면 몰라도.’

여렸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는 내게는 이런 마음이 짙었다.

‘여기 있는 동안은 내가 힘이 되어줄게.’

“뭐 하러 이렇게 먼 곳까지 왔어. 다른 나라도 많이 있었을 텐데.”

그녀가 속도 없이, 배시시 웃었다.

“여기는 성훈 씨가 있잖아요.”

한 교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잘못 보는 건가? 성훈이와 아는 사이라는 건 아는데, 며칠 안 본 사이 아닌가?”

“네. 소피하고는 한 이주 정도 같이 여행을 한 사이죠. 그렇지? 소피.”

“그래?”

한 교수는 아직도 미심쩍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그것뿐이에요.”

“그런 것치고는, 소피아 양은 널 너무 믿는 것 아니냐?”

‘이 양반이! 내가 뭐가 어때서?’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데, 소피가 대답했다.

“네. 성훈 씨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확신 가득한 목소리였다.

한 교수가 나를 힐끔 보며 물었다.

“어떤 이유로 우리 성훈이를 그렇게 믿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 양반이…… 무슨 말을 하려고.’

어제부터 함께 있었다고 했으니, 많은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일 이야기만 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 둘의 공통 주제가 뭐가 있어?

‘당연히 나밖에 없지!’

그럼 왜 그는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 생각을 하자, 한 교수의 속이 훤히 보였다.

‘소피가 내게 관심 있는 것 같으니까, 고백하게 하려고 부추기는 거구만.’

그의 장난스러운 얼굴에 확신이 굳어졌다.

‘속에 있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더라도, 소피가 내게 관심이 있다는 건 확인했겠군.’

나도 알 정도였는데, 한 교수가 왜 모르겠나?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피는 진지했다.

“우리 가족은 성훈 씨에게 큰 신세를 졌어요.”

“신세?”

한 교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쳐다봤지만, 내가 대답해 줄 리가 있냐!

소피가 말하지 않는데, 물어볼 수도 없지.

그것만으로는 아직 성에 차지 않는지, 그가 말을 이었다.

“흠. 그렇다치고! 단지 그것만으로?”

소피가 손사래 쳤다.

“아뇨. 그럴 리가요. 또 있죠! 성훈 씨는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어요.”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무슨 약속을 했는데?”

소피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성훈 씨가 돌아가고 한 달 후인가에 ‘짜파게티’ 두 박스를 받았거든요.”

“아하!”

귄터와 지나가는 말로 약속을 했었고, 나는 돌아오자마자 짜파게티를 보냈었다.

“그런 사소한 약속조차 잊지 않는 남자는 평생을 믿을 수 있다고…….”

그녀는 그윽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그의 남자 보는 눈은 수준급이거든요.”

한 교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라면 두 박스에 이런 미인을……. 도둑놈 같으니라고.”

“도, 도둑놈이라뇨! 콜록! 소피, 오해하지 마. 그건 약속이었을 뿐이야.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고.”

한 교수의 놀림에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사레가 들렸다.

소피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것만으로도 성훈 씨는 충분히 믿을 만한 남자예요.”

***

두 사제지간의 말다툼을 보며, 소피는 커피잔을 기울였다.

‘그거 말고도 이유는 많죠.’

차마 못다 한 말들을 속으로 읊조렸다.

‘당신 같은 남자는 처음이었거든요.’

원인을 알 수 없는 끌림이랄까?

처음 보는 순간부터 따뜻한 커피를 건네고 싶었다.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애초에 이유 따위는 상관없었을지도 몰라.’

하얀 눈밭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양인 남자가 그냥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추위를 잊은 채, 담담하게 롱샹을 그리는 모습이.

그에게 건넨 커피 한 잔은 롱샹에서의 추억을, 그리고 노숙하며 먹었던 매콤한 라면과 와인을 지나, 십 년을 넘게 가슴 아프게 했던 고집 센 두 남자를 화해시켰다.

‘짜파게티 따위는 없었어도, 당신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녀의 아버지가 동양권 지사를 말했을 때, 선뜻 자원했던 것도 성훈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일본도 지사 물망에 올랐지만, 한국을 주장했던 것도 소피아 자신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아빠와 귄터에게 성훈 때문이라고 말했었지.’

귄터는 대뜸 찬성을, 아빠는 여행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는 허락했다.

믿을 수 있는 남자라면서.

고집쟁이 두 남자의 의견이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일 년 만에 재회했음에도 그는 담담했다.

일부러 몸매가 드러나는 캐주얼을 입었음에도.

‘알고 있어요. 당신이 아직은 나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침착하자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랬음에도, 막상 그를 만났을 때는 이미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지금 떠올려도 여전히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때의 행동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다만 미운털이 박힌 건 아닐까, 걱정되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걸까?’

팔로는 자신을 꼭 안아주면서, 입으로는 담담한 두 마디를 건넸을 뿐이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생각해 보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냐?’

그러나 변하지 않는 그 모습이 좋았다.

나이답지 않은 자제력과 남자다움.

모닥불에 자신을 누이려고 안았을 때도.

호수 위 카약에서 조용히 가슴을 빌려줄 때도.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이건 나만의 기억으로 남겨두고 싶어.’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했고 사업을 배웠다.

둘의 티격거림을 보며 다짐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짐이 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계속 두드릴 거예요. 당신이 마음을 열 때까지.’

***

“하여간 우리 둘은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 그렇게 믿도록 노력은 해보지.”

“거참. 그런 게 아니래도…….”

아직 한 교수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앞으로도 Germany Craft는 계속 기업합병을 추진할 것 같던데?”

“네. 아빠는 욕심이 많거든요.”

그럴 거다.

지난 삶에서의 그는 유럽의 이름난 가구회사 반 이상을 Germany Craft라는 이름으로 묶었으니까.

“흐음. 그걸 과연 소피아 양 혼자서 할 수 있을까? 든든한 반려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짓궂은 질문을 하며, 그가 소피에게 눈을 찡긋거리는 게 보였다.

‘아! 얄미워. 그래요. 이제 볼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얼마든지 놀리셔!’

소피도 그의 의도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나와 자신을 이으려는 것 말이다.

한 교수의 말에 동조하며, 나를 곁눈질하며 웃었다.

“음. 능력 있는 남자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내 눈치를 슬쩍 보며, 한 교수가 넌지시 말했다.

“우리 성훈이 정도면 어때요?”

‘둘이서 아주 대놓고 핑퐁을.’

“아! 교수님!”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지만, 한 교수는 앉은 채로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야! 물어보는 것도 안 되냐? 그리고 너한테 물은 것도 아닌데, 왜 흥분하고 그래? 안 그래요. 소피아 양?”

소피가 날 슬쩍 올려다보고는 답했다.

“성훈 씨라면 다들 환영하실 걸요. 할아버지도, 아빠도”

한 교수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단다. 이 도둑놈아. 라면 두 박스에 대기업 사장 남편이 되게 생겼네? 이게 도둑놈 아니면 뭐냐? 하하하.”

‘이 양반이 정말!’

혼자서만 당할 수 있나?

내가 왜 서울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던가?

“교수님. 해명을 해주시죠. 왜 절 현재에 팔아넘기셨는지.”

심통이 난 듯, 그가 쏘아붙였다.

“나도 고생하니까, 너도 고생 좀 하라고 그랬다. 왜!”

“덕분에 제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어이없다고 웃으며 반박했다.

“아하! 그래? 투시도 6장 그려주고 6억 받았다면서? 이 도둑놈아! 그럼 이렇게 따질 게 아니라, 나한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도둑은 무슨? 충분히 그 값 해 주고 왔다고요.”

한 교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왜요? 사장이 비싸대요?”

그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답했다.

“전혀! 마음에 쏙 든단다.”

“사는 사람이랑 파는 사람이 만족했으면 됐지!”

“내가 몇 달 동안 5억짜리 설계도 그렸는데, 넌 하루 밤사이에 6억을 쓱싹한 거 아니냐?

“5억이나 받으셨으면 됐죠. 뭘 그러세요. 도면 몇 장 그려놓고, 그만큼 챙기신 교수님이 더 도둑놈이시구먼.”

기가 찬다는 듯, 한 교수가 말했다.

“야! 내가 그거 혼자 먹냐? 구조기술사, 전기, 소방, 나가는 데가 그거뿐인지 알아? 난 다 나눠 먹는 거지만, 넌 그거 혼자 먹은 거잖아.”

“큭!”

한 교수가 투덜거렸다.

“너 6억 벌 동안 나는 뭐 한 줄 아냐?”

“뭐요?”

“소피한테 꽉 붙들려서 이 서류 작성하고 있었다. 이제 답변이 됐냐? 이 자식아.”

“쳇 남자가 쪼잔하게. 그런 거로.”

“부러워서 그런다. 왜?”

부럽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할 것인가?

“흥!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그는 나 대신 소피를 보며 말을 이었다.

“소피아 양. 불고기 먹어 봤어요? 한국에 오면 그거 꼭 먹어 봐야 하는데.”

“정말요? 드라마 보면서 그게 가장 먹고 싶었던 건데.”

소피아의 하얀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한 교수가 일어서며 말했다.

“언양 가서 불고기나 쏴라. 그럼 내 도둑놈 소리는 안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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