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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301화 (301/427)

건축의 신 301화

서울행(03)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소피아 쟤가 총장이랑 담판을 지었다고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한 교수 정도의 경력이라면 몰라도, 갓 스물이 넘은 소피로서는 역부족이지 않았을까?

‘나도 총장이랑 협상하면서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하지만 한 교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가에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옆에서 본 나도 믿기 어렵지만 어떡하냐? 사실인걸. 이걸 보면 이해가 될 거다.”

그는 아까부터 만지작거리던 서류 뭉치를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총장한테 건네줄 계약서야. 이거 때문에 나 밤 꼴딱 샜다.”

한 교수가 확신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과 같았다.

‘어떤 내용이기에, 그 능구렁이가 승인한다는 거야?’

궁금증에 서류를 받아 들었다.

<투자 계약서>

‘Germany Craft’(이하 “갑”이라 칭한다)와 U 대학교(이하 “을”이라 칭한다)는 교내 서양전통가구 학과 개설사업(이하 “사업”이라 칭한다)과 관련한 자금투자 및…….

후략.

이렇게 시작된 계약서는 17장으로 끝을 맺었다.

‘한 교수가 자신할 만하네.’

골자는 이거였다.

‘Germany Craft’는 5년 동안 U 대학교에 200억을 투자한다. U 대학은 그 기간 동안 학과 개설에 이러이러한 지원을 해야 한다.

다른 말들도 많았지만, 결국은 이것에 대한 세부사항 혹은 부연설명이었을 뿐이다.

‘그럼 그렇지. 총장이 그냥 해 줬을 리가 없지.’

하지만 돈만 투자하고, 실리는 챙기지 못하는 멍청한 항목은 보이지 않았다.

적당하게 양보하면서, 적절하게 이득을 챙겼다.

서류에서 눈을 떼고 한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이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이렇게 꼼꼼하게 챙기시느라. 돈이야 소피가 끌어왔겠지만.”

협상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세밀한 항목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세부 협상에 대해서는 한 교수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너 착각하는 게 있구나. 이 계약서의 주인은 소피아 양이야.”

“그래도 교수님이 계셨으니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내가 한 건 한글로 타이핑해 준 것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총장과 담판을 지은 건 소피아야. 대단하더라. 난…….”

어제의 일이 떠오르는 듯, 소피에게로 눈을 돌렸다.

“왜요?”

“널 보는 줄 알았거든. 여자 김성훈.”

“하하하. 설마요.”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 내게, 그는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직접 못 봐서 그래. 소피아 양. 딱 부러지더라. 대단했다고. 저 나이에.”

“그래도 이제 겨우 스물이 넘었는데, 이런 계약서를 짜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요.”

한 장짜리 계약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깊은 내용의 계약서는 중견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그것도 200억을 투자하는 계약서인데, 어찌 소피 같은 어린아이가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의문을 한 교수가 풀어주었다.

“아! 이건 그녀가 가져온 계약서 원본을 우리말로 번역한 거야. 그리고 상황에 따라 약간씩 변경한 것도 있고. 이미 준비를 다 끝내고 왔더라고.”

말을 마치며, 그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자기 아버지랑 이야기할 때도 딱 잘라서 200억 내놓으라고 하던걸! 그게 적은 돈이냐? 그걸 납득시키는 소피아 양이나, 그걸 또 내어주는 아버지나. 참!”

‘아! 그녀가 누군지를 잊고 있었네.’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감성으로는 가능했다.

‘오히려 그게 당연하지 않을까?’하는 이해 말이다.

소피는 유럽 가구업계의 냉혈한을 아버지로, 고집쟁이 마이스터, 귄터를 할아버지로 둔 여자였다.

부드러운 듯 보이지만 맺고 끊음이 정확하며, 귄터를 닮아서 고집도 센 아이!

스스로 납득하며 웃었다.

“피가 어디 가나요?”

“이제 이해가 가냐? 총장을 상대로 딜하는데, 한 마디도 버벅거리지를 않아.”

“하긴 이걸 보면 총장이 허락할 만도 하네요.”

“그렇지? 이렇게 딱 부러지게 사업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거기다가 200억을 떡하니 얹었는데, 총장이 무슨 수로 승낙하지 않고 배기겠어.”

그가 말을 멈추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

“너 하고 똑같아. 아주.”

그 말에 내가 툴툴거릴 수밖에.

“저하고 똑같으면 좋지, 뭘 그렇게까지 오버하세요?”

아까 그의 절규를 떠올리며 하는 말이었다.

한 교수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야! 여자 김성훈을 보는 것 같았다니까. 내가 안 질리게 생겼냐? 내가 너를 모르냐?”

“훗!”

“너 서울 간다고 해서, 이제 좀 잔소리 안 듣고 사나 싶었더니, 아! 죽겠다.”

앓는 소리 하시기는, 내가 가면 제일 섭섭해 할 거면서.

한 교수의 푸념이 끝날 때쯤, 소피가 커피를 쟁반에 담아왔다.

“무슨 말씀들을 그렇게 하세요?”

잔을 내려놓으며 소피가 물었다.

그리고는 당연한 듯, 내 옆자리에 앉았다.

짧은 미니스커트에 늘씬하게 쭉 뻗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법.

‘김성훈. 네가 뭐라고 소피의 패션에까지 간섭할 거야?’

씁쓸했지만, 내가 간섭할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뭐라 하면 실례가 되는데, 하물며 유럽에서 살던 소피야 더 할 것 아닌가?

‘이럴 때 보면, 나도 꼰대야. 쩝.’

그녀도 나도 일을 하러 온 거지, 예의범절을 따지러 온 건 아니잖아?

“소피.”

“네? 성훈 씨.”

“계약서는 잘 읽어 봤어. 꼼꼼하게 잘했던데?”

“정말요?”

그녀의 얼굴에 보조개가 파였다.

“특별 교육을 받고 왔거든요. 아빠 딸인데, 어디 가서 사기당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으쓱하는 소피를 따라 한 교수도 말을 거들었다.

“소피아 양은 지금 후계자 수업을 받는 중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그랬군.”

경험의 결과가 아니라, 훈련의 결실이었다.

소피가 물었다.

“성훈 씨는 서울에서 일 잘 보고 오셨어요?”

그녀가 안부를 물었지만, 지금은 소피의 일을 마저 끝내야 했다.

계약서가 완성되었는데, 더 뭐 할 게 있냐고?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내가 지금 현재로 들어가려는 이유가 뭔데!’

아무리 뛰어난 장인이 있어도!

아무리 품질 좋은 상품이 있어도!

팔 방법이 없으면, 창고에서 먼지만 쌓인다고!

영업!

그때부터 진짜 사활이 걸린 전쟁이 시작된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소피에게 물었다.

“판로는 어떻게 만들 거야? 생각해 봤어?”

작은 성과에 뿌듯해 하던 소피의 얼굴이 굳었다.

“그것까지는 아직…….”

“알아. 너무 빠르지 않으냐는 것. 아직 학과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활성화가 되지 않아서 제품도 없지.”

“네. 그러니까…….”

“하지만 200억이나 투자가 되는 사업이야. 총장이 판매까지 책임져주지는 않을 거라고. 분명히.”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소피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성훈아. 너무 걱정이 많은 거 아니냐? 지금은…….”

한 교수의 말에 단호하게 답했다.

“아뇨. 마지막까지 계산해 두지 않으면 200억이 허공으로 날아갈 수도 있어요. 팔기 위해서 만드는 거지. 학교 좋으라고 장인들을 키우는 게 아니잖아요.”

소피를 보며 말을 이었다.

“소피. 뭐든 마무리가 중요한 거야.”

아무리 좋은 물건을 생산하면 뭐하나, 팔 매장이 없으면 수익을 거둬들일 수 없다.

“네. 따로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그래도 기특하게 생각해. 소피 같은 나이에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거야.”

이렇게 노력을 했다면, 도와줘도 아깝지 않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건 낭비겠지만, 될성부른 나무에 물을 주는 건 투자다.

“그 건에 대해서는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알아.”

“정말요? 도와주실 거예요?”

숙였던 얼굴을 드는 소피를 보며 피식 웃다가, 한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이번에 나는 신도시 중앙대로 사업 언제쯤 끝나나요?”

“음. 도로는 이번 해 여름이면 끝날 거고, 정비는 늦어도 연말이면 마무리될 거야.”

“유입인구가 꽤 되겠죠?”

“응. 태화강을 끼고 울산을 관통하는 도시계획의 중심이니까. 아마 개통되면 이용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할 거야.”

“제일 유동인구가 많고, 볼거리가 많은 곳이 어딘가요?”

잠시 고민하던 한 교수가 말했다.

“음. 아마도 중구와 남구를 잇는 나들목이 될 거야. 주변 공간이 넓기도 하지만, 태화강을 끼고 있어서 경관도 좋지.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입점 업체들은 정해졌나요?”

한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거기를 생각했던 모양이구나. 하지만 거기는 어려울 거야.”

“왜요?”

“시의원이란 것들이 차지하고 앉았거든. 명의는 달라도, 죄다 그 인간들 인맥이라고 보면 돼. ”

쥐꼬리만 한 그것도 권력이라고.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씁쓸한 한숨이 나왔다.

“한심하네요. 휴.”

“어쩌겠냐? 이게 현실인데.”

건축가들은 도시의 발전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거기에 편승해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만 이렇겠는가?

어딜 가도 사람 사는 곳이라면 똑같지 않을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되든 안 되든, 한번 물어나 봐야죠?”

“누구한테?”

“울산의 일은 울산의 권력자에게 물어봐야겠죠.”

“시장님. 소피 기억하시죠?”

-아! 그럼 기억하다마다. 성훈이 여자친구잖아.

호쾌한 농담으로 시장은 전화를 받았다.

“아 쫌! 시장님.”

여자친구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의도였지만, 시장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성훈아. 나는 말이야. 현주인가 하는 아가씨보다 소피아가 더 좋아. 대차 보이지만, 분위기가 있어. 아마 다른 사람한테는 차가울지 몰라도, 책임감도 있고 특히나 너한테는 되게 잘할걸!

불편해하는 내 속을 모를 리가 없지만,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며 끝까지 말하는 시장이었다.

‘누가 너구리 아니랄까 봐.’

“그걸 한 번 보고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맞을 거야. 내기해도 좋아. 사람 보는 데는 내 눈 따라올 사람 몇…….

더 이야기하다가는 2세 계획까지 나오게 생겼다.

시장의 말을 잘랐다.

“그거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 드린 겁니다.”

-그럼 그렇지! 네 녀석이 안부나 물을 놈은 아니지. 그래서 내가 질부한테 뭘 해 주면 되는데?

‘크. 질부라니…….’

얼떨결에 나를 자기 조카로 만드는 시장이었다.

질부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리!

말하지 않아도 이미 의도를 알고 있는데.

‘하지만 어떻게 알았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흥! 내가 너를 모르냐? 네 일이었으면 부탁이 아니라 딜을 걸었겠지. 그럼 남은 건 소피아 양뿐이지. 네 첫마디가 그거였어. 이놈아.

‘이러면 이야기가 빠르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Germany Craft라는 가구회사 직원이에요.”

-아! 그 가구회사 알지! 굉장히 유명하지. 오! 대단한 인재였네. 얼굴만 이쁜 줄…….

“하여간 그녀가 우리 학교에 지점 겸 서양 가구 공방을 만드는데, 판매처가 아직 없어요.”

시장이 호쾌하게 물었다.

-그래? 그 자리 내가 만들어 주지. 내가 질부…….

“남구 나들목 쪽에 자리가 있나요?

-…….

시장의 말이 잠시 멈췄다.

시의원들과 연관되어 있으니, 쉽지는 않겠지.

“곤란하신가 보네요. 그럼 다른…….”

-아냐! 원하는 자리 찍어. 몇 개가 되었든 내가 책임지지.

“혹시 곤란한 부탁드린 건 아닙니까?”

-신경 쓰지 마! 지지율이 얼만데, 시의원 나부랭이들이 감히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깟 것들 한 트럭보다 우리 성훈이가 더 중요하지. 크하하.

“저 때문이라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부분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지.’

시장에게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

-이 녀석이! 날 뭐로 보고!

시장이 말을 이었다.

-그 인간들은 휴게소 같은 구멍가게나 만들어서 제 이득이나 챙기려는 것들이야. 관광객들 호주머니 털려는 속셈이지.

“…….”

-하지만 이건 다르잖아. 그 매장에는 전국의 돈 있는 사람들이 다 한 번씩 기웃거릴 텐데. 비교가 되냐?

‘역시 보통 너구리가 아니야.’

시장은 말하지 않아도, 내 의도를 알아챘다.

안 그랬다면 시장을 설득해야 했으리라.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 해 말 정도에 입점할게요. 대략 3, 4개쯤 될 겁니다.”

-으헉! 그렇게나 되냐?

“네. Germany Craft는 브랜드가 여러 개거든요.”

여러 회사를 합자하면서도, 그 브랜드의 가치는 그대로 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럼 더 좋지! 말만 해 둬라. 바로 될 거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성훈아. 사람은 신세 진 거 잊으면 안 된다.

나라고 할 말이 없겠어?

“시장님도 도시계획, 잊으시면 안 됩니다.”

-끄응. 알았다. 이 녀석아. 월드컵 끝나면 보자.

그는 아직도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

한국이 16강에서 떨어진다는 그런 꿈!

“네. 그러시던가요?”

-끄응. 질부한테 안부나 전해 줘.

“아! 쫌! 시자…….”

-뚜. 뚜. 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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