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00화
서울행(02)
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코웃음 쳤다.
“훗. 결혼은 무슨? 그나저나 총장은 어떻게 설득하시려고요?”
그 물음에 한 교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총장은 이미 설득한 거나 마찬가지야.”
“네? 총장이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었다면, 성훈이 그 고생을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성훈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한 교수는 원두커피를 내리고 있는 소피 쪽을 슬쩍 바라보고는 성훈을 보고 웃었다.
“쟤. 소피라는 저 친구, 정체가 뭐냐?”
한 교수가 어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
성훈의 애마가 사라지는 소리가 들리자, 한 교수는 기지개를 쫙 폈다.
골치 아픈 고객을 제자에게 떠넘겼음에도, 양심의 가책은 없어 보였다.
“성훈이 녀석이 갔으니, 어떻게든 해결을 하고 오겠지.”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이 평온한 오후를 만끽하며, 부족한 잠을 채우는 것이었다.
탕비실로 걸어가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 남은 건 오후의 나른함을 즐기는 건가?”
둘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저런 염치없는 사람이 있냐?’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울산 도시계획!
그건 그에게 즐거운 놀이나 같았다.
뛰어난 건축가들과 든든한 시장의 후원이 있었으니,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작품 하나 만들어 보자!’하며 파이팅을 외쳤던 그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 초안을 짠 사람이 성훈이라는 것과 동료 건축가들이 모두 하이레벨이라는 사실이었다.
성훈의 초안은 고차원적인 도시 인프라를 지향하고 있었고, 건축가들은 모두 완벽주의자들이었다.
든든한 후원자라 믿었던 시장은 성훈의 초안을 원칙으로 고수했다.
“말이 간단한 초안이지,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주문이었다고!”
성훈의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공업 도시로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도록 도시 인프라를 재구축하라.
‘그것뿐이었다면, 이 고생을 안 했겠지.’
머리를 아프게 했던 건, 두 번째 안.
‘언제까지 공업으로만 도시를 지탱하겠어요. 볼거리 즐길 거리가 충분한 도시로 만들어 주세요.’라는 주문이었다.
공업 도시이되, 관광도시를 만들어라!
이게 쉬워 보이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더 약오르는 게 뭔지 알아?’
그 뒤로 성훈은 박람회를 한다면서, 아예 도시계획에서 손을 떼버렸다.
스타타워 현장이니, 대목장을 섭외하느니, 하면서 단 한시도 시청에 붙어 있지를 않았거든.
‘오죽하면 시장이 녀석을 붙잡으러 경주까지 갔겠어!’
성훈이 내팽개친 울산의 도시계획을 마무리 짓기 위해, 그는 매일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래놓고는 저는 박람회를 하고 와? 그것도 대상 수상?”
약이 올라 안 올라?
재미있는 건 혼자 다 하고, 머리 아픈 실전은 모두 한 교수의 차지였다.
“내가 봉이냐? 이놈아! 이 정도 해줬으니, 네 녀석은 고생 좀 해도 돼!”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성훈의 숙제를 풀며 도시설계를 하는 것이 즐거웠다는 것. 그리고 능력 있는 건축가들과의 교류가, 한 교수의 건축 세계를 성장시켰다는 것 정도였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인재들을 불러 모았던 걸까?
한 자리에 불러 모으기도 어려울 정도로 독창적인 시선과 창의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귀신같은 놈이야. 그런 걸 보면…….’
오랜만의 낮잠을 즐기기 위해, 한 교수는 삼인용 소파에 몸을 길게 뉘었다.
5분이나 지났을까?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들! 기말고사 끝났으면 집에나 돌아들 갈 것이지. 뭐하러 학교에 남아서 시끄럽게 해.”
나른한 오후의 낮잠을 방해받은 한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들. 혼 좀 내야겠군.”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
‘응? 성훈이 녀석이 돌아온 건 아니……. 어헉!’
그는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금발 미녀가 문 앞에 딱 서 있었으니까.
한 교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누구……. 아니 후, 후아유?”
오래간만에 쓰는 영어는 또, 왜 이리도 버벅거리는 건지.
허나 돌아온 건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애써 영어로 말한 그의 배려가 무안할 정도로.
그녀는 인사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소피아라고 해요. 성훈 씨를 보러 왔어요. 만수 씨가 여기 있을 거라고 하던데요?”
“아! 네. 맞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그녀의 뒤로는 건축과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라고는 볼 수 없는 건축과인데, 평범한 여자도 아닌 여신이 강림했으니, 녀석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한 교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이 소동을 가라앉히는 것이 급선무였다.
“에휴.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문을 닫으며, 한 교수가 소리쳤다.
“이 녀석들아! 방학이다. 집에는 안 내려가냐?”
그녀가 사무실 내부를 훑었다.
성훈이 오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한 교수가 원두커피를 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대체 저런 미녀가 왜 성훈이 녀석을……. 소피아? 아! 독일에서 만났다고 하던 그…….’
예쁘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미녀라는 말은 안 했다고.’
허나 그녀에 대한 정보는 성훈의 말뿐이었다.
녀석은 ‘조금 이쁘장한 여자애.’라고 했었지.
‘도대체 어떻게 보면, 저게 고작 조금 예쁘장한 게 되는 거냐?’
성훈의 미적 감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미녀랑 하룻밤을 보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에라이! 이놈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말이 되는 소리를!’
설령 성훈의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한 교수에게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넌 장님이 아니면 고자다. 고자!’
하기야 자세히 기억을 떠올려보면, 녀석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건축물밖에 없었지.
나머지는 좀 예쁘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사람이든 보석이든 말이다.
한 교수가 어이없는 탄식을 뱉었다.
아프로디테가 울고 갈 미녀에게 조금 예쁜 여자애라니.
그는 소피아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소피아 씨. 성훈 군은 지금 여기 없습니다만…….”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런가요? 흠…….”
성훈이 없다고 하면, 소피는 돌아갈 것이다.
보고 있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미녀였지만, 아쉽게도 그녀를 잡아둘 명분이 없었다.
“네! 제가 잠시 심부름을 보냈거든요.”
“그래요?”
그녀는 다소곳하게 다리를 모은 채, 커피잔을 들었다.
그윽한 향을 즐기고는 한 모금을 마셨다.
후. 후. 호로록.
잠시 후, 소피아가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럼 성훈 씨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미소를 건네는 그녀의 말에,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녀석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붙잡아 두는 것도 실례지.’
“저, 소피아 씨?”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금빛 눈썹을 으쓱했다.
“네? 하실 말씀이라도.”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려 헛기침하며 말했다.
“흠. 흠. 실은 언제 돌아올지 모릅니다.”
“아! 그런가요?”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작게 혼잣말을 했다.
“그럼 어쩌지?”
‘꼭 만나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한 교수가 물었다.
“그런데 성훈이 녀석은 무슨 일로 찾으시는지?”
그녀의 설명이 끝나고, 한 교수가 물었다.
“울산에서 공방을 만들려고 하는데, 성훈이에게 조언을 좀 구했으면 한다, 그거네요.”
“네. 맞아요.”
“흠. 그런 거라면 사람을 제대로 골랐네요.”
“네. 성훈 씨는 믿을 만한 사람이죠.”
소피아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말을 이었다.
“음.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한 교수가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물론 성훈이가 믿을 만하다는 건 사실이지만, 제 말은 손재주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네? 그럼요?”
“녀석의 경험을 말하는 거죠.”
한 교수가 작년에 전통건축학과를 만들며 생겼던 에피소드를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소피아가 눈을 반짝거렸다.
“성훈 씨가 공방을 만든 경험이 있다고요?”
장인들을 모아 학과를 신설했다는 말이 그녀에게는 공방을 만든 것으로 들렸던 모양이었다.
한 교수가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공방은 아니지만, 녀석이 우리 학교에 전통건축학과를 만들었거든요.”
하지만 무슨 큰 차이가 있으랴?
실제로 독일의 근대건축을 주도한 바우하우스 운동이 공방의 장인들에게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한 교수가 자랑스레 말을 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총장이 제안한 거지만, 실제로는 성훈이 처음부터 다 만들었다고 봐야지.”
그는 똘똘한 제자를 둔 덕분에 존경해 마지않는 대목장을 항상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성훈이가 대단한 녀석이기는 하지.’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대단하군요. 전 그저 손재주가 탁월한 장인으로만 생각했었어요.”
한 교수가 물었다.
“그런데 소피아 씨는 어떻게 한국말을 그렇게 잘하세요?”
소피아는 수줍은 듯, 눈동자를 아래로 떨구었다.
“음. 한국 문화가 좋아서요. 제가 장금이 팬이거든요.”
지금까지의 당당함과는 거리가 먼 대답이었다.
한 교수가 피식 웃었다.
거두절미하고, 문화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외국의 말을 배울 수 있을까?
‘불가능은 아니지만, 한복이나 한국 음식이 좋다고 한국말까지 배우지는 않지. 아주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말이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확신이었다.
한 교수는 어려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당연하게도 영어를 모르는 동양인은 놀림거리가 되었다.
‘놀림 받지 않기 위해 영어를 배웠냐고? 절대 아니지.’
그가 그렇게 힘들어하던 영어를 잘하게 된 계기는 하이 스쿨 클라스 메이트인 골드메리 때문이었다.
‘한마디 말이라도 붙여보려면 일단은 말이 통해야 하거든!
만에 하나라도 성훈이 좋아서 그런 거라면?
대단하지 않은가? 독일인이 한국어를 배우다니?
‘이런 열정이 있는 여자라면 도와주고 싶은걸?’
성훈이 너무 목석 같으니, 이대로 뒀다가는 아무런 진척도 없을 터였다.
‘수줍은 건가?’
내내 당당하던 소피아였는데, 성훈의 이야기에 볼이 붉어지는 것을 보자, 한 교수는 장난기가 돌았다.
소피아 입장에서야, ‘함부로 누구에게 호감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한국에서는 함부로 마음을 표시하지 않는다.’라며 성훈에게 경고를 들어서 그런 거지만, 한 교수가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그가 넌지시 물었다.
“정말 장금이 때문인가요? 혹시 성훈이가 좋아서 그런 거라면, 내가 성훈이랑 친해지게 도와주려고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소피아의 코발트 빛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정말인가요?”
그녀의 눈동자가 진심을 물었다.
한 교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성훈 씨가 좋아요. 그와 대화를 해 보고 싶었거든요. 성훈 씨 나라의 말로.”
이십 대 독일 여자의 당당한 사랑 고백이었다.
“제가 아까 성훈이는 대목장과 그 휘하 장인들에게 애착이 강하다고 했었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교수님께서는 저도 학교에 공방을 차리면 어떻겠냐는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하지만 저와 우리 장인들에게도 그렇게 애착을 가져 줄까요?”
두말해서 무엇하랴!
한 교수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명문대 졸업생들보다 장인들을 더 높게 평가하는 녀석이 성훈입니다.”
속으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성훈이 이런 생각을 했더라면, 소피아를 학교에 끌어들이려고 했을 것이다.
소피아와 깊은 관계가 되는 것이 껄끄러웠는지, 아니면 박람회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는지는 몰라도, 방법이 있는데 마다할 성훈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녀석은 신세를 지우려고 하겠지. 그래야 나중에 도움받기가 수월할 테니까.’
오랜 시간 함께하다 보니, 성훈에 대해서라면 전문가가 다된 한 교수였다.
결과적으로는 성훈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왜 성훈이 서양으로 건축 공부를 하러 갔겠는가?
‘녀석! 고마워해라. 이런 미녀와 이어주려고 내가 월하노인이 되는 거니까.’
허나 사랑에 장애물이 없을 수 있으랴!
‘학과를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학장이지.’
하지만 한 교수 자신이 학장과 직접 부딪칠 생각은 없었다.
고난은 둘이서 스스로 헤쳐나가야 더 사랑이 견고해지지 않겠는가?
한 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뭔데요?”
“아까 말했던 총장 있죠. 그분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만만치 않으신 분 같더군요.”
소피아의 마음은 정해진 것 같았다.
한 교수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절대로 만만치 않죠. 그러니까 성훈이가 돌아오면, 같이 한 번 설득해 보세요.”
잠시 고민하던 소피아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어요. 아무리 성훈 씨가 좋아도 그런 도움을 받을 수는 없어요.”
“왜요. 녀석이 도와줄 텐데.”
“안 돼요. 이건 제 일이에요.”
성훈이 공짜로 도와준 적도 없었지만, 과연 성훈의 도움을 마다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그녀가 이해되지 않는 한 교수였다.
소피아가 환하게 웃었다.
“저도 성훈 씨가 자상한 남자란 걸 알아요. 그는 힘든 사람에게 가슴을 빌려줄 줄 알죠.”
“그런데 왜?”
“지금 저는 힘든 것도 아니고, 또 그에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자에게 기대는 나약한 여자로 기억되고 싶지도 않아요.”
한 교수의 입에서 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
소피아가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총장의 연락처를 가르쳐 주세요. 직접 얘기하겠어요.”
그녀가 각오를 다졌다.
‘대가 없이 가슴을 빌리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