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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299화 (299/427)

건축의 신 299화

서울행(01)

내려오는 동안, 실실 웃음이 나왔다.

“한 교수. 이 사람이 진짜!”

날 보낼 때부터 뭔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애당초 쉬운 일이었다면 다른 사람을 보내지, 날 보낼 사람이 아니었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을 위인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나는 약이 올랐던 것뿐이다.

‘졸업 작품을 볼모 삼아 나를 팔아넘기다니.’

기분이 나빴느냐고?

전혀!

오히려 내게는 기회였다.

‘현재 사장 앞에서 실력을 보일 수 있었거든!’

평사원이 언제 사장 앞에서 실력을 펼쳐 보이겠어?

애당초 만날 일조차 없는데.

‘중역들도 얼굴 보기 어려운데, 어떻게 만나?’

하지만 한 교수 덕분에 기회가 생겼다.

‘내가 괜히 그림 공부를 계속한 줄 알아?’

인테리어는 내가 건축 일을 하는데, 세 손가락에 꼽는 중요한 과제였다.

나머지는 전통 건축과 구조!

이걸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온 거였다.

한 교수가 아니었다면, 현재 건설에 들어가서 끊임없이 ‘나 실력 있소. 이런 것도 할 줄 아오!’하면서 사장에게 어필해야 했을 거라고.

설령 곽 이사와 양 이사가 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리라.

“결국은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거지.”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사장에게 제안만 하면 된다.

‘인테리어에 대해서 이런 계획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이런 기회를 준 한 교수를 어떻게 미워하겠어?

왜 기회를 줬다고 확신하느냐고?

“애초에 그럴 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보내지도 않았을걸.”

허나 기회를 준 것과 날 약 올린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던가?

운전을 하면서 계속 생각을 떠올렸다.

“이제 울산의 일들은 거의 정리되었지?”

이제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전통건축학과도 거의 완성되었고…….’

울산 도시계획만 약간 신경 쓰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

“아차! 소피!”

그저께 박람회를 끝내고 내려올 때, 그녀는 내 옆자리 조수석에 타고 같이 내려왔었다.

‘울산에 공방을 만든다고 했었지?’

다른 말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려오는 내내, 어찌나 끊임없이 조잘거리던지!

‘손이 세 개였으면 했다고.’

양쪽 귀를 막고 싶었으니까.

꾀꼬리 음성도 다섯 시간 내리 들으면 소음이다.

“소피는 지금쯤 울산을 헤매고 있겠지.”

그녀는 전통 서양 가구 권위자, 귄터와의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그리고 그녀의 공방은, 나중에 한국과 유럽의 전통 가구를 잇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려면 그 공방이 제대로 자리 잡아야 하지.”

어차피 자금은 부족함이 없을 것이고, 귄터의 공방건립에 대한 양심적 부채를 미리 적립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신세진 걸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

“소피의 일을 책임지고 맡아달라고요. 한 교수님!”

한 교수가 귀찮아 할 것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빨리 한 교수를 보고 싶었다.

‘얼른 끝내고 소피랑 데이트나 해야지.’

말로는 귀찮다고 했었지만, 미인을 싫어하는 남자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나?

부웅!

카미의 속도를 높였다.

***

교수 사무실을 벌컥 열었다.

“교수님! 저한테 이러실 수 있는 겁니까?”

짐짓 화낸 척을 하며, 협상 분위기를 잡고 싶었다.

그런데 소피아도 함께 있었다.

‘엇. 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울산에 공방을 만들려면, 밖으로 돌아다니며 물류와 생산에 적합한 위치를 물색하려고, 지금쯤 발이 닳도록 뛰어다녀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녀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실망이야. 소피. 이러면 도와줄 마음이 사라지잖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만 돕는다.

스스로 하지 않는데 누가 도와주냐고!’

한 교수가 퀭한 눈으로 나를 맞이했다.

“성훈이. 고생했어. 왔냐? 이리 앉아.”

소피도 환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성훈 씨. 어서 와요. 기다렸어요.”

미소 짓는 그녀를 보니, 입안이 씁쓸했다.

‘쯧쯧. 기다릴 시간에 뛰어다녔어야지.’

여유가 있다고 해도 쉬어서는 안 된다.

젊을 때의 하루가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게 청춘이라던가?

소피가 사람의 마음을 매혹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예쁘다고 만사형통은 아니잖아!’

그녀가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허나 내가 이삼십 대 청춘도 아니고, 제 일에 책임도 질 줄 모르는 사람에게 무슨 매력을 느끼랴!

탐탁지 않은 얼굴로 소피에게 물었다.

“응? 왜 나를?”

“제가 며칠 전에 이야기했었죠? 할아버지가 한국에 공방 낸다는 거요.”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응! 알아. 그런 거면 소피, 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니야?”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은 외국인이야.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든, 어려울 거라고. 물론 처음에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그런데요?”

“이렇게 편히 앉아서 누군가가 도와주기만 바라면 곤란해.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말이야.”

꼰대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녀보다 어른이니까.

스스로에게 당당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이런 일은 인생 선배로서 단호하게 말해야 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어? 웃어?’

“오해하지 마세요. 울산에서 공방을 만들 방법을 찾았거든요.”

이미 대책을 마련한 건가?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게 무슨 꼰대 같은 짓이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나는 소피에 대해 속단하고 있었다.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공방이란 작업대만 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가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장인이 있어야, 공방이 그 기능을 발휘한다는 거지.

그렇다고 독일에 있는 장인들을 모두 한국으로 데려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말을 더듬는 나를 보며, 그녀가 풋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도와줄 생각은 하고 있었나 보네요.”

“그야 당연히…….”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기에, 실은 조금 원망했었거든요.”

그녀의 양쪽 볼에 살포시 보조개가 파였다.

“음. 그게 말이야.”

우물쭈물하는데, 그녀가 일어나 팔을 붙잡았다.

“알아요. 한 교수님 때문이었다면서요.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얼른 앉아요. 잠도 못 잤다면서요.”

그녀가 내 소매를 붙들고 자리에 앉혔다.

“응. 알았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 방법이란 게 뭐야?”

공방에 대한 지분을 주장하려면, 뭔가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 도움도 안 되었으면서 귄터와의 친분만으로 우리 전통가구와 협업을 하자고 제안하기에는, 내 얼굴이 그리 두껍지 않았다.

“학교에 공방을 만드는 거예요. 성훈 씨 학교에요.”

“엉? 우리 학교에?”

조용히 침묵했다.

‘총장이 만들려고 할까? 아무런 이득이 없는데?’

그가 남 좋은 일을 해줄 리가 없잖는가?

의문을 떠올리는 내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재능 기부의 형식으로요.”

나를 직시하며 눈으로 묻고 있었다.

‘내 방법이 어때요?’

“재능 기부?”

그 한마디에 감이 왔다.

장인들이 기부할 재능이 뭐 있겠나? 기술이지.

‘크. 나하고 똑같은 방법을 쓸 모양이네.’

나는 총장과의 거래를 통해, 대목장 휘하의 장인들을 학교에 교수진으로 등록시켰다.

가진 기술을 전수하고,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너희 회사 장인들을 우리 학교에 넣으려고?”

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네.”

독일 본사의 지원을 최소화하고, 자력으로 해외 공방을 유지하기에는 좋은 방식이었다.

장인들이 학생을 가르치고, 우수한 학생들을 자신들이 영입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인재를 공급하고 작품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렇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옳다고 봐.”

“네. 장인들을 자급하기 전까지는 작품을 조금만 만들어서 판매하면 돼요.”

“그렇지. 무리한 확장은 위험해.”

그동안 구매자들의 취향 조사와 현지화에 대한 전략을 짜면 될 것이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그녀가 새롭게 느껴졌다.

“생각 많이 했네. 고생했어.”

내 칭찬에 그녀의 얼굴이 발그스레 달아올랐다.

“한 교수님이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그래?”

한 교수가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며,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사람을 고생시켰으면 편하게 쉬기나 할 것이지!

며칠 동안 정말로 한잠도 못 잔 사람 같은 몰골에 마음이 짠해졌다.

‘이러면 내가 갈굴 수가 없잖아! 쳇!’

그런 내 맘을 모르는지,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때요? 좋은 생각 아니에요?”

“응. 괜찮네. 공방의 현지화도 좋고, 굳이 모험을 할 필요도 없고.”

내 호응에 그녀가 방실방실 웃었다.

“그쵸! 콘셉트도 좋죠? 한국 전통장인과 독일 전통장인의 만남! 뭔가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개냥이가 있으면 이럴까?

‘한번 쓰다듬어주고 싶네.’

하지만 총장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총장이 내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않느냐고?

‘내가 대목장을 학교에 정착시키는데, 꼬박 일 년이 걸렸어.’

문제는 이제 내가 학교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만큼 총장을 견제할 사람은 한 교수인데…….’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자기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일로 총장과 마찰을 빚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천진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생각은 좋은데, 총장은 만만하지 않을 거야.”

그녀가 하얀 검지를 들고 좌우로 저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한 교수님께서 확실하게 지원해 주기로 하셨으니까요.”

순진한 생각을 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소피. 교수님이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 소피를 언제 봤다고.”

하지만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그쵸! 교수님!”

“으, 응. 소피 말이 맞아.”

애교 섞인 그녀의 말에 한 교수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로 소피를 돕겠다고요?”

그건 총장과의 대립을 각오한다는 말인가?

한 교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대책이 있으니 이러는 거겠지만.’

피곤에 쩔은 그의 수긍은 설득력이 부족했다.

소피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총장님이 인재 욕심이 많으시다면서요. 성훈 씨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장인 아저씨들 실력 좋아요.”

모를 리가 없잖아!

그녀 아버지의 공장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알겠던데.

고가의 기계장비들도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딱딱 맞아들어가는 장인들의 손발이 더더욱 인상적이었다.

또한, 지난 삶에서도 그들의 품질은 검증되었다.

귄터가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랬는데, 지금은 최고 마이스터인 그까지 합세했으니, 얼마나 더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인가?

“알아. 나도. 그중에서도 귄터는……. 정말 최고지!”

그녀를 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소피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고, 그 입술은 작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목마르죠. 성훈 씨. 뭐 마실래요?”

“아. 난 커피로 부탁해.”

“네. 커피 내려올게요. 교수님도요?”

“으, 응. 그래.”

소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씀 나누고 계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이 인간이 아무나 도와줄 사람이 아닌데?’

확인 차 물었다.

“교수님. 정말로 총장과 대립하실 거예요?”

내 말이 안 들리는지, 한 교수는 멍한 눈으로 탕비실로 향하는 소피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연 하늘빛 투피스 정장 아래로 늘씬한 다리가 보인다.

하지만 그가 그걸 보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퀭하니, 척 봐도 남자의 눈길이 아니었으니까.

한 교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부르르 몸을 떨더니 쓰러지듯 소파로 상체를 묻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우! 죽겠다. 진짜!”

그의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누구 앞에서 쇼하는 거야. 나는 밤을 꼴딱 세고 왔구만!’

그에게 말했다.

“교수님!”

“응. 왜?”

“어제는 말씀 잘하시던데요!”

“응? 어제? 무슨 일……. 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게 그가 힘없이 웃었다.

“그 때문에 제가 어제 얼마나 고생을…….”

그는 정말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물만 글썽거리지 않았을 뿐.

“내가 잘못했어.”

엇!

한 교수가 이렇게 쉽게 잘못을 시인하다니.

‘이럴 사람이 아닌데?’

걱정이 되어 물었다.

“혹시 뭐 잘못 드셨어요?”

“어제 너 간 뒤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다. 커피 말고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정오를 넘어 오후 세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한 교수가 머리를 푹 숙이며 뇌까렸다.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까지 자책하실 필요는…….”

“차라리 내가 갈 걸. 잘못했다고. 젠장!”

이게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무슨 말만 하면 맞다고만 하고.

‘이게 내가 알던 영민한 한 교수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도 힘들었음을 호소하고 싶었다.

‘어제 얼마나 약이 올랐는데!’

얼굴을 굳히는 내게 한 교수가 말했다.

아주 불쌍한 뭔가를 보는 눈빛으로.

“성훈아!”

“네!”

한 교수가 말했다.

“너 쟤랑 결혼하면 고생 좀 하겠다!”

확신에 가득한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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