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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298화 (298/427)

건축의 신 298화

졸업작품(08)

그 말에 사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 그냥 해본 말일세.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정색하면 내가 더 무안하지.”

하지만 최 팀장은 진심이었다.

“음, 그게…….”

“녀석이 간단한 일이라고 하지 않나.”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사장이었다.

김 대리가 침음성을 흘리는 팀장을 거들었다.

“저게 보기만큼 쉬운 일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장님.”

“왜 그렇게 말을 하는가?”

그의 말에 최 팀장이 답했다.

“지금 저 친구는 사진 같은 이미지를 그리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거든요.”

최 팀장은 성훈의 그림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허! 간단하다고? 그건 자네 기준에서 그런 거지. 이어받아 그리는 입장에서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고.’

팀장의 설명에 사장은 다시 한 번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잠시 후 사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군. 자네 설명을 듣고 나니, 왜 빠져들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알겠어.”

최 팀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사진처럼 그리라면 오히려 쉽습니다. 저런 그림이 의외로 신경이 더 많이 쓰이는 법이죠.”

“음. 그래서 긴장하는 거로군. 내가 그림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몰랐구먼, 속없는 말을 해서 미안하이. 어쨌든 최선을 다해주게.”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성훈의 말마따나 문양 몇 개 그리는데 저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하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자로서 남의 그림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칫 실수하면 본질과 특이성을 해쳐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같은 경우는 성훈이 사장에게 그림을 의뢰받은 것이고, 사장의 허락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최 팀장이 마음을 정했다.

“김 대리, 한번 해보자고.”

“네, 팀장님.”

팔레트를 들며 팀장이 말했다.

“그 전에 물감 색깔부터 맞춰서 연습 좀 하고 시작하자.”

그가 빈 캔버스로 눈짓했다.

김 대리가 붓질을 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성훈은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 또한 성훈의 모습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 그림을 좀 다운그레이드시킬까 고민했었어요.”

팀장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운그레이드시키는 건 간단하다.

어울리지 않은 점 몇 개만 찍어주면, 지금까지의 노력을 모두 허사로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막상 그림을 대하니까, 그런 생각이 안 들지?”

김 대리도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팀장님도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당연하지, 임마! 뒷감당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지만…….”

팀장은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작품이 무슨 죄가 있냐? 명작은 명작으로 남아야지. 안 그래?”

“네, 이걸 망쳐서는 이 작품에게 면목이 안 서겠죠.”

팀장이 작은 소리를 그를 다독였다.

“그래, 그런 마음이면 되는 거야. 걱정 마! 어차피 이거, 이 느낌 그대로 살리는 건 불가능해. 이 느낌은 꿈에서나 즐기라고 해.”

꽃의 생애 중 가장 아름다운 일 초를 그려놓고, 그걸 영원히 유지하라고 하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것이다.

다른 누가 와도 이걸 현실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게 설령, 성훈이라고 해도 말이다.

두 남자가 비장한 마음으로 붓을 들었다.

적어도 이 작품에 누가 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

한 면의 통유리창으로 어슴푸레 햇살이 비쳤다.

사장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보았다.

‘5시 30분! 시간 가는 줄 몰랐네.’

성훈은 그림에서 붓을 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조명과 햇살이 만나는 곳, 거기에 성훈의 작품들이 줄지어 나열해 있다.

자연광이 없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

사장이 눈으로 작품들을 훑었다.

온화한 느낌이 일렁거리는 거실.

안락한 소파와 은은하게 세월을 뿜어내는 거실장, 거기에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까지.

인테리어 투시도에 사람이 있을 리 없다.

‘허,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그림 속에 아내와 세 아들, 그리고 딸까지도 모두 오버랩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저 소파에 앉아 있군.’

바쁜 일정 속에서도 가족을 챙기려 노력했지만, 그게 어려워 항상 미안했었는데, 저기에는 아내와 자식들, 온 가족의 호흡이 느껴졌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서려 있었다.

‘나만 그런가?’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 또한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피곤함에 지친 몸을 당장에라도 저 소파에 누이고 싶었다.

‘분위기 제대로네. 제대로 살렸어.’

주방으로 눈을 돌렸을 때는, 요리 백치인 그의 아내가 자신을 보며 환히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하얀 앞치마를 걸치고 요리용 나무젓가락을 든 모습 말이다.

코끝에는 생크림이 묻어 있고, 앞치마에 스파게티 면이 붙어 있는 거로 봐서는 아마도 크림 파스타를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신혼 초에 저렇게 만들어 준다고 난리를 쳤었는데. 그게 벌써 30년 전이네.’

그렇게 안방과 서재, 아들과 딸의 방을 모두 훑었다.

가슴에서 뭔가 울컥하고 치밀어올랐다.

‘작품이란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몸을 감싸는 아우라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성훈이 그림들을 바라보고 한 걸음씩 물러나며 체크를 하다가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지 뒤돌아섰다.

“사장님! 끝났습니다.”

사장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음, 고생했네.”

“마음에 드십니까?”

“그래, 정말 마음에 쏙 들어.”

성훈이 웃으며 말했다.

“네, 그럼 됐습니다. 거기 두 분도 수고하셨어요. 덕분에 시간에 맞춰 끝낼 수 있었습니다.”

성훈의 감사에 최 팀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우리가 뭐 한 게 있나? 나도 좋은 구경할 수 있어서 기뻤다네. 오히려 자네 실력이 너무 좋아서, 혹시 그림을 망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네.”

칭찬의 말에 성훈이 환히 웃었다.

사장의 칭찬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이건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거든.’

그동안 그릴 일이 없으니, 확인할 수 없었던 그림 실력에 확신이 생겼다.

팀장에게 오히려 감사했다.

“아뇨, 실력이 있으신 분들이라서, 손댈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사장을 바라보며 성훈이 말을 이었다.

“역시 현재는 다르네요. 저런 분들도 많이 계시고.”

“그래, 우리 현재 건설이 이 정도야.”

“상여금 좀 챙겨 주셔야겠는데요?”

성훈의 너스레에 사장 빙긋이 웃었다.

“어련히 알아서 할 테니,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자네는 언제쯤 입사할 생각인가?”

“음, 당장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당분간 급한 일은 없었다.

한 교수에게도 이걸로 졸업작품을 대신하기로 약속했으니 말이다.

“너무 기다리게 하지는 말게. 자네 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이미 성훈의 현재 입사를 확신하는 사장이었다.

성훈이 물감 범벅이 된 손을 보며 말했다.

“손 좀 씻고 올게요.”

“훗. 말 돌리기는. 그러게나.”

성훈이 사라지고 사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최 팀장, 이거…… 만들 수 있겠나?”

아무리 경영을 전공했고, 현장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최 팀장은 잠깐 망설였다.

해보겠다는 말과 못한다는 말은, 그 어감이 다르니까 말이다.

오너의 마음에 들려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사장님도 눈치를 채셨으니 이렇게 물어보시는 거겠지.’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확실히 선을 그어야지, 어설프게 호기를 부릴 일이 아니었다.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

최 팀장이 마음을 굳혔다.

“아쉽지만, 똑같이는 불가능합니다.”

단언하는 팀장의 말에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런가?”

스스로도 의문이 들어 물었던 것이니,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 자네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겠지.”

사장의 말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현재 건설에서 최고 디자인 실력자가 하는 말이었다.

안 된다는 말을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려움도 아니고, 불가능을 말하고 있었으니.

실망하는 사장에게 최 팀장이 말했다.

“물론 성훈 군이 직접 한다면, 좀 더 이 분위기를 살릴 수는 있을 겁니다.”

“응? 그건 왜?”

최 팀장이 그림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 그림으로 판단하건대, 저 친구는 그림뿐만 아니라, 건축디자인과 가구에 대해서도 꽤 수준이 높을 거라 생각됩니다. 깊은 이해 없이, 겉모습만 흉내 내서는 이런 그림이 나올 수 없으니까요.”

“음. 그건 자네 말이 맞아.”

성훈이 일하는 것을 몇 번이나 지켜본 사장이 아니던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장이 말을 이었다.

“맞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도 우리 회사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건 좀 의외인걸?”

최 팀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계통이든 실력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경력자에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사장이라면 더더욱 그럴 테지.

“그가 원 창작자니까요. 자기 머리에 있는 이미지를 바로 구현하는 것과 우리처럼 그림을 해석해야 하는 건 처음부터 이해도가 다르겠죠.”

“흠, 말은 되는군.”

이러면 방법이 생기는 것 아닌가?

이런 작품을 실제로 인테리어 할 수 있다면, 돈은 그다음 문제가 될 것이다.

‘얼마든지 팔아먹을 자신이 있다고.’

사장은 살짝 희망에 부풀었지만, 최 팀장은 매정하게 희망을 잘랐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완벽하게는 불가능할 겁니다. 판타지를 현실로 구현한다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저 느낌은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확신의 말에 사장이 수긍했다.

함부로 확신하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단정할 정도면 방법이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사장이 말했다.

“거기까지는 안 돼! 우리도 자존심이 있지!”

무릉도원을 그려줬는데, 그걸 만들어 달라고 해서야 어떻게 면목이 설 것인가?

최 팀장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런데 사장님, 저 친구가 정말 우리 회사로 들어오는 겁니까?”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그럼 빨리 따로 팀을 하나 만들어야겠군요.”

“응? 왜?”

“저 정도 실력이라면, 당장에라도 써먹을 수 있습니다. 굳이 사원부터 시작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의 등장은 디자인 팀의 실력과 실적을 대번 올릴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사장은 확답을 줄 수 없었다.

“모르지. 녀석이 자네 쪽으로 갈지 아니면 현장으로 갈지.”

최 팀장이 정색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회사에 들어오면 당연히 사장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모든 사회생활의 기본이 아니던가!

그건 최 팀장의 입장이고, 사장은 달랐다.

‘월급을 받으려고 여기 오는 놈이 아니라고!’

그러니 당연히 회사에 얽매이기보다는 회사를 제 목적에 맞춰서 써먹으려 하겠지.

‘그래, 뭐가 됐든 좋다 그거야.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되기만 하면 돼!’

디자인 팀으로 가든, 현장으로 가든 일만 잘하고 매출만 올리면 되는 거였다.

“그런 게 있어.”

성훈이 손을 씻고 돌아왔다.

“어! 곽 이사님도 계셨네요.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제가 갈 때 연락드린다고 했는데.”

“아! 혹시 아직 안 갔나 하고 들러봤다네.”

곽 이사가 속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이 새벽에 잘도 전화하겠다!’

“하실 말씀이 뭔데요. 지금 하세요. 이제 슬슬 나가 봐야 하니까요.”

서 전무가 알래스카에서 복귀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할 참이었다.

그 인간이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끈질긴 인간인지도 말해 둬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졌지.’

사장의 행동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뒤에서 버티고 있는 한, 아무도 못 건드리지. 절대로!’

“아니네, 별로 급한 일은 아닐세. 바쁠 텐데 다음에 얘기하지.”

성훈이 인사하며 돌아섰다.

“사장님,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밤을 새기는 했나 싶을 정도로 쌩쌩한 성훈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고민이 기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서 전무! 잘못 건드리면 영원히 알래스카에서 머무는 수가 있어!’

한 번 보냈는데, 두 번은 못 보내랴!

***

그날 업무가 끝날 무렵.

“김 비서, 저 꽃 그림 치워 버려.”

사장의 손에는 성훈의 그림을 표구한 액자가 들려 있었다.

비서가 경악하며 물었다.

“네? 저 그림은 삼천만 원이나 주고 사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장이 말했다.

“건설회사 사장실에 말이야. 이런 그림이 걸려 있어야지. 꽃 그림이 어울리기나 해?”

“하지만 굳이 그런, 끽해야 학생놈이 그린 싸구려 인테리어나…….”

그는 이 작품의 가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사장이 김 비서를 보며 웃었다.

“이건 장당 일억짜리라네. 저런 꽃 그림 따위와 비교할 게 아니지.”

김 비서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네? 일억이요? 그럼 도합 육어…….”

“그래, 육억이야. 그 가치에 어울리는 액자로 표구해서 걸어 놓아주게.”

김 비서가 꽃 액자를 치우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매번 투덜거리던 녀석이, 오늘은 고분고분하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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