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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297화 (297/427)

건축의 신 297화

졸업작품(07)

한편 성훈을 기다리다 지친 곽 이사가 사장실 앞을 서성거렸다.

‘왜 아직 안 나오는 거지? 전화를 해볼까?’

하지만 아직도 사장과 면담 중이라면 큰 실례가 될 터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데, 사장실로 들어오던 김 비서와 마주쳤다.

“곽 이사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 김 비서님, 성훈 군이 사장님을 만나 뵈러 들어갔는데, 혹시 아직도 상담 중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사장과 성훈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곽 이사가 있다면 더 분위기가 부드러워질 것이 뻔했다.

‘곽 이사는 당연히 사장님 편을 들어주겠지.’

속으로 계산을 마친 김 비서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면담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실 게 아니라 같이 들어가시죠.”

“아! 그럴까요.”

***

김 대리가 감탄하며 말했다.

“와! 팀장님, 아까 하셨던 말 취소하셔야겠는데요?”

뜬금없는 그의 말에 최 팀장이 물었다.

“내가 아까 무슨 말을 했는데?”

“만용이라고 따라 하지 말라고 했던 말씀요.”

“아! 그게 왜?”

팀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건 만용이 문제가 아니라, 따라 할 수도 없겠는데요?”

그 말에 최 팀장이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어쨌거나 따라 하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잖아.”

김 대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긴 그렇네요.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요.”

안 하나 못하나 결과는 매한가지, 뭐가 다르랴?

속 좋은 웃음을 짓는 그에게 최 팀장이 물었다.

“자식아, 넌 질투도 안 나냐? 딱 봐도 너보다 어린 것 같은데.”

“질투요? 그것도 수준이 비슷해야 가능한 거죠.”

성훈의 그림에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따라갈 수도 없는데, 무슨 질투를 합니까? 그냥 동경이죠. 전 저 친구 머릿속에 한 번만 들어갔다 나와 봤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왜?”

“무슨 생각을 하면, 저런 디자인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대범한 후배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훗. 그래. 그래야 성장할 수 있는 거지.’

스승을 질투하는 제자가 어디 있으랴!

하기야 애초에 질투할 거라면 제자로 들어가지도 않겠지만.

인간에게는 누구나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가 있고, 그것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있다.

닿을 듯 말 듯 약 오르는 거리라면 신을 원망하게 된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대상이 아예 가늠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면 인간은 동경할 수밖에 없다.

지금 김 대리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동경이리라.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사장은 속으로 한숨을 놓았다.

‘녀석이 들어오면 분명 충돌이 생길 거라 예상했는데, 적어도 큰일은 안 생기겠군.’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장담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겠지만 적어도 최 팀장의 마인드라면 최소한의 조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

이 생각에는 그가 아는 성훈의 성격도 한몫을 했다.

일에 대한 진지함도, 함께 일하는 자들에 대한 배려도 봤으니 말이다.

‘녀석의 배려가 없다면, 박람회의 그 작품은 태어날 수 없다고.’

성훈은 팀을 아우르는 그만의 방법이 있었다.

50명을 한 팀으로 묶으면서,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으랴!

‘하지만 녀석은 그 50명의 팀원이 자기만 바라보게 만들어 놨다고.’

어지간한 역량으로는 5명도 끌고 가기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

“김 비서, 바로 퇴근하지 그랬어?”

업무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장실에 돌아온 김 비서를 보며, 사장은 눈길을 피했다.

분명 잔소리를 할 테니까.

잔소리하는 직원은 다른 곳으로 내치면 되겠지만, 매번 바른 소리를 하는데 무슨 명분으로 내친다는 말인가?

비서실의 인사이동은 바로 왕 비서에게 보고되고, 그건 바로 왕 회장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 잔소리 정도가 아니라, 불호령이 떨어진다.

‘기업을 운영하는 놈이! 그 정도 충언을 못 참아? 그래서야 네놈 주변에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라도 남아 있겠어? 간신배밖에 안 남을 거다. 멍청한 놈!’

후계 구도에서 멀어지는 것은 정해진 수순!

언제나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다.

김 비서가 조용히 사장에게 다가갔다.

그의 접근을 외면하며 사장이 말했다.

“지금은 잔소리 듣고 싶지 않네.”

아이처럼 투정하는 소리에 김 비서가 은근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사장님의 깊은 뜻을 몰라 오해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장은 ‘이게 무슨 말이야?’ 싶었지만 당황한 표정을 숨겼다.

무슨 말이냐 물어보고 싶지만 의도를 모르는 그로서는 시치미 떼는 것이 최선의 대응이었다.

“흠. 괜찮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게.”

“저 안전모 녀석을 잡아야 한다고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말입니다.”

그는 왕 비서와의 대화를 조용히 털어놓으며, 사장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거 참! 내 의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의 과도한 존경심도 부담스러웠다.

“이제라도 알아주니 고마우이.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자네에게 말하기도 부담스러워서 말이지. 그동안 자네가 좀 바빴나.”

“이제부터라도 더 철저히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김 비서에게 물었다.

“아직도 저 녀석, 성훈이가 싫은가?”

현재 건설에 들어오기만 하면, 외근 현장으로 보내버릴 거라며 흥분하던 김 비서가 아니던가?

김 비서는 각오를 다진 눈빛으로 말했다.

“네, 여전히 싫습니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양쪽으로 말아 올려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대계를 위해서 자존심 굽히는 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겠나?

사장이 회장이 될 때, 자신은 왕비서가 될 터!

사장이 기업을 책임지는 자리라면, 왕비서는 사장을 보좌하는 비서들에게는 최고의 자리가 아니던가?

계열사 사장들이 왕 비서 앞에서 함부로 경거망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죽기 전에 왕 비서 한번 되어 봐야지 않겠어?’

사장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고마우이. 내 자네의 충심 잊지 않겠네.”

***

사장은 성훈의 그림에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누워 있던 그림의 벽들이 일어나고, 뒤따라 가구들도 일어나 앉았다.

원래 그곳에 존재했던 것처럼 편안한 배치였다.

달이 기울어감에 따라 그림은 점점 사진처럼 변해 간다.

사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붓의 터치에 따라 생동감이 더해진다는 것.

세밀한 붓끝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머리가 맑아진다.

‘햐! 비현실적이야! 정말 저렇게 만들 수만 있다면…….’

하지만 최 팀장은 마냥 행복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저게 불가능하다는 거지.’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고가의 가구를 처넣고, 장인의 물건들로 도배해도, 저 그림에서 풍기는 느낌을 온전히 살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최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건축을 하랬더니, 저 친구 혼자서 예술을 하고 있군.”

김 대리도 진지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저 느낌의 십 분의 일…….”

머리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백 분의 일이라도 살릴 수 있을지…… 전 도저히 장담을 못하겠는데요.”

“그렇지?”

“하지만 사장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시는 것 같던데요?”

최 팀장이 옆머리를 마구 긁었다.

“그러니까 내가 머리가 아프지.”

“저 친구, 어디까지 하고 간대요?”

김 대리의 말에 최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투시도만 그리고 간단다.”

“그래서 그렇구나.”

“그래서 그런 거지.”

성훈은 자신이 직접 만들 생각이 없으니, 맘껏 그리는 거였다.

직접 만드는 것까지 해야 했다면, 절대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그림을 본 사람은 어떻게 인테리어를 해도 만족하지 못할 테니까!

“우리만 죽어나게 생겼네요.”

팀장이 김 대리를 따라 울상을 지었다.

“그러게…….”

아까 힐끔거리며 확인한 사장의 옆얼굴에서 그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무조건 만들고 말겠다는 사장의 확고한 의지를.

그래서 미리 말해주고 싶었다.

‘사장님, 이건 똑같이 못 만듭니다’라고.

판타지를 그려놓고 현실로 구현하라고 하면, 그건 불가능하다.

그림과 똑같은 규격의 가구와 장식으로 완벽한 건물을 만들어도, 절대로 저 느낌을 살릴 수 없다.

왜!

예술은 그런 거니까!

아니, 가능했던 사람이 하나 있기는 했지.

미치광이 예술가, 피그말리온이라고.

마음 같아서는 성훈의 손에 든 붓을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자네는 그려놓고 가면 끝이지만 저걸 만들어야 하는 사람은 우리라고!’

이미 이 그림을 본 사장이!

이미 정신은 꿈속에 가 있는 사장에게!

‘이건 안 되는 겁니다. 꿈에서나 보시면 됩니다!’

이런 말을 어떻게 하라고.

하지만 저 영악한 놈은 이미 선을 그었다.

자기는 투시도만 그리겠다고!

나머지는 현재 건설에서 알아서 하라고!

‘그러니 저기서 예술을 하고 있을 수 있는 거지.’

A3에 그려진 그림은 우기기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저렇게 입체감과 색감을 살려놓은 상황에서는 어떤 변명도 먹히지 않는다.

“팀장님, 안 된다고 말씀드리면…….”

팀장이 김 대리의 입을 막으며 작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닥쳐! 네가 말할 거야? 자식아!”

***

어슴푸레 동이 터오는 시각.

그림에 집중하고 있던 성훈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장님, 아무래도 6시까지 끝내기 힘들 것 같은데요.”

사장이야 급할 것이 없었다.

‘아침 회의? 미루면 되지! 이런 작품은 평생에 한 번 만나는 것도 어렵다고.’

“괜찮아, 시간은 많아.”

대수롭지 않은 사장의 대답에 성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가 사장님 때문에 그럽니까? 제가 울산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서 그렇죠!”

무안해진 사장이 얼굴을 붉혔다.

“허허허! 그런가? 데이트 약속이라도 있는 모양이로군.”

“그러게요. 귀찮아 죽겠습니다.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고. 참!”

“큭!”

김 비서의 얼굴이 깡통처럼 우그러들었다.

‘야! 이런 미친놈아! 네 데이트 약속이 사장님의 일정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냐!’

당장에라도 일갈하고 싶었지만 사장의 손이 먼저 김 비서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이제 거의 끝나가! 제발 저놈 성질 건드리지 마! 제발!’

사장이 간절한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기분 나쁘다고 성훈이 대충대충 그려 버리면 피해 보는 사람은 사장이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작품이 나왔는데, 이게 용두사미가 되어 버리면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60억을 줘도 아깝지 않을 작품이 나왔는데…… 망치면 김 비서, 너부터 죽여 버릴지 몰라!’

이건 항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훈이 ‘이게 원래 의도였다!’ 그렇게 우기면 아무도 할 말이 없으니까!

창작자가 그렇다는데, 누가 딴죽을 걸겠는가?

‘거기다 더 중요한 건, 대안이 없다고.’

말 그대로 머리에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성훈의 말을 부정할 방법이 없었다.

김 비서가 부들거리는 손을 허리 뒤로 감춘 채,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달라는 말인가? 성훈 군.”

“저기 저분들, 디자인팀에서 오신 분들이죠? 저분들께 도움을 청해도 될까요?”

“그래도 되는 건가?”

사장의 물음에 성훈이 답했다.

“네, 분위기는 다 살려놨고, 문양들만 조금 터치해 주시면 됩니다. 그게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막노동이거든요. 그동안 전 이 마지막, 안방을 마감 지으려고요.”

사장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최 팀장? 가능하겠어?”

질문을 받은 최 팀장이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사장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저 그림을 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는 준엄한 물음이었다.

아니, 오히려 망치기면 가만 안 두겠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사장님, 저 그림대로는 안 나옵니다. 포기하십시오.’

팀장의 입안에 맴돌던 이 말이 목구멍으로 쑥 들어갔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 저도 모르게 대답이 툭 튀어나왔다.

“사장님, 제가 디자인 밥만 20년을 먹었습니다.”

당찬 그의 말에 사장이 움찔했다.

“어, 어! 그랬지. 미안하이.”

물러서는 사장을 보며, 팀장이 진중하게 말했다.

“이 느낌 망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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