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96화
졸업작품(06)
-사장님, 이제 나가십니까? 준비는 끝났습니다.
“엉? 무슨 준비?”
-경제인 연합회 만찬 말입니다.
“아! 그게 있었지.”
성훈과의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다음 일정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김 비서도 바로 그곳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사장의 얼굴에 주름이 파였다.
‘거기서 꼭 얘기해야 할 안건이 있었는데.’
하지만 그는 성훈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꼭 보고 싶었다.
연필로 그릴 때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는데, 녀석은 더 크고 멋들어지게 그리겠다고 했다.
이걸 어떻게 놓치란 말이야!
‘지금 못 보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단 말이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부사장에게 연락해서 나 대신 참석하라고 해.”
-네? 이번에 꼭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김 비서도 꼭 챙기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됐어. 내용만 전달하면 되는 거야. 내가 아니라도 된다고. 이럴 때 쓰라고 부사장에 앉혀 놨지. 자리 채울 사람이 없어서 부사장 시키는 줄 알아!”
도리어 역정을 내며, 통화를 끊었다.
***
정 비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왜 이러시는지 몰라.”
같이 있던 후임도 덩달아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요. 선배님. 아까 그 젊은이가 보통 사람이 아닌가 봐요.”
이렇게 말할 만한 것이, 부사장이 와도 30분 이상은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 사장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금으로 아는 사람이, 성훈이 들어가고 나서는,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그와의 대화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장 4시간 동안 말이다.
정 비서가 말했다.
“넌 김 비서님께 연락 드려. 약속 취소됐다고.”
후임 비서가 울상을 지었다.
“왕비서님 하고 만날 때 전화하면 화내시는데…….”
“문자로 넣어. 보시면 연락 주시겠지.”
아니나 다를까?
3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연락이 왔다.
-자네들. 일 그따위로 할 건가?
“그게 아니라, 사장님께서…….”
-이게 얼마나 중요한 모임인지 알면서, 그걸 설득을 못 시킨단 말이야?
사장의 일정이 어긋난 것에 대한 질책으로 그의 말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일의 경중을 몰라? 안 가시겠다는 이유가 뭐야?
정 비서가 울상을 지었다.
‘왜 내가 혼나야 하느냐고.’
하지만 곧 숨을 크게 쉬고 말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자네. 그걸 지금…….
김 비서의 불호령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재빨리 경위를 보고했다.
“U대학에서 김성훈이라는 학생이 왔습니다. 그 이후로는 모든 약속을 취소하시고, 차 심부름만 시키고 있습니다. 그게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응? 김성훈?
“네, 그렇습니다.”
-알았네. 내 당장 회사로 복귀하도록 하지.
***
전화를 끊은 김 비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사장님이시군. 벌써 안전모를 잡을 생각을 하시다니.”
그가 왕비서를 찾았던 이유도 안전모에 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성훈을 잡으면 회장 지분의 10%를 준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던가!
아무리 들어도 헛소리였다.
‘어떻게 사람 하나에 경영권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냐고!’
그러나 그 말의 근원지가 왕회장이었다.
사실 확인이 끝나야, 뭔가 계획을 세울 터.
왕비서가 말했었다.
‘자네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 믿기 어렵겠지만, 모두 사실일세.’
그 말에 잠시 다리가 휘청거렸다.
‘회사에만 입사하면, 외진 현장으로만 굴리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가 성훈을 얼마나 미워했던가!
그런데 이제 성훈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허나 자신의 감정보다 모시는 자의 미래를 생각해서 움직이는 것이 충신이라 했다.
“이런 걸 보고 이심전심이라 하는 거지.”
사장은 그가 조언하기도 전에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이 얼마나 믿음직한 상관인가!
흐뭇한 얼굴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장님. 제가 갑니다.”
성훈이 어떤 미운 짓을 해도, 웃는 얼굴로 받아주리라.
입술을 오물딱거리며, 룸미러로 얼굴을 확인했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미소가 거울에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
디자인팀 최 팀장이 물었다.
“사장님.”
“응. 왜 그러나?”
그림 그리는 성훈을 뚫어지게 지켜보던 사장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괴물이네요.”
그 질문에 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훗! 자네가 봐도 그렇지?”
사장은 웃음기를 머금었지만, 팀장은 진지했다.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입니다. 저 정도 실력이면, 미술 쪽에서 벌써 이름을 날렸을 텐데, 저는 모르는 녀석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 그 정도로 실력이 있다는 건가?”
자꾸 말을 돌리는 사장 때문에 팀장은 애가 닳았다.
“말씀 좀 해 주십시오. 하다못해 어느 미대를 나왔는지 만이라도.”
사장이 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 쓸 리가 없다는 확신에서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장은 팀장에게 빙긋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예상이 틀렸어!’라는 웃음을 띤 채.
“사장님. 자꾸 이렇게 놀리시기입니까?”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온다는 말인가?
미술로 유명한 H대를 졸업한 팀장이었다.
그림으로는 누구에게도 꿇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성훈은 차원이 다른 그림을 구사하고 있었다.
“저거 미술 하는 놈 아니야.”
“네?”
최 팀장이 놀라며 반문하며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은데요. 표현하는 방식도 그렇고. 전공자가 아니면…….”
“훗. 아니라니까.”
“말도 안 됩니다. 배우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안 그래? 김 대리?”
대답을 해야 할 김 대리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성훈의 그림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
아까의 상황이 떠올랐다.
성훈이 가져온 캔버스를 이젤(A 모양의 캔버스 받침대) 위에 떡 하니 걸쳤다.
그림 꽤나 그려본 듯,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화구를 건네주고 탁자 위로 눈을 돌린 최 팀장의 눈이 반짝거렸다.
“사장님. 이거……. 저 친구가 그린 겁니까?”
“응.”
“좀 봐도 될까요?”
“보는 건 좋은데, 상하지 않게 조심하라고.”
차마 6억짜리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팀장 연봉이 일억도 안 되는데, 얼마나 위화감을 느낄 것인가?
그저 ‘찢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나?’하며 속으로만 조바심 낼 뿐이었다.
최 팀장이 물었다.
“어때?”
“오! 실력 죽이는데요. 선이 두 번 간 곳이 없네요. 전부 한 번에 좍좍! 제대로 배웠네요.”
그림을 평가하는 김 대리에게 핀잔을 주며 말했다.
“이 친구야. 껍데기 말고, 알맹이를 보란 말이야. 이런 디자인 본 적 있어?”
“엇! 정말이네요. 삼박한대요.”
그리고 수다쟁이 김 대리는 말이 없었다.
‘그래. 할 말이 없겠지. 처음 보면 삼박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게 되니까.’
김 대리의 반응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오는 내내, ‘사장이 무슨 그림이냐!’며 투덜거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지한 분위기!
화구 정리가 끝났는지, 성훈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사장이 물었다.
“성훈 군. 이거 안 보고 그려도 돼?”
“네? 뭘요?”
“이 그림들 말일세.”
사장은 김 대리가 손에 든 A3용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나 싶어 힐끗 바라보던 성훈이 다시 캔버스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보고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는데, 그걸 봐서 뭐하게요. 시간만 더 걸려요.”
성훈의 말에 기가 찬, 김 대리가 물었다.
“팀장님. 저 친구 실력은 인정합니다만, 저게 가능할까요? 보지도 않고? 밑그림도 제대로 안 그리는 것 같은데.”
최 팀장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천재가 아닌 이상…….”
“그쵸? 기억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이걸 다 어떻게 기억하겠어요.”
6개의 그림은 모두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약간만 섞여도, 전혀 다른 느낌을 낼 터!
잠깐의 실수로 그림을 망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팀장이 말했다.
“김 대리.”
“네. 선배님.”
팀장과 같은 H대를 나온 김 대리였다.
그의 뛰어난 실력이 탐나서, 졸업하기도 전에 교수에게 부탁해 스카우트해 온 인재였다.
“저거 만용이야. 만용. 저런 건 배우지 마.”
김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저도 나름대로 실력 있다고 자부하는데, 그래도 저런 건 자신이 없네요.”
“그래. 자신의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할 줄 알아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는 거야.”
***
아까 성훈의 말에,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던가?
‘머릿속에 들어 있다고? 이 복잡한 그림들이?’
하지만 그 비웃음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왜?
이미 완벽한 그림 하나가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었거든.
물론 아직 채색이 남았지만, 성훈은 자신의 말대로 이 여섯 장의 그림을 모두 머리에 외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손놀림이었지만, 컴퓨터처럼 정확하게 여백을 채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는 절대 할 수 없는 것!
원판의 그림보다 더 풍부한 선으로 거실의 분위기를 농밀하게 살려내고 있었다.
이러니 성훈에 대한 평가가 바뀔 수밖에.
건방진 놈에서,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 놈으로.
팀장이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실력에 대한 순수한 감탄이었다.
“아까 안 보고 그린다고 했을 때는, 젊은 녀석의 치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사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흐뭇하게 웃었다.
“녀석은 확신 없이 함부로 말을 내뱉는 놈이 아니야. 암! 저놈이 어떤 놈인데.”
아무래도 사장은 그를 잘 아는 것 같았다.
궁금해서 몸이 단 팀장이 물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저 괴물 같은 놈, 정체가 도대체 뭡니까?”
대답이 궁해진 사장이 말을 얼버무렸다.
“글쎄…….”
성훈의 정체는 명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보에 확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의 사람이라면 저게 불가능하거든.
똑같이 U대학을 나온 녀석들 중에, 성훈만한 놈이 있었느냐 말이다.
이건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저놈이 난 놈!’이라는 결론밖에는 나올 게 없었다.
“천재가 아닐까?”
학생이 학생 같아야, 학생이라고 말하는 거다.
과연 이 바닥에서 날고 기는 최 팀장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학생이 있을까?
또한, 배움 중에 있는 자를 학생이라 하는데, 저게 어딜 봐서 배워야 할 놈인가?
“말씀하시기 곤란하시면, 어느 분께 사사했는지라도 힌트라도 주십시오.”
가르침의 계보를 따져 보면, 그 실력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예체능 쪽에서는 누구에게 가르침 받았는지가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던가?
좋은 스승 아래에서 좋은 인재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었고, 비록 천재라 할지라도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 갈고 닦지 않으면, 범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정론이었다.
그래서 스승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고, 한 번 레슨에 수십 수백만 원을 들여가며 과외 수업을 받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사장은 딱히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말을 찾지 못했다.
아는 한도 내에서 말해 줄 수밖에.
“저놈 건축학도야. U대학. 3학년. 이제 졸업반으로 올라가지. 아마.”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팀장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울산에 있는 그 U대학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혹시 어릴 때, 해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든지…….”
그는 말을 하다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20대 중반인 나이로 봐서 신빙성이 적었다.
또한, 그럴 정도의 실력이라면 지방에 있는 U대학으로 갈 리가 없지 않은가?
H대에서도 쌍수를 들며 환영할 인재였다.
장학금이 대수겠어!
그런데 그런 그가 고작 U대학이라니.
‘이건 뭔가 말이 안 되잖아.’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데, 무얼 물어본다는 말인가?
사장도 낌새를 눈치챘는지, 그에게 말했다.
“방금 말한 것, 그 이상은 나도 몰라. 그러니까 더는 물어보지 말라고.”
이제 스스로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끄응.”
바둑은 기풍을 보면 알 수 있고, 음악은 특정 습관으로 알 수 있다.
미술도 화풍을 보면, 대충 가락으로 때려 맞히는데, 이건 밑도 끝도 없는 제멋대로 기법이니…….
말없이 옆의 김 대리를 바라보았다.
“선배님. 저도 이것만큼은 모르겠습니다.”
물어보기도 전에 대답하는 김 대리였다.
“휴! 그래. 일단 지켜보자고. 단서가 나오겠지.”
한숨 쉬는 팀장을 보며, 사장이 조용히 웃었다.
‘나중에 자네들이랑 같이 일하게 될 거야. 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