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295화 (295/427)

건축의 신 295화

졸업작품(05)

“이제 공간이 바뀌었으니, 분위기도 한 번 바꿔 보시죠. 거실의 가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음……. 어떤 것 말인가?”

“소파는 가죽으로 하실 건지, 패브릭으로 하실 건지, 생각나시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여기 카탈로그에서 선택하셔도 좋고요.”

“손잡이처럼 자네가 그냥 그려주면 안 되나?”

“그것도 뭐 기준이 되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거기서 어떤 변형을 원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편이 시간이 훨씬 절약되니까요.”

“알았네.”

“그럼 저는 저대로 구도를 잡고 있을게요.”

사장이 생각하는 동안, 성훈의 손이 빈 종이를 가로지른다.

가는 선이 휙휙 몇 번을 지나가고, 빈방이 완성되었다.

한 교수의 도면에 따라서, 창과 복도로 이어지는 공간이 그려진다.

그리고 거실의 공간만 아래로 가라앉았다.

성훈이 물었다.

“이제 여기에 소파를 놓으실 거죠?”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어떤 소파를 놓아야 할지 난감하군. 조언 좀 해 주지 그러나?”

왜 그라고 계획이 없으랴?

허나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지, 넌지시 성훈의 속내를 캐보는 것이었다.

“가죽으로 하신다면서요? 여기 나와 있는데요?”

“응.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군.”

생각나는 게 없다는데, 어쩌겠는가?

성훈이 아이디어를 내는 수밖에.

잠시 생각을 하다가 성훈이 말했다.

“음. 그럼 패브릭으로 가시죠. 어중간하게 가죽으로 하면 졸부 분위기가 나거든요.”

“흠흠. 그렇지? 나도 그래서 말일세.”

순식간에 졸부가 되어버린 사장이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성훈은 그런 것에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하는데, 예전에 독일에서 박람회 할 때, 본 게 있거든요. 그 패브릭 문양이 정말 괜찮더라고요.”

“어떤 거기에 그러나?”

문양을 어떻게 말로 설명하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훈의 손이 거실에 소파를 그렸다.

그리고 세밀하게 문양을 새겨가기 시작했다.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사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훈이 그림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 박람회에 나왔던 업체를 찾아보세요. 그럼 금방 찾으실 거예요.”

“지금 그리는 것과 똑같은 소파였나?”

성훈이 사장을 힐끔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타박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똑같은 걸 만들 거면, 뭐하러 손 아프게 그림 그리고 있어요? 그냥 그거 사오라고 하죠. 그 회사의 패브릭은 좋았는데, 소파 프레임은 영 아니었거든요. 패브릭만 구입하시면 돼요.”

“응. 그러지. 그럼 이 프레임은 어디서 사들이면 되나?”

“이건 파는 데가 없을 거예요.”

“그럼…….”

“주문제작 하셔야 돼요. 저 아는 분 중에 가구 회사 사장님이 계시니까, 그분께 제가 따로 주문 넣어 드릴게요.”

“그분이 누군데?”

“어쩌면 아실 수도 있겠네요. 예전에 압둘에게 팔았던 몰딩 있죠? 그거 만들었던 업체예요.”

“아! 민수 학생 아버님?”

“네. 맞아요. 작은 회사지만, 물건은 제대로 만들거든요. 믿고 맡길 만합니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나도 그 회사 품질은 잘 알지. 압둘 왕자도 아주 만족했었으니 말일세.”

사장이 민수를 아는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성훈은 그림을 그리는 데만 신경을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종이를 꺼내서, 박람회의 일시와 관련된 정보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넣었다.

사장은 의문이 들었다.

녀석이 말하는 것마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분명 한국에서만 공부한 것으로 아는데?’

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여행 한 번 다녀와서 이 정도의 지식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다른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글로 배웠다고 하기에는 깊이가 너무 깊었다.

그가 알기에 성훈은 전통건축에 조예가 깊었다.

과연 한 사람이 여러 가지를 통달하는 것이 가능한가?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터리한일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사장이 결국 입을 열었다.

“성훈 군.”

“네. 생각나신 것 있으세요? 말씀하세요.”

그림에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성훈이 답했다.

“아니. 이건 다른 질문일세.”

질문하라며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의 손은 선 긋기에 여념이 없었다.

선 하나가 지나가면, 가구 하나가 완성된다.

‘말이 쉽지. 저게 가능한 일이냐고?’

그의 휘하에 수많은 디자이너가 있지만, 이렇게 수월하게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림만 십 년 이상 파고들어야 보일 수 있는 손재간이었다.

“자네, 혹시 유럽의 디자인도 공부한 건가?”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사장이 움찔했다.

“그래? 몇 년이나? 한국 아니, U 대학에서만 공부한 것으로 아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오늘부로 현재 건설 인사과장은 당장 목이 달아날 것이다.

‘그렇게 돈을 받으면서 일을 이따위로 했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지! 암!’

“아뇨. 두 달씩 두 번에 걸쳐 갔으니까, 한 넉 달 정도 여행했네요.”

“넉 달? 유학이 아니라, 여행을 했다고?”

일단 인사과장은 목숨을 건졌다.

성훈이 답했다.

“네, 그랬죠.”

성훈은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그림에 몰두하고 있었다.

건방지게 보일 만도 하건만, 사장은 그 모습이 전혀 밉지 않았다.

자신의 별장을 위해 열정을 쏟고 있는데, 그게 미우면 어떡하자는 말인가?

“그런데도 공부를 했다고 말하는 건가?”

“네. 공부한 거 맞는데요? 건축 공부하려고 유럽에 갔었던 거예요.”

“그래도 보통 공부라고 하면, 유학이거나 그런 걸 말하지 않는가?”

성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꼭 학위를 받아야 공부한 건가요? 여행하면서도 봐야 할 건 거의 다 보고 왔습니다.”

성훈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을 손으로 증명하고 있는 데야, 무슨 반론을 제기할 것인가?

저 그림에서는 한국 전통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있는 거라곤, 수백 년 묵은 듯한 오리지널 안티크의 모습뿐이었다.

사장이 성훈의 옆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거, 이거, 완전 괴물이잖아!’

사장의 머릿속에서 성훈의 가치가 재평가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그냥 탐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 보는 데는 아버지를 따라갈 수가 없군.’

아주 괜찮은 놈에서 아주 아주 괜찮은 인재로 각인되었다.

왜 성훈은 이런 말을 겁 없이 할 수 있었을까?

사장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성훈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 말이다.

성훈은 여행을 시작하는 출발점부터가 달랐으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가서 여행하면서 건축물을 돌아보는 것이었다면, 성훈은 애초부터 봐야 할 것들을 선별해서 갔다는 정도?

그러나 그 차이는 컸다.

거의 시간 낭비 없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유럽을 오가며 봤던 모든 것들이 성훈에게는 공부였다.

또 다른 점이 있었다.

첫 번째, 한 교수가 건네줬던 가이드북.

그걸 기초로 해서, 여행경로를 한 치의 낭비도 없이 짤 수 있었다.

두 번째, 어쩌면 이게 가장 큰 차이였을지도 모른다.

지난 삶에서 보아왔던 TV 다큐멘터리들.

건축에의 채워지지 않는 열정을, 그때는 TV로 풀 수밖에 없었던 성훈의 비애를 그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삶에서는, 시간 낭비 없이 핵심만 보는 눈을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

사장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스스로 눈이 높다고 자부했었는데, 지금 성훈의 손에서 나오는 것들은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니 생각조차 못 했던 디자인들이었다.

녀석은 보았던 것들을 변형시킨 거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는 도저히 그 원형이 뭔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촌스럽냐고?

무슨 소리를!

지금 당장 내다 팔아도, 충분히 고가에 팔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아까의 손잡이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이태리 장인이 직접 한다고 해도, 그런 디자인은 못 만들걸! 어느 하나 버릴 게 없잖아.’

스스로 고민이 되는 시점이었다.

‘얼마를 준다고 하면, 녀석이 팔까? 적어도 천만 단위는 아니겠지?’

천만 단위를 말하기에는 녀석의 스케일이 너무 컸다.

중동의 두 왕자가 성훈의 작품을 20억에 사네, 30억에 사네 하며 경쟁이 붙었다는 보고도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또 한 가지 걱정.

‘저작권은 분명히 안 판다고 할 텐데……. 모른 척 한 번 질러 봐!’

그가 아는 성훈은 징글맞을 정도로 저작권에 집착하는 인간이었다.

슬슬 머리가 아파져 오는 사장이었다.

허나 일회성으로 끝내기에는 아까운 작품들!

한편으로는 흐뭇하게 웃음이 지어졌다.

‘세산 권 사장! 네놈이 나한테 그렇게 자랑을 했었지!’

지난날의 부러움이 떠올랐다.

권 사장이 이태리 가죽 소파라고, 돈 주고도 사기 힘든 거라고 얼마나 자랑을 했던가!

‘그래 봐야 네놈은 졸부밖에 안 돼! 자식아!’

그의 눈앞에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아니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소파가 있었다.

이제 막 디자인한 걸, 어디서 산단 말인가?

‘다른 놈한테는 다 팔아도, 너한테는 내가 안 판다. 절대로!’

권 사장이 약 올라 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자긍심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유일무이한 디자인, 그게 내 별장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거라고.’

성훈의 질문에 답하는 사이,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성훈의 말마따나,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 거냐!’

가는 시간이 야속했다.

그리고 성훈의 그림도 거의 빈 곳을 찾지 못할 정도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6시가 되기 직전, 성훈이 마지막 그림을 완성시켰다.

그가 손에서 펜을 놓으며 말했다.

“사장님. 다 끝났습니다.”

“끄응.”

사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총 6장의 그림.

거실, 주방, 안방, 서재, 아들 방, 그리고 딸 방.

“아드님들은 각자 취향에 맞게 방을 꾸미라고 하세요. 세 개나 똑같은 방을 그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그렇지.”

사장이 말을 이었다.

“마음에 들어. 내가 지금까지 봤던 어떤 별장보다도 말일세.”

성훈이 탁자 위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얼마에 사시겠습니까?”

이제 거래의 시간이었다.

노동에 따른 대가를 받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사장은 난감했다.

‘이걸 얼마를 불러야 하느냐고?’

그러나 답은 의외로 간단한 법!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난 이런 걸 본 적이 없어서, 값을 못 매기겠군. 자네가 제시해 보게.”

이제 성훈이 고민해야 할 시간.

그러나 고민은 지극히 짧았다.

“원래 장당 일억씩 부르려고 했는데요. 반나절도 안 돼서 6억을 챙겨 가면, 도둑놈 소리 듣겠더라고요.”

“그래서?”

사장의 눈을 보며, 성훈이 말했다.

“거실 한 장에 일억! 나머지는 서비스로 드릴게요.”

재미있어 하는 눈빛이었다.

‘과연 사장이 어떻게 반응을 하려나?’

성훈의 협상에 사장이 피식 웃었다.

‘녀석! 날 간 보는 거냐?’

그가 누군가?

한국에서 돈질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 아니던가?

성훈의 눈을 직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훗! 서비스 필요 없어. 모두 제값 쳐주지. 이런 작품을 두고 깎아서야 체면이 안 서지.”

통이 커도 대단히 큰 인물이었다.

‘이 정도는 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지.’

현재에 들어오면 앞으로도 계속 볼 텐데, 쪼잔한 사장이라고 낙인찍히기 싫었다.

‘녀석에게 잘못 찍히면, 두고두고 회사 생활이 괴로워진다고.’

6배를 주겠다는데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빙긋이 웃고 있었다.

“후회 안 하십니까? 별장 설계비가 5억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후회는 안 해. 다만 아쉬운 건 있군.”

“뭡니까?”

“그 금액에 저작권은 포함되어 있지 않겠지.”

“네. 당연하죠.”

“저작권 판매를 고려해 볼 생각 없나? 적어도 20억 이상은 생각하고 있네.”

이 말을 하면서 사장은 성훈의 눈을 주시했다.

약간의 흔들림이라도 있다면, 더 큰 금액을 베팅해볼 생각이었다.

‘왜냐고? 이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거든.’

저 디자인을 자신이 아는 몇 명에게만 팔아도 본전 뽑는 것은 순식간이었으니까.

‘제 놈들이 이걸 안 사고 배기겠어? 흐흐.’

기대와 달리, 약간의 흔들림도 없었다.

‘젠장!’

성훈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저작권은 팔지 않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열 배를 주신다고 해도.”

파고들 여지조차 없었다.

‘2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젊은 놈이 무슨 욕심이 이렇게 없어?’

사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쩝. 역시! 그 고집이 어디 가나? 그럼 이제 퇴근하는 일만 남은 건가?”

성훈이 고개를 저었다.

“일억이었으면 맘 편하게 퇴근했겠지만, 이제 그것도 안 되겠네요.”

“그게 무슨 말인가?”

얼마가 되었든, 그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득 봤다는 느낌이 들게끔 해 줘야 한다.

‘그게 내 방식이지.’

성훈이 웃으며 말했다.

“나머지 오억만큼의 잔업을 좀 해야겠는데요? 혹시 디자인팀에서 그림 도구들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캔버스도 있으면 좋고요.”

“그건 뭐하러?”

“이건 아무리 봐도 6억짜리로는 안 보여서요. 아쉬움을 남겨서는 안 되겠죠. 좀 더 크고 멋들어지게 그려야 제가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사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는 돼야 나중에라도 돈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드실 거 아닙니까?”

“그런가? 하하하!”

더 크게 멋있게 그려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사장이 수화기를 들었다.

“디자인 팀장한테 그림 도구들 몽땅 챙겨서 여기로 오라고 해! 캔버스도 넉넉하게 가져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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