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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294화 (294/427)

건축의 신 294화

졸업작품(04)

신음성은 내뱉는 성훈을 보며, 사장이 고소를 짓더니 인터폰을 눌렀다.

“정 비서. 삼십 분 뒤에 이사회의 있지?”

-네, 사장님. 이미 이사들 참석 여부 확인 끝났습니다.

“그래? 미안한데, 내일 다시 모이라고 해 주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고.”

-네?

갑자기 스케쥴을 바꾸다니!

이런 일은 거의 없었으니, 정 비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됐으니까! 내일 일정 잡아.”

-네, 알겠습니다.

사장에게는 성훈에게서 어떻게든 디자인을 뽑는 것이 급선무였다.

겨우 잡아뒀는데, 회의를 다녀오면 이 녀석이 남아 있을까?

이사들은 다시 모이게 할 수 있지만, 성훈은 불가능했다.

짜증 난다고 울산으로 돌아가기라도 해 봐!

물론 전화로 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하면 지금처럼 쏙 마음에 드는 게 나올까?

‘절대 아니지.’

스스로 생각해도 확신할 수 없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이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물론 나중에 현재에 입사한다면, 항상 옆에 둘 수 있겠지만, 이놈이 어디 내 뜻대로 움직이는 놈이냐고?’

그는 당장 해치워야 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따뜻한 차 두 잔 부탁하네.”

-네, 알겠습니다.

성훈이 으르렁거렸다.

“차 말고, 냉수로 주세요. 냉수! 얼음 팍팍 채워서!”

***

가져온 얼음 냉수 한 사발을 들이켰다.

‘시원하네.’

차가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위장이 아릿하니, 짜르르 울려온다.

“후!”

사장이 빙긋 웃었다.

“이제 좀 속이 풀리나?”

“네. 냉수 먹고 속 차렸습니다.”

“미안허이. 자네를 놓칠 수가 없어서 그랬으니.”

그러며 사장이 말을 이었다.

“자네 시간에 대한 대가는 철저히 지불할 테니, 이번만 내 사정 좀 봐주게. 이런 작품이 나왔는데, 어떻게 내가 자넬 그냥 보내겠나?”

손잡이가 그려진 종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내게 미소를 보냈다.

‘그래! 이왕 하기로 결정된 것, 화를 내 봐야 변하는 건 없지.’

한 교수?

내려가서 응분의 보상을 치러주면 된다.

그래 봐야 잔소리하는 것뿐이겠지만.

허나 냉정히 보면 그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내 학교 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나를 전폭적으로 응원하는 사람이니까.

‘아버지나 형이 있었다면, 저런 느낌이겠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면, 단연 한 교수를 첫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충분한 보상을 지급하라는 조언을 덧붙였지만, 그건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뜯어낼 참이었다.

‘고작 일이백 가지고 생색내려고 하면 다 찢어버릴 테니까.’

일이백?

안 받아도 그만이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금액을 불러주지!

“그 말씀 잊지 마십시오. 제 몸값은 비쌉니다.”

사장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알지! 얼마를 부르든, 지불하지.”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가 갈등할 정도의 금액을 부르리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작품을 만들어야겠지.

‘크크크.’

속으로 웃음을 지으며, 사장을 바라보았다.

“시작하시죠.”

“역시 젊은 사람답군. 행동이 빨라.”

“어떤 타입을 원하십니까? 그냥 서양 중세풍으로 만들어 드리면 됩니까?”

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우리 가족들이 모두 취향이 달라서 말일세. 거실하고 안방은 완전 클래식 타입으로 갈 거고, 아들들 방은 모던 스타일, 딸, 우리 미현이 알지?”

“네. 알죠.”

“어떤가?”

“네?”

뜬금없이 자기 딸을 왜 나한테 물어?

“미현 씨가 왜요?”

심드렁한 내 대답에 사장이 물었다.

“여자로 어떤가 그 말이지.”

“좋은 여자 같더군요. 그닥 재벌 집 딸이라는 티도 안 내고.”

“그렇지? 내 딸이지만…….”

뭔가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분위기였다.

‘이럴 시간 없다고요.’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일 이야기를 마저 끝냈으면 합니다. 업무시간 끝나면 저도 내려갑니다.”

“응?”

되묻는 그에게 말을 이었다.

“그 전까지 안 끝나도 제 책임 아닙니다.”

내 타박하는 소리에 사장이 움찔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한 교수가…….”

그러니까 그 인간한테 따지러 가야 한다고.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을 때, 따져야 제맛이지.

타이밍 놓치면, 오히려 속 좁은 인간이라고 욕먹는다고.

한 번 식어버린 죽은 어떻게 먹어도 본래의 맛이 안 나는 법이다.

“그건 한 교수 말이고, 하고 안 하고는 제가 결정하는 겁니다.”

뜨끔하는 사장을 몰아붙였다.

“정 마음에 안 드시면, 한 교수 불러서 하십시오. 전 당장에라도 손 뗄 테니까.”

펜을 탁자에 툭 굴려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현재 건설 사장에게 큰소리쳐 보겠어?’

필요한 사람이 우물을 파지 않던가?

‘난 전혀 답답한 게 없다고.’

성훈이 튕기자, 사장의 태도가 돌변했다.

언제 딸 얘기를 꺼냈냐는 듯, 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이 주방은 말이야. 음. 내 안사람이 로코코 풍을 좋아해.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스레를 떠는 그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파는 놈이 갑!’

그건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거지.

성질 같아서는 당장 나왔어야 했지만, 한 교수의 체면과 사장의 부탁하는 얼굴을 봐서 남아 있는 거였다.

물론 한편으로는 작품을 만들고 싶기도 했고.

한 교수가 완전히 손을 들었으니, 기존의 디자인은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었다.

‘내 맘대로 인테리어를 언제 또 해보겠냐고?’

그리고 물주는 현재 건설 사장!

마음에만 든다면, 돈 아낄 사람이 아니었다.

자금 부족 때문에 품질을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지금은 하고 싶은 디자인을 마음껏 시험해 볼 기회였다.

그런 마음으로 사장의 건의사항을 모두 들었다.

사장의 말이 끝나고 성훈이 물었다.

“흠. 그런데 왜 주방과 거실의 대리석은 다른 색으로 하신 겁니까?”

굳이 이어지는 공간임에도 다른 색깔의 돌을 사용했을까?

이질감이 생길 여지를 줬기에 묻는 것이었다.

“공간 분할을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 그런 걸세. 나와 아내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싶었거든.”

남자와 여자의 동선이 다르니, 분위기도 다르게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설마 사모님이 요리를 하시는 건가?’

뭔가 쉽게 이미지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불가능은 아니지.

단지 이런 생각을 한 건, 드라마에 나오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주로 요리는 가정부 아줌마가 하지 않던가?

하지만 정말 안주인이 요리를 한다면?

그녀의 취향에 따라 주방도 바뀌어야 했다.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물었다.

“사모님께서 요리를 좋아하십니까?”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크. 그건 아니야. 하고 싶어는 하는데, 영…….”

“그럼 왜 이렇게 주방을 크게 하신 겁니까? 별로 쓸모도 없을 것 같은데?”

그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매번 아줌마가 해 주는 밥을 먹으니, 가끔은 아내가 해 주는 밥도 먹고 싶지 않겠나? 아니 그걸 떠나서, 사랑하는 아내가 주방에 있는 걸 보는 건, 모든 남자의 로망이라고. 가끔 가서 앞치마도 둘러주고, 설거지도 도와주고 말일세.”

그는 소박한 행복을 원하고 있었다.

하긴!

아무리 대기업의 수장이라고 해도, 집에서는 한 여자의 남편일 뿐이지.

결론은 그냥 이상적인 주방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거였다.

“그래서 사장님은 사모님께서 주방에서 요리하는 걸 보고 싶다! 그 말씀이시로군요.”

“그렇지. 그리고 주방을 아내의 공간으로 인정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구성이 평면적이라 좀 답답해 보이네요. 거기다가 대리석 색깔까지 바뀌니까. 어지럽기도 하고요.”

“하지만 어쩌겠나? 똑같은 대리석으로는, 거실의 연장으로 느껴질 뿐인걸?”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성훈이 물었다.

“그래서 공간을 색깔로 구분하셨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도면으로 볼 때는 다른 색깔이니, 더 명료하게 머릿속에 들어오겠지.

하지만 실제로 인테리어를 하고 나면, 그건 어색해지는 경우가 있다.

샘플 비교만으로는 실제 분위기를 완벽하게 떠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처럼 단색 톤이 아니라, 대리석 무늬가 있는 경우라면, 그 이질감은 더더욱 심해질 것이다.

‘이건 경험이 있다고 해도 자주 하는 실수거든.’

이미 결정하고 돌을 붙인 다음에는 되돌릴 수 없다.

물론 뜯고 다시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낭비가 될 터!

어차피 디자이너야 그 집에 살지 않으니 상관없을 수 있겠지만, 집주인은 그게 눈에 익을 때까지는 어색함을 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마저도 제거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대리석을 하나로 단일화하거나, 아니면 같은 느낌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둘 중에 마음에 덜 드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음. 꼭 그래야 하는 건가? 나는 둘 다 마음에 드는데. 주방에 들어가는 대리석은 뭐랄까……. 시원한 분위기를 주고, 거실 쪽은 크림색이라서 편안한 느낌이 들거든.”

어느 쪽도 포기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흠.”

공간을 색으로 구분하는 것도 방법이기는 하지만, 꼭 그것만 고수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더 세련된 방법도 찾아보면 많았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전 아무래도 색깔로 구분한다는 것이 좀 걸립니다.”

“다른 방법이 있는 건가?”

“거실과 주방의 높이를 다르게 하면 어떨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주방과 거실 사이에 단을 놓겠다는 말이죠.”

“응? 계단? 불편하지 않을까?”

“아뇨. 생각하시는 것처럼 불편하지 않습니다. 고작 두 계단이니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공간의 구분이 확실하게 생깁니다.”

사람의 감각이란 생각보다 단순해서, 단 차가 생기는 것만으로도 다른 공간으로 인식한다.

“아! 거실만 가라앉으면서…….”

“네. 주방과도 확실하게 분리가 되죠.”

단을 만드는 건 좀 귀찮은 과정이지만, 공간의 분할은 확실하게 될 터!

그에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대리석은 두 개가 다 마음에 드신다고 했으니, 모자이크식으로 정리를 해보죠. 색상은 잘 어울리니,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구성이기도 하구요.”

생각지 못했던 제안이었던지,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성훈이 말하는 거실의 이미지가 머리에 그려졌는지, 그가 눈을 떴다.

“흠. 괜찮은 방법이야.”

“이 방법은 현관과도 공간을 분리시키죠. 굳이 중문을 만들지 않고도, 다른 공간이라는 느낌이 드실 겁니다.”

“음. 그렇겠군. 자네 말이 맞아. 이렇게 하면, 굳이 다른 색깔로 할 필요가 없겠군. 확실히 눈이 편해질 것 같아.”

사장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었다.

“좋아! 아주 좋아! 이건 그렇게 가도록 하지.”

사장이 물었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한 건가?”

“예전에 그리스 대부호의 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응. 그런데?”

“700년 정도 된 집이었는데, 그 집 인테리어가 아주 고풍스러운 분위기더라고요.

사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700년?”

“네. 그 지방에서 조상 대대로 터를 잡아왔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당연히 그런 분위기가 날 수밖에 없었겠죠.”

“오! 700년이라니,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군.”

“네. 그래서인지, 집안 분위기가 고전적이었죠.”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던가? 귀족 가문이라도 되나 보지?”

성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거기까지는 잘 모릅니다. 물어보기가 뭐해서요.”

마피아 집안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때 인상적으로 머리에 남았던 게, 거실과 주방의 분할 방법이었습니다. 똑같은 대리석을 썼는데도, 다른 공간 같은 느낌이라, 자세히 봤더니 단차가 있더라고요. 그리고 불편하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그렇지도 않았고요.”

“음. 그래서 불편하지 않다고 확신했던 거군.”

“네. 맞습니다.”

“그럼 시작해 봄세.”

사장의 말에 성훈이 제동을 걸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가 해드리는 건 디자인까지입니다.”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평면도, 측면도 이런 거 안 그려드린다는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사장이 의아한 시선으로 물었다.

가장 중요한 도면을 그리지 않고, 과연 설계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성훈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투시도로 세밀하게 그려드릴게요. 그럼 그걸로 디자인팀더러 세부 도면 그리라고 하시면 돼요.”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했던지, 사장도 수긍했다.

“음. 알겠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럼 시작해 볼까요?”

“좋아!”

“지금부터는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사장님께 계속 여쭤봐야 하니까요.”

“알겠네. 뭐든지 물어보게.”

지금부터가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그때가 가장 즐겁다.

‘그 뒤에 도면 그리는 건 막노동이라고.’

중요한 건 디자인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캐드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훈은 그게 싫어서 발뺌하는 거였지만, 사장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합의했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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