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93화
졸업작품(03)
“사장님! 이 정도면 되겠냐고요?”
사장이 뜨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손잡이를 보느라 머리를 숙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추태를 보이지 않기 위해, 사장은 가까스로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야!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어?’
부지불식간에 새로운 디자인 하나를 뽑아냈다.
베이스가 있었다고는 해도, 새로운 손잡이에서는 전혀 원본의 향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숫제 다른 디자인이잖아!’
원본을 뛰어넘은 모방은 존재하기 어렵지만, 뛰어넘으면 새로운 디자인으로 인정받는다.
대충 비슷하기라도 해야 시비를 거는 법이지, 이렇게 몇 발짝이나 앞으로 나가버리면, 복사니 모방이니 할 끈덕지기가 없어진다.
‘그걸 5분도 안 되는 사이에…….’
옛날이야기 몇 마디 하는 사이에 새로운 디자인이 나왔어요!
누가 믿겠는가?
이런 말을.
물결치듯 자유로운 선이 만들어낸 홈!
일정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홈의 강약이 눈으로 느껴진다.
요철의 변화가 직접 손에 닿는 듯, 간지러운 느낌마저 느껴졌다.
‘이러니 세월이 지나도, 그 느낌이 살아있었던 모양이로군.’
손가락이 많이 닿은 부분은 마모가 빠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형태라면?
적어도 수백 년은 그 느낌을 유지하겠지.
어떻게 아느냐고?
‘꼭 만져봐야 아는 게 아니지. 손으로 쥐면, 저 홈들이 내 지문 사이를 파고들 것 같다고.’
손잡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전율했다.
척하면 척!
‘그 의미가 뭔지, 오늘에야 알았군.’
하나에 100만 원 넘는 손잡이를 쓰면서도, 뭔가 모르게 아쉬웠던 부분들!
그동안 회사의 무수한 디자이너들도 찾아내지 못했던 답을.
짚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실제로 구현해 놓았다.
거듭된 연구 끝에 나온 해답이라면 이해라도 하련만.
‘허! 이거 참!’
속절없이 입을 다문 채, 마른 침을 삼킬 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드세요?”
다그치는 성훈의 물음에 다급히 답했다.
“아, 아니! 괜찮군.”
“나중에 마음에 드니 안 드니, 한 교수에게 타박하지 마시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지금 말씀하세요. 바로 수정해 드릴 테니까.”
뭐라고 말할 것인가?
당장이라도 손에 쥐어보고 싶은 손잡이가 나왔는데.
만족도 이런 만족이 없다.
허나 견물생심이라 했던가?
‘금세 이런 걸 만들었는데, 다른 디자인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선택의 폭은 넓을수록 좋았다.
자랑할 것을 생각하니 속으로 고소가 지어졌다.
‘세산 권 사장! 흐흐흐. 나한테 그렇게 자랑을 했으렷다.’
그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놈은 돈지랄을 했지만, 내 별장은 다르다고.
생각만 해도, 통쾌한 일이 아니던가?
사장이 물었다.
“혹시 이것 말고 다른 디자인은 없겠나?”
“어. 그럼…….”
성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역시 마음에 안 드시는군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손잡이를 그린 종이를 집어 들었다.
사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 뭐하려고?”
“찢어버려야죠. 역시 이건 아니었어.”
“잠깐!”
“왜요? 이런 거 남겨봤자. 베꼈다고 욕만…….”
“베끼기는 누가 베꼈다고.”
택도 없는 소리를 한다며, 그는 성훈의 손에서 종이를 채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장의 돌발적인 행동에 성훈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걸작을 찢으면 안 되지?’
허나 작품의 권리는 어디까지나 만든 자에게 있는 법.
사장이 어색하게 눈웃음쳤다.
“아니, 아직 자세히 못 봐서 말일세.”
허나 성훈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있나?
“무슨 소리세요. 아까 그렇게 뚫어져라 보시더니!”
다급히 성질내는 성훈을 달랬다.
“아닐세. 지금 보니 딱 마음에 들어. 음. 좋아!”
만족감을 표시하기 위해, 사장은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하지만 성훈은 아직 미심쩍은 모양.
“정말입니까?”
화를 누그리는 모습을 보며,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놈이 어떤 놈인지 잊고 있었어.’
제 마음에 안 들면 몇 억을 준다고 해도 팔지 않는 놈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이 사라지게 생겼는데.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당장 찢어버릴 것 같다고.’
지가 그린 거, 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 찢겠다는데 무슨 권리로 그럴 막느냐는 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찢어버린 작품만 모아도 한 수레가 넘는다고 했다.
그게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얼마의 가치가 있을까?
어쨌거나 만족한다는 사장의 말에 성훈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귀찮은 일을 하나 줄일 수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 손잡이는 이렇게 가시고, 나머지도 이런 식으로 하시면 되겠네요.”
“나머지를 이런 식? 이렇게?”
손잡이를 가리키는 그에게, 성훈이 손사래 쳤다.
“에이, 설마요. 똑같이 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사장님 회사에 디자이너들 많잖아요. 그분들 모두 디자인에는 도가 트신 분들이잖아요.”
사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박사 학위를 딴 인재들이 득시글하지.’
하지만 한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네 녀석 같은 사람은 없지.’
누가 이렇게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는 말인가?
마치 머릿속에 들어갔다 온 것마냥, 가타부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잡는 느낌이 별로더라.’
이 단순한 한 마디였다.
그걸로 이런 작품을 만들어 내다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전율이었다.
성훈의 말에 사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이런 걸 보여주고는, 다른 녀석에게 디자인을 맡기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
‘역시 이 녀석이어야만 했어!’
세산의 권 사장에게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왜 내가 한 교수에게 설계를 맡겼는데?
건설회사에 설계팀이 없어서 그랬을까?
그럴 리가!
사장도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지금까지 한 교수는 항상 성훈이와 공동설계를 했다고.’
별장 설계를 맡길 때만 해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설계가 거의 완성되었을 때에야, 도면에 성훈의 이름이 없음을 알았다.
의아해진 사장이 물었었다.
‘왜 성훈의 이름이 없는 거요?’
한 교수는 성훈이 박람회 일로 바빠서 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어쩌랴!
성훈이 때문에 당신에게 맡겼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한 교수의 자존심은 둘째치고, 대한민국 최고 건설사의 사장이 아직 건축사 자격도 없는 학생에게 설계의뢰를 맡길 수는 없었으니까.
일개 학생에게 현재 건설이 설계를 의뢰한다?
그건 파격이 아니라, 체면이 상하는 일이었다.
물론 결과는 좋게 나왔다.
한 교수는 실력도 좋았지만, 유럽 디자인에 견문이 넓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디자인에 대한 접근 방법 자체가 한국 사람과 달랐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건, 압둘의 몰딩 같은 유니크함이었다고. 지금 이런 거 말이야.’
성훈은 매정하게 선을 그었지만, 사장은 그를 눈앞에서 놓치기 싫었다.
‘이런 걸 보여주고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니.’
가구 디자인에 대해 사내 디자인팀에게 의견을 물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허나 그들의 답은 너무나 일관적이었다.
‘외국의 유명 장인이 만든 제품입니다. 여기서 뭘 더해서도, 빼서도 완벽함이 사라집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저희로서는 손댈 재간이 없습니다.’
이게 무슨 다빈치의 작품이냐?
스트라디바리우스라도 되는 거냐?
하지만 손댈 재간이 없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스스로 능력이 된다면 바꿔 보겠지만,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이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성훈이 겁이 없어서 그 디자인을 변경했든, 아니면 디자인에서 흠을 발견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 손잡이가 내 마음에 쏙 든다는 거라고!’
사장이 성훈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기왕 시작한 것, 자네가 마무리 지어주는 건 어떤가?”
성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다른 가구들도 이런 식으로.”
사장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군.”
성훈이 어깨를 젖히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허!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와 계약된 건, 인테리어 설계까지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디자인이 나왔는데, 여기서 관두면 아쉽지 않겠나?”
그건 성훈을 몰라서 하는 소리!
‘흥. 내가 뭐가 아쉬워? 당신이 날 무시하니까, 빡쳐서 한 것뿐이라고!’
그리고 이미 실력을 보여줬으니, 자신의 목적은 100% 달성한 셈이었다.
성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 손잡이를 손본 건, 사장님께서 하도 답답해하시기에,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고 보여드린 것뿐입니다. 이제부터는 사장님께서 알아서 하셔야죠. 얼른 다른 가구들이나 정해 주시죠. 얼른 돌아가서 한 교수도 도와야 해서요. 시 계획 때문에 바쁘시거든요.”
골똘히 생각하는 사장을 종용하며 말을 이었다.
“사장님께서도 바쁘실 텐데, 굳이 이런 걸로 시간 빼앗길 이유가 있겠습니까?”
물론 해 보면 재미는 있겠지!
유명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직접 견식하고 거기에 손을 댈 기회도 생길 수 있었다.
‘가구 하나가 강남 집 한 채와 맞먹는 가격이라고.’
하지만 내가 왜?
사장이 뭐가 이뻐서!
가구 정도야, 나중에 가구 박람회를 가서 봐도 충분하다고.
그렇다고 성훈이 직접 나서서 해 줄 정도로 신세를 진 것도 아니질 않는가?
‘당신이 날 만나서 득을 봤으면 봤지, 손해 본 게 뭐 있는데?’
사장이 생각하기에도, 성훈이 코웃음 칠만 했다.
세상천지에 인테리어 하면서, 가구 디자인까지 해주는 곳이 어디 있나?
가구는 기성품을 사든지, 아니면 따로 디자인을 주문하는 것이 상식이 아니던가?
성훈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이 양반이! 어디서 내 밑천을 털어 먹을라고.’
아직 나올 디자인이 많은 것 같은데, 정작 성훈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으니, 사장만 속이 탈 뿐이었다.
차로 입을 축인 사장이 물었다.
“전권을 다 위임받고 왔다고 했던가?”
“네. 왜요?”
“아닐세. 한 교수와 통화를 해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세요.”
그래 봐야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한 교수도 귀찮은 일을 떠맡기는 싫을 테니까.
‘울산시와 하는 것만 해도 눈코 뜰 새가 없을 텐데, 과연 이거에 매달릴 여유가 있을까? 쯧쯧.’
“잠시만 기다리게.”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인터폰을 눌렀다.
“정비서. 한 교수 좀 연결해주게.”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었다.
한 교수의 목소리가 낮았다.
-한 교수입니다. 뭔가 언짢은 일이시라도...
“아니오. 전혀!”
-그런데 아까 비서 아가씨 목소리 톤이 좀.
아까부터 심부름꾼 취급하더니, 자기네 사장과 격이 맞지 않는 사람을 보냈다고 한 교수를 타박했는지도 모를 일.
하지만 사장은 한 교수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인테리어 디자인 외에 가구 세부 디자인까지 하고 싶소!”
-네?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건 아니고, 가구에 한해서만 말이오.
잠깐의 고민 후, 한 교수가 말했다.
-당장은 곤란할 것 같군요. 저도 시 계획 때문에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성훈을 힐끔 바라보니,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거 봐요. 안 된다니까!’하는...
그런 성훈을 보며, 사장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거두절미하고 부탁하겠소.”
-네? 무슨?
‘무슨 말을 하려고, 거창하게 운을 떼는 거야?’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성훈은 사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성훈 군만 있으면 되오! 그래도 어렵소?”
-성훈이는 왜 그러시는지?
“성훈군과 몇 마디를 해봤는데, 쏙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나와서 말이오.”
곤란해 하던 한 교수의 말투가 확 변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성훈이와 얘기를 하시면 될 텐데, 굳이...
“성훈군이 시 계획 때문에 한 교수를 도와야 한다고 해서, 양해를 구하려고 했던 거지요.”
수화기 너머로 한 교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녀석! 귀찮다고 발뺌하기는... 그거 녀석이 구라치는 겁니다. 박람회 끝나고 나서 할 일 없으니까, 심심하다고 거기 갔던 녀석입니다.
“그럼?”
-맘대로 굴리십시오.
그 말에 사장이 성훈을 힐끔 훔쳐봤다.
통화 내용이 들리는 게 분명했다.
인상을 팍 쓰고 있는 걸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울산 내려가면, 한 교수가 한바탕 털리겠군.’
미친 개 최 이사도 털었는데, 교수 정도야 일도 아니겠지.
하지만 사장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내가 털리는 게 아니잖아!’
확실하게 한 교수에게 악역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에게 다짐하듯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거요?”
뒷감당할 자신이 있느냐는 의미의 물음에 한 교수가 호쾌하게 답했다.
-성훈이 녀석 졸업학점은 제가 꽉 쥐고 있으니까,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오실 때까지 부려먹으십시오.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어찌나 목소리가 컸던지, 소파에 앉아있는 내게까지 다 들렸다.
‘아쭈! 저 인간이! 나를 아주 팔아 넘기는데.’
칠전팔기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현재 사장에게 학을 뗐던 모양이다.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하다는 투의 목소리였다.
‘사람 부려먹는 데는 도가 텄다니까.’
하지만 그의 이어지는 말에 잠시나마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대신 성훈이가 만족할 정도로 비용만 지급해 주십시오. 그럼 됩니다.
사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오!”
통화를 끝내고 사장이 내게 물었다.
“이렇다고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끄응.”
믿었던 도끼에 뒤통수를 까였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