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292화 (292/427)

건축의 신 292화

졸업작품(02)

사장실에서 나오는 곽 이사가 보였다.

그는 나를 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목소리를 깔며 물었다.

“성훈 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울산에 내려가신 것 아니셨습니까?”

“아! 한 교수님이 사장님 별장 설계를 맡으셨는데, 그 건 때문에 왔습니다.”

“아! 별장이요? 사장님의 기대가 크시죠. 그런데 성훈 님께서는 관여하지 않는 거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됐습니다. 마무리만 제가 하는 거로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역시 그래야죠. 마무리가 가장 중요하지요. 비중 있는 사람이 마감해야지요.”

여전히 그는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런 상황이 좋았다.

내가 회사에서 일할 때, 내 편의를 봐줄 수 있는 자리에 있었으니까.

적어도 내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해 주겠지.

‘일할 때 제일 먼저 부딪치는 게 결제라는 진입장벽이지.’

그 단계가 적을수록 일의 속도는 빨라진다.

‘자리를 잘 잡아가고 있나?’

시간이 약간 남았기에, 근황을 물었다.

“잘 지내시고 계신 거죠?”

“저야 성훈 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특히나 박람회의 대성공과 압둘 왕자의 방문은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그런가요? 회사에서 인정받으신 모양이죠.”

내 말에 곽 이사는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금년 중순 즈음에는 전무로 승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희소식이네요.”

“하하하. 이게 다 성훈 님의 배려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없었기에 망정이지, 로비가 아니었다면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곽 이사님께서 노력해 주신 덕분이죠. 그게 꼭 제 덕이겠습니까?”

“하지만 성훈 님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앞으로 이 곽순일! 성훈 님의 하시는 일이라면 제일 앞장서서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잘 되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놓였다.

“양 이사님은요?”

“아! 그 친구도 지금 승승장구 중입니다. 사장님께서 설계 쪽에 신경을 많이 쓰시니까요. 아무래도 양 이사가 그쪽으로는 전문이지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다 자리를 잡아가시는 모양이네.’

당장 회사에 입사하더라도, 어느 정도 운신의 여유가 생기겠다는 예상이 들었다.

곽 이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참!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 말입니까?”

“서 전무와 최 이사가 조만간 돌아올 것 같습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최 이사야 알지만, 서 전무는 누구야? 그리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회사 소식을 묻는 거지?’

그에게 되물었다.

“서 전무가 누굽니까? 제가 아는 사람입니까?”

“그 왜? 성훈 님께서 알래스카로 보냈던 그…….”

“네? 제가 알래스카를 보냈다고요?”

“아! 참! 모르시겠군요.”

말실수를 깨달았던지, 곽 이사가 스스로 입을 막았다.

“혹시 시간이 되십니까? 제 방에 가셔서…….”

시계를 들여다보니, 약속 시각이 채 5분이 안 되게 남아있었다.

“아뇨. 길게 말할 시간은 없어요. 왜요?”

“아닙니다. 그 건으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양 이사와 대기하고 있을 테니, 일 보시고 가시기 전에 전화 한 번 주십시오.”

그에게 인사를 하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여자 비서 두 명이 책상에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퀵서비스이신가요? 아래 데스크에 맡겨두시면 되는데…….”

그러면서도 서류를 받으려는 건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꼿꼿하게 펴진 허리에, 깔끔한 투피스 정장!

흠잡을 구석이 하나 없는 완벽한 오피스 레이디.

칼 같은 자세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제게 주시면 됩니다.”

내 옆구리에 끼고 있는 서류를 가리켰다.

진 차림에 서류봉투를 들고 있으니, 퀵 회사 직원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슬쩍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자택 건으로 방문했습니다.”

자신의 예상과 달랐던지, 놀라는 표정이었다.

앉아 있던 여비서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선임인 모양이었다.

서 있는 나를 보며 힐끗 보며 말했다.

“교수님이나 관계자가 오시는 거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요?”

오해하는 것을 보니, 한 교수가 딱 집어서 나라고 말을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일어서며 말했다.

“서류를 건네주세요. 제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손을 내미는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아뇨.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

“한 교수님께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일 얘기 하러 왔다.

학생이면 어떻고, 교수면 어떻겠는가?

선임비서가 돌아서며 말했다.

“사장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뒤돌아섰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녀가 안으로 사라지고, 후임 여비서가 물었다.

“학생으로 보이는데요?”

선임보다 좀 더 어리고, 생기발랄해 보였다.

“3학년입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아까는 착각해서 미안해요. 여긴 맨날 정장 입은 이사님들만 오시거든요.”

사과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전혀 주눅 들어 보이지 않으시는데요?”

“죄지었습니까? 일 얘기를 하러 왔을 뿐입니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댁보다 더 높은 이사님들도 이 앞에서는 넥타이를 고쳐맨다고요.”

긴장하라는 그녀의 말에 오히려 셔츠 맨 윗단추를 끌렀다.

‘긴장해서는 안 되지!’

사장의 눈이 높다고 들었다.

오늘은 설계자와 고객의 관계로 방문했다.

그의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을 해보겠노라고 한 교수에게 큰소리까지 치고 왔다고.

완전 설득은 안 되더라도, 그의 취향은 완벽하게 파악을 해야 했다.

“어머!”

그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넥타이를 졸라매라 했더니, 단추를 풀고 있으니 황당한 모양이었다.

그 사이 안으로 들어갔던 선임비서가 밖으로 나왔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그가 진짜 유럽풍의 안티크를 좋아한다면, 나는 자신이 있었다.

유럽 여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 눈에 들어왔던 건 온통 가구뿐이었다.

지난 삶에서 가구로 먹고살았던 탓이리라.

‘다른 건 몰라도, 가구는 자신 있다고. 당신의 취향이 나로 바뀌게 해주지!’

“네!”

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열린 문을 향해 걸었다.

***

들어서는 나를 보며, 사장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네가 올 줄은 몰랐다네. 이리 앉게나.”

그가 인터폰으로 차를 시키고 말했다.

“이번 박람회는 정말 성공적이었어. 고생이 많았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인재들도 영입하게 되었고 말이야. 참! 자네는 언제쯤 들어올 생각인가?”

“일단 이 일을 처리하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호오. 그런가?”

잠깐 동안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치레를 했다.

하지만 박람회는 이미 끝났고, 결과까지 다 정해졌다.

굳이 내 얼굴을 금으로 덧칠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일 이야기로 들어갔다.

“별장의 인테리어 아이템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 참! 성격 급하기는.”

그러면서 그는 내 말에 수긍했다.

내려놓은 카탈로그들을 뒤적거리며, 그가 말을 이었다.

“자네가 디자인에 소질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네. 예전의 몰딩 건과 이번 박람회만 봐도, 알 수 있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사장이 카탈로그에서 눈을 떼며 물었다.

“그리고 나도 자네가 뛰어난 인재라는 건 알아.”

뜸 들이는 그에게 물었다.

“허심탄회하게 말씀을 해주시지요.”

“한 교수가 무슨 생각으로 자네를 보냈는지 모르겠군. 분명히 정통 유럽풍으로 해달라고 했는데.”

“모두 정통 유럽풍이 맞습니다만.”

“하지만 이건 아니질 않나? 한 교수가 나를 설득하고 오라고 하던가? 자네가 가면 내가 적당히 알아서 고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 아닌가?”

그의 말꼬리에는 불쾌감이 묻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의문을 가지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지금까지 자네가 해온 것들과 궤가 다르지 않나? 전통건축에만 매진해온 자네가 내게 아이템들을 골라주겠다고?”

왜 전통건축, 한 가지만 했다고 생각하는가?

도리어 기분이 상한 내게 그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그럴 정도의 안목이 있을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해를 하셨군요. 사장님.”

“무슨 오해 말인가? 내가 사적인 호감과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는가?”

그는 한 교수와 똑같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내가 서양의 가구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 말이다.

‘서양 가구에 대한 트레이닝은 충분히 되어 있다고.’

타이타닉을 보면서 나왔던 인테리어들, 기억에 남는 모든 것들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리고 책자의 인테리어들은 어떻고, 여행을 하면서도 특색 있는 소품들은 모두 내 스케치북에서 선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모두 나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물었다.

“확인해 보시죠? 안목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말인가? 가구 박물관이라도 갈까?”

무슨 수로 확인할 거냐고 묻는 사장이었다.

“그럴 필요까지야 있을까요?”

손잡이가 나열된 카탈로그를 펼쳐 들었다.

로코코 풍의 황동 도금이 된 금속 손잡이였다.

“한 교수님은 이걸 거실 장식장에 부착하는 거로 추천하셨습니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드신다고요?”

“그랬네!”

내 말투가 따지듯이 들렸던지, 그의 목소리도 한 옥타브가 올라갔다.

“그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로 몸을 기댔다.

“내 이렇게까지는 말 안 하고 싶었는데, 그 손잡이 세산건설 사장 별장에 있는 거야!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그 친구랑 똑같은 걸 하라는 말인가?”

“이유는 그것뿐입니까?”

“아니 또 있네. 보기에는 좋은데, 실제로 써 보면 뭔가 딱 붙는 느낌이 안 난다고!”

하나에 100만 원을 호가하는 손잡이였다.

그런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후. 부자들의 욕망이란.’

딱 제 손에 쥐었을 때 마음에 들어야 하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어서도 안 되고.

까다롭기 그지없지 않은가?

이러니 한 교수가 머리를 싸매 쥐었겠지.

***

성훈은 도면을 뒤집고, 상의 포켓에 끼워둔 제도 샤프를 꺼내 들었다.

A3 하얀 종이 위에 선들이 지나가고, 음영이 그려지면서 손잡이 하나가 완성되었다.

잠깐 사이에 생겨난 손잡이에 사장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입체감이었다.

하지만 성훈은 샤프를 꼬나쥐고, 턱을 긁고 있었다.

사장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흠. 이 손잡이에서 그립감을 좀 더 살리고 싶다는 말씀이시죠?”

“응. 그렇지.”

사장은 흥미로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훈이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사장님. 제가 예전에 유럽 여행을 하다가, 쾰른 대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입으로 말하는 사이에도 종이 위에서는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엇! 하는 사이에 또 하나의 손잡이가 그려졌다.

처음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지만, 길이가 좀 더 길었다.

사장이 의아한 시선이 성훈의 눈과 손을 오갔다.

‘녀석이 지금…….’

허나 성훈은 전혀 답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샤프를 옆으로 뉘이고, 심을 가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이 이상 날카로울 수 없을 정도로.

‘뭘 하려는 거지?’

하지만 사장은 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샤프가 종이 위를 흐르듯 지나간다.

아쉽게도 사장이 보기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다.

‘대체 뭘 하자는 건가?’

의아한 가운데, 성훈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그때, 사제실을 방문해 본 적이 있어요.”

“응. 그런데?”

그 사이 한차례 흐름이 끝났는지, 성훈이 다시 샤프심을 갈았다.

‘이게 지금 뭐하는 거지?’

육안으로 보기에는 손잡이가 약간 어두워진 정도?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고작 이런 걸 보여주려고, 내 시간을 낭비한다는 말인가?’

끓는 속을 누르며, 결과를 기다렸다.

‘한 번만 참아주지. 이번에도 이런다면 아무리 너라도 참을 수 없지!’

날카로워진 샤프가 아까의 흐름 위를 스치듯 덮어 갔다.

그리고 서서히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성훈이 중얼거렸다.

“문을 여는데, 손에 착 감기더라는 말이죠. 믿기 어려웠죠. 수백 년이 지났을 텐데.”

성훈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손잡이의 변화에 집중했다.

“그랬나? 그래서?”

“사람의 손때가 타서 반들반들해야 마땅한데, 그렇지 않으니, 궁금했죠. 왜 그런지? 사장님은 아시겠어요?”

성훈의 물음에 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왜인지 눈을 보면 답을 알 것 같은 느낌?

성훈이 말했다.

“손잡이에 이런 미세한 홈들이 있더라고요.”

“아! 그래. 엇!”

성훈의 답을 듣느라, 잠시 시선을 뗀 사이에 손잡이가 완성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첫 번째 손길은 두 번째 터치를 위한 복선이었던 모양이다.

미세한 물결 홈들이 살아 움직이듯 파도치며, 손잡이 속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에 멍하니 있는데, 성훈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뭐 급하게 그리느라 대충 했는데, 이 정도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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