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89화
포석(02)
“저도 시장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고 싶습니다.”
시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하지 않으려는 건가?”
잠시 생각을 했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시장이 납득할 것인가?
단지 자존심이 상한다는 말로는 그를 설득하기 어려웠다.
그에게도 성공이 달려있는 일일 테니까.
아직 그의 머릿속에서도 숙성되지 않은 계획이지만, 그 씨앗을 분명히 가치가 있었다.
“아이디어는 좋습니다.”
시장도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리에서 떠올랐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생각이지. 흐흐흐.”
그 말에 싱긋 웃어주었다.
‘그렇다고 말해 줄 수는 없잖아. 저렇게 스스로를 기특해 하고 있는데 말이야.’
“하지만 구체적인 대안은 전혀 없으시죠.”
“만약 그 상태로 압둘이나 알리를 만났다가는 말 몇 마디 붙여보기도 전에 쫓겨났을 겁니다.”
시장이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뚱한 얼굴로 말했다.
“쯧. 그래도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건 없잖나.”
“전 그들을 잘 압니다. 분명히 그럴 겁니다.”
“자네하고는 격식 없이 지낸다고 들었네만.”
‘너하고도 친구 하는데, 나는 못 할게 뭐 있냐!’는 말이겠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전 적어도 그 사람들 앞에서 약점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시장님.’
지금이야 친구처럼 지낸다고 해도, 내가 그들에게 약점이 보인다면, 어떤 식으로 이용해 먹으려 덤빌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그들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싶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두 왕자는 태생에서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감히 돈질로는 대항할 수 없는 사람들, 거기에 그들은 자신의 노력까지 더했다.
거기에 차기 국왕으로 거론되는 자들!
내가 그들과 동등하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 알아서 기는 사람들 투성이일 텐데, 내가 그들을 따라해 봐야, 내 가치만 떨어질 뿐이다.
‘꺾을 수 없는 꽃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법!’
그런 그들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한국까지 나를 쫓아왔겠어?
그들이 친해지려고 하는 이유!
그것에 내 존재가치가 있었다.
“시간당 페이로 따지면, 그들을 이길 사람은 몇 안 될걸요. 전 세계에서.”
돈을 갖다 바치며 만나자고 해도, 만나기 어려운데, 시간 낭비할 사람들을 만나주겠는가?
그럴 시간이면, 시녀들에게 마사지 받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흥미를 끌만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허. 그래도 설계가 거의 끝나 가는데.”
도면이 있으니, 충분히 승산이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지만, 그의 계산을 애초부터 시작이 틀렸다.
“그들이 설계 전문가라면 그 걸로도 충분하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만약 제가 도면만 들고 가서 시장님께 결재해 달라고 하면 사인하시겠어요? 수십 억 짜리를?”
역지사지라 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설명하면 된다.
그가 말없이 흠칫거렸다.
“당연히 도면과 함께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줄 조감도, 혹은 모형을 함께 보여줘야겠죠. 뭔지 이해를 해야 사인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네만.”
일, 이천만 원짜리 쇼핑하는 게 아니다.
“수백억, 수천억의 투자를 요청하게 될 겁니다.”
“당연하지.”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샘플을 요청하겠죠. 투시도나 조감도 같은 거요. 그게 아니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할 겁니다. 거기서 머뭇거리는 순간, 쫓겨나요. 장담합니다.”
건설에서 말로만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샘플, 즉 조감도나 투시도가 며칠 만에 만들어지는 겁니까? 우리가 진행하는 거라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리겠죠.”
돈은 또 얼마나 들겠는가?
“그렇게나 오래 걸릴까? 고작 그림 몇 장 그리는데?”
“저 투시도 하는 거 아시죠?”
“그럼 알지.”
“그거 백 개 만든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이 열 명이 붙어도, 한 달에는 안 끝나요.”
“…….”
“문제는 그렇게 하고도, 그들이 투자를 한다는 100% 확신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럼 그동안 쓴 돈을 헛돈 쓰는 거죠. 시간 버리는 거고.”
“성훈이 자네가 해도 그럴까?”
물론 내가 하면 가능하지!
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냥 일 년 후에 윤곽 보이면, 그 때 가서 그들에게 항공사진 찍은 거 흔들면서 ‘이런 도시 어때? 맘에 들어? 만들 생각 있으면 내 앞에 돈 좀 쌓아봐!’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건데 말이다.
그들을 설득하는 것도, 지금은 시간 낭비다.
‘시장님은 그냥 제가 말씀드린 것만 잘해 주시면 되요. 제발!’
“저 같으면, 그거 신경 쓸 시간에 현장에 한 번 더 가보겠습니다. 그럼 적어도 일 년 안에 윤곽이 드러날 테니까요.”
“그럼 이미 투자는…….”
“그때, 제가 가서 반드시 성사시킬게요.”
나름의 계산이 서 있었다.
나중에 사우디에 갔을 때, 그들의 눈길을 끌 사진 몇 장 들고 가야지.
도시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어떻게 울산에 돈이 쌓이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것 말이다.
‘사우디 왕국에서도 석유가 천년만년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중동에서 석유가 끊어지는 순간, 중동의 여러 국가들은 최빈국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그때를 어떻게 슬기롭게 넘길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알리나 압둘의 고민이 그것인 것처럼.
“그러니까 지금은 투자를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그럴 시간에 우리 계획을 제대로 진행하는 게 나아요. 그게 곧 결과물이니까,”
그때 나는 알리에게 사우디 수도의 도시 발전을 논할 것이다.
언제까지 검은 물에만 경제를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하면서 말이다.
‘투자와 동시에 우리 건축가들의 할 일도 만드는 거지.’
완전히 완성되지 않아도 된다.
보여줄 주요 시설 몇 개만 완성이 되어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것만 봐도, 나머지 전체적인 모습이 대략적으로 눈에 보일 테니까.
그 정도의 눈썰미는 있는 자들이었다.
실망하는 시장에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하자는 데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어요.”
이미 흥미를 잃었던지, 그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뭔데?”
“지금 이슈를 터트리는 것보다, 선거 직전에 터트리는 게 좋잖아요. 그래야 유권자들이 더 확실하게 기억을 할 테니까요.”
이 말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선거라는 말에 시장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크하하. 그렇지! 역시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그래야 성훈이지!”
그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타이밍이 맞을까?”
“아직 선거라면 일 년 반 정도 남았죠?”
그의 임기는 기억하기 좋았다.
선거가 월드컵과 겹치는 걸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이면, 울산 도시 계획의 진행도 어느 정도 진적이 있을 겁니다. 그렇죠?”
“그렇겠지.”
“지금 계획 중에서 눈에 잘 띄는 것 위주로 완성을 시키고, 매 주마다 같은 자리에서 항공사진을 찍으세요.”
“그건 뭐 하러?”
“그럼 어디가 어떻게 발전되고 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잖아요.”
단지 변화만 보일까?
한국의 건설인들은 가속도가 붙으면 무섭다.
‘무시무시하지.’
수긍하는 시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건물 쌓아올리는 건 한국을 따라올 나라 별로 없어요.”
아마 7, 80년대의 중동에서 한국 건설인들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걸 두 왕자가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기초를 다지는 것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도, 건물을 쌓아올리기 시작하면, 일주일마다 도시의 경관이 바뀐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그들에게 ‘너희 도시도 이런 속도로 발전될 거야!’라는 기대감을 심어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면, 자기네도 안 할 수 없거든.’
이건 직접 경험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미치도록 손이 근질거릴 걸. 돈을 쓰고 싶어서.’
돈만 주면 이렇게 만들어 주겠다는데, 과연 왕자들이 거부할까?
어쩌면 자기 먼저 해달라고 매달릴지도 모른다.
시장을 보며 확신에 찬 말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장님의 다음 임기가 위태롭지 않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시장님은 지금 이 사업만 제대로 확실하게 진행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시장이 납득했다.
“알겠네. 그럼 나는 성훈이 자네만 믿지!”
이렇게 시장의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 일은 내가 중동으로 진출하는 포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화려하게 비상할 수 있는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
표정이 밝아진 시장이 물었다.
“참! 나를 찾았다면서. 왜?”
그의 일에 몰입하다 보니, 내가 할 말을 잊고 있었다.
“울산에 짓고 있는 월드컵 경기장 있죠?”
“응. 그런데 왜?”
“월드컵 할 때 말이죠. 그때도 경기장 옆에다가 이번처럼 박람회를 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박람회를 거기서도 하겠다?”
“네. 그때는 지금보다 규모가 조금 더 커져야 할 겁니다.”
“좀 더 크게 지어달라는 말인가? 여기보다?”
그의 말에 씨익 웃어보였다.
“네.”
“헌데 한창 월드컵 하느라고 축구에 관심이 쏠려 있을 건데. 성과가 있을까?”
그의 염려를 일축시켰다.
“어차피 한국인의 축제가 아니라, 세계의 축제예요. 그리고…….”
“그리고?”
“그때는 방문객의 수준이 다를 테니까요.”
시장이 의아해 하면서 물었다.
“어떻게 말인가?”
“일단 스티브를 초대할 겁니다.”
“이번에 왔었던 그 스티브 감독?”
“네. 그와는 계속 인연을 이어갈 테니까요. 그리고 이번에 사우디로 초청을 받은 거 아시죠?”
“알고 있네. 아크람 집사가 초대했다면서?”
말이 초대지, 자기가 죽기 전에 오라는 반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네. 거길 가는데, 빈손으로 돌아올 수는 없죠.”
인생이 공수래공수거라지만, 나는 다르다.
빈손으로 갈지언정, 올 때는 양손 가득 들고 올 것이다.
남자라면 이 정도 꿈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시장이 내 속셈을 알아차렸다.
“크크크. 성훈이 너도 거기 가서 체면을 세워줬으니, 거기서도 한 명이 와야 한다, 그 말이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알리 왕자, 아니, 알리는 이제 식상해요. 그 이상의 인물이 와야 격이 맞겠죠.”
정 방법이 없으면, 나도 초대하면 된다.
그들의 초대에 응해 줬으니, 그들도 갚아야 할 것 아닌가?
시장에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잘만 되면, 국왕이 놀러올 수도 있는 거죠.”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정말? 그게 가능해?”
시도해 보지 않은 이상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사우디 수도와 형제도시가 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죠.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외에도 방문자들의 격이 높아질 것이다.
압둘의 후원을 받는 현 EU 건축협회 부회장 마이어는 그때쯤이면 ‘부’자를 뗀 회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는 프랭크도 부르고요.”
“아! 그 프리츠커 수상자 말인가? 저번에 나하고 대담했었던?”
“네.”
시장이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 그러다가 월드컵이 들러리가 되는 거 아니야?”
“무슨 상관이에요. 그래서 울산 축구장에 사람들이 더 몰릴지 누가 알아요.”
“그렇지. 오히려 좋지! 월드컵 특수를 톡톡히 누릴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제 말도 그 말이죠. 어때요? 공간을 만들어주실 수 있어요?”
시장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준비를 하지.”
월드컵 축구장 옆의 작은 전시관은 유명인들로 붐빌 것이다.
물론 그 내용 또한 지금보다 더 풍요로울 것이다.
‘이건 한국의 전통건축이 두 번째로 세계 언론에 오르내리는 결과를 만들 거야.’
나는 미래를 향한 또 하나의 포석을 깔았다.
우리나라는 전통에 무관심하다.
아주 많이 무관심하다.
이런 장소, 전통을 전시하고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럼 왜 전국적으로 그런 걸 설치할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그럼 더 효과가 좋아질 거라 생각하는가?
나는 그 생각에는 의구심이 든다.
확실하지 않은 결과를 노리느니, 한 곳에서 대박을 터트리는 게 낫다.
‘그렇게 되면, 다른 도시에서도 덩달아 이런 행사를 개최할 테니까.’
백문이 불여일견!
돈이 된다고 아무리 외쳐도 하지 않는다.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따라한다.
그 와중에서 내가 생각지 못했던 아이템들이 탄생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발전하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