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87화
변화(05)
중요한 것은 총장이 내가 현재 건설로 진출하는 유일한 창구라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전통건축학과를 키우면 뭐하나?
키운 인재를 실전에 배치할 수 없다면, 말짱 꽝이지!
나는 전통학과의 인재들을 현재 건설로 끌어들일 의향이 있고, 그럴 능력도 있었다.
이미 증명했잖나!
양 이사랑 곽 이사를 불러서.
-들어 보니 아귀가 딱딱 맞아. 하루 이틀에 나올 계획이 아니군.
“총장님을 상대로 딜을 거는 겁니다. 섣부르게 할 수는 없죠.”
어설픈 계획이라면, 바로 바닥을 보이게 된다.
-자네 말을 요약하자면, 인재들을 잘 키워서 현재 건설로 보내달라는 거군.
“제가 있는 한은 계속 수급이 가능할 겁니다. 물론 실력을 전제로 깔고 하는 말입니다.”
총장이 앓는 소리를 했다.
-좀 봐달라고. 성훈 군, 자네 기준에 맞추면 현재에 보내기도 전에 피 말라 죽을 거야.
“완벽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써먹을 만하면 됩니다.”
총장이 내 말에 코웃음 쳤다.
-훗, 어지간히도 그러겠군. 그런 일 안 생기도록, 가끔씩 와서 관리도 좀 해주고 그래 주게. 자네 스타일을 알아야 준비도 하고 그럴 거 아닌가? 그런 거 잘하잖아! 하하.
그의 농담에 농담으로 응수했다.
“언제까지 제가 학교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겁니까?”
-엇! 그러고 보니 자네가 현재 건설 면접관이 되는 건가? 이거, 성훈 군에게 잘 보여야겠군.
“잘 보일 것까지야…….”
-자네 의견에 따라서 전통학과의 현재 건설 입사 인원이 정해질 것 아닌가?
“제 의견이 중요하겠습니까? 인원은 필요 유무가 정하는 거죠.”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지만, 과연 총장에게 씨알이나 먹힐까?
-훗, 자네가 일거리를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무한정 만들어 내는지 아는데, 이번 말은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아.
“지금 들어가 봤자 인턴이나 신입일 텐데, 아직도 그 계획을 실행하려면 멀었다고요.”
-훗! 인턴은 인턴이지. 회사 중역들을 오라 가라 하는 슈퍼 인턴!
통화를 마무리하면서 총장이 말했다.
-이번 일은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네. 잊어주게나. 앞으로 절대로 이번 같은 일은 없을 걸세. 내가 총장으로 있는 이상 말이네.
정말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총장은 더 이상 나와 대립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속마음이야 알 수 없겠냐만, 적어도 이런 행동을 취하지는 않겠지.’
통화를 마치자 최 옹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옆에서 들어보니 총장은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인가 보구먼. 성훈이, 자네가 찝찝하다면 하지 않아도 되네. 우리야 뭐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우려하는 대목장에게 은근한 웃음으로 말했다.
“이제 믿을 만해요.”
“이제 믿을 만하다니 무슨 말인가?”
그를 신뢰할 수 없다면 그가 나를 신뢰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주면 된다.
무능한 사람에게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겠지만 총장처럼 유능한 인물이라면 들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보리떡에 그을음 좀 묻었다고, 통째로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는 절대로 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흠이 있다고 할지언정 내가 결벽증이 아닌 이상 그에게 도덕적 무결함을 바랄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이건 총장이 궁지에 몰려 저지른 실수라고.
“그런 건가?”
대목장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집어엎는다고 능사는 아니니까요.”
“그건 자네 말이 맞네. 엎기만 해서야 되나 덮을 줄도 알아야 농사가 제대로 되는 법이지.”
그리고 국민학교 도덕책에나 나올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양보할 건 양보하면서 그렇게 서로 상부상조하게나.”
깜빡하고 있었다.
‘모든 일의 원흉이 대목장이었지!’
그가 의도한 잘못은 아니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예견된 결과였다.
경쟁의 틈바구니가 아니라 고고하게 자기 일만 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제대로 된 협상을 바란 나의 잘못이기도 했다.
최 옹에게 말했다.
“참, 어르신, 앞으로는 뭔가 막히는 게 있으면 뭐든지 한 교수님이랑 상의하세요.”
“엥? 한 교수? 그 사람은 안 돼!”
대뜸 거부하는 대목장이었다.
도리어 내가 황당해서 물었다.
“예? 안 된다고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너무 착해서 안 돼. 나한테도 매번 양보하는 사람인데, 총장하고 되겠어?”
순간 어이가 없어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최 옹 정도는 한 트럭을 붙여놔도 찜 쪄 먹을 인간임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헛! 한 교수가 최 옹에게 제대로 이미지메이킹한 모양이네.’
전통에 관심 많은 한 교수가 그에게만큼은 입안의 혀처럼 굴었던 모양이다.
한 교수에 대한 칭찬이 물 쏟듯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한 교수가 어떤 사람인가?
털털하게 보여도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다구.
그의 염려를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말했다.
“걱정 마시고 맡기세요. 어르신 일이라면 두말없이 양손 걷을 겁니다. 일도 제대로 하시구요.”
“알겠네, 그건 그치에게 맡기도록 하고…….”
최 옹은 말꼬리를 늘이며 나를 미심쩍게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어르신.”
“그런데 왜 특채 소식을 먼저 전하지 않았나? 정말 화가 나서 그랬던 건가?”
최 옹이 눈매를 모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던데?”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인생을 완전히 헛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걸 먼저 말했다면 총장은 먼저 한 발 뒤로 물러났겠죠.”
최 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랬겠지. 얻을 게 더 크니까 말이야. 그가 먼저 양보했을 테니, 아까처럼 언쟁도 없었겠지.”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르신, 충돌을 두려워하면 물러나는 길밖에 없답니다.’
평화도 여러 가지 양상이 있지 않을까?
허리를 굽힘으로써 얻어내는 숨 졸이는 평화와 스스로 전쟁 억지력을 가짐으로써 이뤄내는 평화.
둘 중의 어느 것이 나은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
하지만 지난 삶의 나는 전자의 평화주의자였다.
‘갑’을 이길 자신이 없었고, ‘을’은 항상 허리를 굽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자네가 일은 잘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상황도 생각해 줘야 하기 때문에 자네에게만 특권을 부여할 수 없네. 자네가 이해해 주게.’
지난 삶에서 내 상사들이, 회사의 사장들이 많이 하던 소리였다.
‘다 같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이니, 그 성과도 다 같이 나눠야 하지 않겠나?’
개소리다.
다 같이 노력해도, 내가 가장 많이 노력했고, 내가 가장 뛰어난 결과를 얻었으면, 당연히 내가 가장 좋은 파이를 먹어야지.
왜 대충대충 일한 놈들과 똑같이 나눠야 하는가?
그들이 잘 때 나는 졸음을 참으며 일했고, 그들이 쉴 때도 나는 작업에 매진했다.
내 노력이 인정받기를 바라며 노력했다. 인정받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그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었다.
예진이 분유를 사야 했고, 집의 대출금을 갚아야 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일을 쉬면 빚더미에 앉아야 하는 게, 나만의 문제였을까?
‘감히 사장에게, 원청 업체에게 어찌 대들 생각을 했겠나?’
비굴하게 웃으며 가정의 평화를 위해 끝없이 양보하며 살았다.
그게 지난 삶의 나였다.
***
양보?
양보는 강한 사람이 하는 거다.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택하는 양보는 양보가 아니다.
그것은 굴복이고, 굴종이다.
말은 승자도 패자도 모두 양보라고 말할지는 몰라도.
하나 대목장을 이해시키기는 어려우리라.
“네, 어쨌거나 결말은 비슷했을 겁니다. 제 요구가 관철된다는 면에서는.”
“그래서 하는 말일세. 굳이 같은 결과라면 싸울 필요가 있었느냐, 그 말이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대번에 이해를 바라는 것은 어려우리라.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다음 일을 진행하는 자세는 확연히 다를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이해가 잘 안 되는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네, 그랬다면 그건 총장이 스스로 양보한 게 됩니다. 스스로 양보했다고 생각하니, 다음에는 제게 양보를 요구하겠죠.”
당연한 수순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양보하지 않을 것이고.
오늘처럼 명확한 선을 그어주는 수밖에 없지.
“이런 종류의 충돌은 시기의 문제였을 뿐, 언제 생겨도 생길 일이었어요.”
최 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기는 했네.”
“더 중요한 건, 이렇게라도 경고해 두지 않으면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될 거라는 겁니다.”
적절히 눈치를 보다가, 상황이 유리해지면 또다시 이런 일을 획책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의 실수를 밑거름 삼아 다음에는 더 면밀한 계획을 짤지도 모르지.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몰라도, 드러낸 이상은 한 방 먹여야죠.’
늑대에게 어설프게 우위를 보여서는, 다음 기회를 노릴 용기를 줄 뿐이다.
그리고 응징에도 시기가 있는 법!
또한 기선 제압은 단 한 번에 이뤄져야 한다.
‘마침 좋은 기회였지.’
현재그룹이 내 손을 들어주는 상황에서 총장이 실수를 했다.
그가 패배를 선언하기도 전에, 내 손에 든 패를 먼저 보여줄 이유가 어디 있을까?
상대의 블러핑에 놀라는 척만 하면 된다.
손안의 조커를 들키지 않은 채.
‘나와의 수 싸움에서 패배를 인정하게 하고 싶었거든요. 다시는 싸움 걸 마음이 안 생기도록.’
하지만 내 이런 생각을 대목장에게 모두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이런 부분에 취약했다.
또한 이익보다는 정에 기대고, 실리보다는 양심을 더 따졌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흠, 그런 건가? 나는 잘 모르겠군.”
“이제 앞으로 총장은 제 뒤통수를 칠 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겁니다. 내가 모르는 수가 있지 않을까? 하구요.”
“허허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내 경험상, 한 번 데인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선을 넘지 않는다.
상대의 수를 확실히 모르는 입장에서는 자라 등껍질이나 솥뚜껑이나 거기서 거기다.
어두컴컴하니 흐릿한데, 겁 없이 손가락을 넣을 강심장은 없다. 이미 한 번 물려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얻는 것보다 잃을 게 훨씬 많다는 걸 경험한 총장이라면 모험보다는 안전을 택하지 않을까?
“어쨌든 총장이 절 진정한 파트너로 봤다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겁니다. 인정은 했겠지만, 지금까지는 애송이로 봤던 거죠.”
대목장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자네도 시원하게 한 방 먹였으니, 이제 잊어버리게. 자네 말마따나 그 사람도 자기 욕심만 챙기려고 한 건 아닐 걸세. 그 자리가 좀 고민이 많은 자리겠나.”
나를 달래는 말에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그저 제 욕심만 차리거나, 나를 삼킬 생각만 하고 있었다면, 대번 모가지를 쳐냈을 겁니다.’
대목장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속으로 삼킬 수밖에.
총장이라고 모든 일을 제멋대로 할 수 있을까?
참모들 의견도 듣고, 학과의 다툼도 미리 방지해야겠지.
어쩌면 전통학과를 대놓고 지원해줄 명분을 기다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저에 대한 평가를 달리할 겁니다. 적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녀석 정도는 되겠죠.”
상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파트너 관계는 깨어진다.
겉으로야 어떨지 몰라도, 속으로는 하수인 정도로 생각하게 되지.
‘지금 총장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