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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284화 (284/427)

건축의 신 284화

변화(02)

전화를 걸며 물었다.

“어르신. 그 이야기, 언제 들으신 거예요?”

“어제 최종 통보를 받았다네. 모르고 있었나?”

“당연히 몰랐으니까 여쭤보는 거죠.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었는데.”

“예산을 아무리 쥐어짜도 뺄 구멍이 없다면서 미안하다고 사정을 하더구만.”

왜 이제야 그 말을 하는 것일까?

미리 이야기해 줄 수도 있었는데.

그러다가 어렴풋이 생각이 들었다.

‘아. 연말이구나. 예산 결정이 끝나는구나.’

시간이 넉넉할 거라 생각했던 예산 책정 마감일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의문!

되는 안 되든, 통보를 해 주는 거야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매번 나한테도 연락을 주다가, 왜 이번에는 최 옹에게만 연락을 하는 거냐고.

‘내가 모르고 지나치기를 바란다. 그거로군.’

내 속을 모르는 최 옹은 미안한 마음이 앞선 듯 했다.

“괜히 말해서 분란만 일으켰구만. 나이 먹어서 주책도 없이.”

“주책이 아니시죠. 학과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말씀을 하신 건데요.”

“그래도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으이.”

그 사이, 전화가 연결되었다.

-오! 성훈 군. 박람회 대박쳤다면서!

내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축하 인사부터 건넸다.

“네.”

무감정한 단답형의 말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뜨끔해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찔리는 구석이 없으면, 이러지 않겠지.’

하지만 노회한 그는 티내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압둘 왕자가 200만 불을 제안했다면서, 팔 건가?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시죠?”

-왜 묻다니, 당연히 자네가 결정해야지. 자네가 제일 큰 권리를 가지고 있질 않나?

돈을 번다는 데, 기분 나빠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도 사람이고, 돈 버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노력의 결과를 보상받는 것이 아니던가?

그는 칭찬을 이어갔다.

칭찬을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가만히 듣고만 있는데, 최 옹이 내 팔을 흔들며 달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성훈아. 잘 참았어. 흥분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그는 내가 무슨 통화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데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마워요.’

최 옹의 한 마디에 정신이 돌아왔다.

‘능구렁이 같은 양반. 비행기태우기는.’

총장은 쉴 새 없이 칭찬하며, 나를 띄워주고 있었다.

‘당신 의도는 뻔히 보이거든요.’

과연 총장은 내가 왜 전화했는지, 몰라서 이러는 걸까?

스스로 생각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일부러 요점을 피해가는 거지. 내가 장비 얘기를 못하도록 말이야.’

총장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긴 시간도 아닌, 단 이틀!

연말이 지나기 전에 예산의 편성이 끝나니까.

편성이 끝나고 각 과에 통보가 되면, 그때는 변경이 어려운 것이다.

그때까지만 내가 모르면, 그의 목적은 반 이상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미 내가 많은 이득을 거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좀 손해를 봐도,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내가 이득을 거둔 건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이지, 그냥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질 않나!

그리고 또!

운이 좋아서 이득을 거뒀다고 한들, 그렇기 때문에 손해를 봐도 된다는 논리가 어딨어?

그게 말이야, 방구야!

총장의 생각은 이해가 되었다.

‘내가 받아야 할 예산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다른 과에 좀 더 혜택이 돌아가겠지.’

그런 만큼 총장은 생색을 낼 기회가 생긴다.

전체를 조율하는 입장이니, 이해는 간다.

총장이라고 비난을 받는 게 좋겠는가?

하지만 그건 그쪽 사정!

‘내 사정을 더 깊이 배려했다면, 이런 말이 나올 리가 없지.’

멍하니 있다가 예산 편성이 끝나버리면?

그때는 ‘어쩔 수 없지 않냐. 사정을 좀 봐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오리발을 내밀겠지.

그때 가서도 수정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게 말이 쉽지, 지난한 일이거든.

이미 예산을 통보받고, 각 과에서도 예산에 맞춰 일을 진행시키는데, 그걸 전통 건축학과에서 억지로 뜯어갔다고 해 보라.

상상도 할 수 없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전통학과 때문에 예산을 변경되었다고 소문이 날 테니까.’

애초에 없었던 돈이라면 몰라도, 이미 받기로 한 예산이 줄어드는 것은 그 의미가 천양지차다.

그건 내가 강탈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적어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말이지.

그게 정당한 거라고, 우리가 한 일의 당연한 대가였다고 주장해 봐야 의미가 없다.

‘그들을 하나하나 설득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대판 싸움을 각오해야 하지.’

하지만 나는 학과 전체에 싸움을 걸 정도로 무모한 놈은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총장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하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리라.

어느 새인가 총장의 말에 휘둘려 나도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이대로 휩쓸리면 칭찬만 받다가 통화 끝나겠는걸.’

나이 지긋한 양반이 어찌나 혀가 부드러운 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뇌가 물컹물컹 녹아내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목적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 마음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흥분할 이유도, 그의 칭찬에 기분 좋을 이유도 없었다.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능구렁이 총장이었다.

‘내 기분을 성토할 것이 아니라, 거래를 해야지.’

얻을 것이 있으면 얻고, 필요 없으면 버린다.

그게 누가 되었건 말이다.

최 옹이 왜 저리 전전긍긍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어르신 입장에서는 총장이 구세주겠지.’

전통건축의 명맥을 이어줄 구세주 말이다.

물꼬를 내가 텄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받아준 사람은 총장이었으니까.

적어도 명목상,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그래서인지 대목장이 모은 사람들, 모두 다 총장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어.’

단지 장비를 구입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가 불거진 거였다.

‘대목장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내 사람이라구.’

총장의 사람이 아니다.

눈치를 봐도 내 눈치를 봐야 하고, 배려를 해도 나를 배려해야 옳았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당신들의 자리를 잡아주고 자존심을 세워주는 사람은 총장이 아니라, 나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야 했다.

또한 총장에게는 은근슬쩍 눈치 보며, 숟가락을 들이밀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야 했다.

‘여기서 관계를 확실히 마무리 지어야겠어.’

더 이상 총장이 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니, 총장의 손아귀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학과의 일에 대해서 배 놔라 감 놔라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두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그러려면 자금의 독립이 필요하지.’

“총장님 덕분에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너털웃음소리가 들렸다.

-허허허. 내가 뭐 한 일이 있다고, 다 자네들이 잘해 줘서 그런 거지.

그도 나도 서로를 추켜세웠다.

총장은 실무자들을 칭찬하면서도 내심 스스로 뿌듯한 것을 감출 수 없는 듯 했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윈윈하며 끝났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 싸움! 총장께서 먼저 걸어오신 겁니다.’

각오를 다졌다.

“저도 학교 홍보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래. 그래. 자네가 이번에 정말 큰일을 해 줬어. 올해 초에 제안했을 때만 해도 이런 큰 사고를 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말이야. 허허허.

그렇게 서로에 대한 칭찬을 끝냈다.

계속 듣고 있다 해도, 총장은 장비 구입 자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내가 그것 때문에 전화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대목장 어른께 장비 구입할 예산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 그거 말인가?

“예산이 없어서 다음에 사준다고 하셨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미안하네만 그렇게 되었다네.

그가 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대목장과 다 이야기가 된 부분이라네. 그도 납득을 했고.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 어린 내가 왈가왈부할 부분이 아니다.’라고 은근슬쩍 선을 긋고 있었다.

‘당신은 자신할 만하지.’

늙은 대목장이 저렇게 미안해 할 정도로 구워삶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했다.

토사구팽 당한 기분이랄까?

나를 일회성으로 사용하고 버리겠다는 의도가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당신 좋은 일을 시키려고 내가 사람들을 모으고, 이런 일을 진행한 게 아니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총장님. 저는 그 장비를 꼭 사야겠습니다.”

-허허. 이 친구야.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예산 결정을 바꾸는 것 말입니까?”

-그래. 알고 있으니 이야기가 쉽겠군. 예산이라는 건 학교의 일 년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이야. 우리 학교에 건축학과만 있는 것은 아니질 않나!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나도 고민이 많았다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도, 내게는 핑계로 들릴 뿐이었다.

‘총장, 당신의 머릿속에서 얼마나 갈등을 했고, 어떤 결론은 내렸는지는 관심 없어!’

무슨 미사여구를 사용해서 나를 설득한다고 해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명확했다.

아쉽지만 결과를 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가 있지.

제갈량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마속을 아꼈지만, 그의 목숨이 전쟁의 승리보다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장수들의 군기가 흐트러질까 두려워, 그를 본보기로 참했다.

제갈량의 신뢰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마속이 아니던가!

하지만 어느 날 전략적 실수를 했다.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

승패는 병가의 항상 있는 일이라 했다.

그가 과연 죽을 거라 생각했을까?

한 번 혼나고 다시 공을 세우면 상쇄된다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이거 웬 걸, 모가지가 달아났다.

그로서는 지극히 재수 없는 날이 아니었을까?

백 번을 잘하다가, 한 번의 실수로 목이 달아난 마속은 무슨 잘못인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제갈량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마속을 아꼈다는 게 아니라, 마속이 죽었다는 거다.

제갈량의 목적을 위해서!

‘같은 말 아니야?’

각자의 입장이 있겠지.

그의 입장에 내가 들어있지 않다는 게 문제지.

그에게는 별거 아닌 문제가 내게는 목숨을 좌우하는 문제가 된다.

그럼 내 입장에서 그를 경원시 하면 된다.

능력이 된다면.

안 되면, 찌그러져 있어야지.

어쨌거나 총장의 판단에는, 내가 학교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였다.

정리가 명료하지 않은가?

“그래도 저는 장비를 사야겠습니다.”

총장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어허! 답답한 사람 같으니! 그렇게 되면 자네들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해. 이미 예산이 어떻게 짜였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말일세.

“그렇겠죠. 학과장이나 관계자들이 모여서 예산을 기획했을 테니까요.”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말인가? 자네 혼자서 따돌림 당하면 학과가 제대로 돌아갈 것 같은가? 서로 상부상조해야지.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구체적으로 어떤 말들이 오간 겁니까?”

-그 장비를 구입하고 지원할 자금으로 학교 홍보를 하기로 했다네.

“학교 홍보요? 전통학과 홍보요?”

-아니. 우리 학교 홍보 말일세.

“학교 홍보 말입니까?”

-그래. 자네가 만든 결과는 꽤나 고무적이었다고 인정하네.

“그렇습니다.”

뻔뻔스럽게 들릴지 몰라도, 내게는, 우리들에게는 그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너무 당연하게 인정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너 혼자 했냐?’라는 말을 하고 싶겠지.’

총장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큼. 하지만 혼자 살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그 기세를 이어 받아서, 대학의 홍보를 더 해야 하지 않겠나?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말도 있잖나!

“그럼 홍보비 때문에 지원을 못하겠다는 말이군요.”

-못하는 게 아니라, 어렵다는 거지. 학교의 사정도 좀 이해를 해 주게.

“그래서 이득을 보는 건 누군데요?”

-누구긴 누구야! 우리 학교 전체지. 우리는 종합대학이야. 공과대가 아니라고.

총장이 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제안을 할 차례였다.

그에게 말했다.

“그럼 총장님. 이렇게 하시죠.”

그가 거부하기 어려운 한 수를 던지면 될 터!

거기서도 거부를 한다면, 하지 말자는 거지.

‘흥!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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