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74화
추종자들(04)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의 등장으로 인해 내 작품에 대한 평가가 변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박람회 초반에 왔었다면 논란의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랍 부자들의 눈치를 봐서 대상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그런 논란 말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대상은 우리 차지였다고.’
개장 초반부터 압도적인 인지도로 관객을 끌어모았으니 반론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결과에 딴죽을 거는 사람이 있어도, 저기 멀찍이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외교부 직원들이 알아서 정리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궁금하겠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되고 나면 내게 다가와 질문을 던져올 것이다.
기자들의 쇄도하는 질문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이제는 숨길 이유도, 피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사우디로 가게 된 경위,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내일이면 또 신문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겠지.’
지금의 내 인지도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깨고 나니 세상이 바뀌었다고 했던가?
그러나 아직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목표가 멀었다.
지금의 인지도는 내 주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기자들이 묻는 것은 김성훈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 궁금한 것보다는, 알리의 지인, 그리고 압둘과의 관계가 궁금한 것이었다.
‘언젠가는 건축가 김성훈이 주역으로 떠오르도록 더 정진해야겠군.’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인다.
그 금언을 아는 나로서는 더 정신을 차리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를 드러내고 세상과 부딪칠 시간이었다.
지금까지는 한 교수나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 뒤에 숨어서 일을 진행했었다면, 이제부터는 다른 상황이 되겠지.
질투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나를 경계하는 사람도 분명히 생길 것이다.
한 발만 잘못 삐끗하면 그들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정신 바짝 차리자고.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
박람회 일정이 끝날 무렵, 압둘이 다시 돌아왔다.
“아크람은 잘 배웅하고 오셨어요?”
내 질문에 압둘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그 노인네,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오한이라도 걸린 듯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까는 인상적이었지.’
이 거만한 두 왕자도 아크람 앞에서는, 조련사를 앞에 둔 두 마리 사자처럼 보였다.
그것도 이빨이 덜 자란 새끼 사자!
압둘이 말했다.
“오는 길에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같이 왔지?”
“누군데요?”
압둘이 돌아보더니 말했다.
“어이쿠, 들어오다가 기자들한테 붙들렸나 보구만. 저기 오네.”
반가운 얼굴이었다.
“성훈! 오랜만이야!”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이는 마이어였다.
유럽 건축 협회 부회장이라는 직함이 좋기는 한가보다.
비루했던 몸에 적당하게 살이 붙어 보기 좋았다.
“이런 행사가 있었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을 했어야지, 안 그래? 얼마나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를 껴안고 덩실거렸다.
“원래 계획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스티브 감독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거냐? 미국 쪽으로도 인맥이 있었던 거야?”
그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소세키들 기억하세요? 그 사람들이 데리고 온 거예요.”
“아! 그 친구들? 미국에서 잘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말이야.”
“저기 오네요. 소세키 상!”
소세키들과 마이어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 압둘에게 물었다.
“알리는 같이 돌아간 건가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공항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서 같이 오려고 기다리는 중이지.”
하긴 그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일단 사우디에 간다고는 얘기를 해뒀으니, 정확한 일정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라도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렇군요.”
마이어 쪽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마이어랑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엉?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뭘요?”
“프랑수와를 후원했다고 했지 않나?”
“그런데요?”
‘그거랑 마이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믿었던 프랑수와 호가 침몰을 했으니, 다른 배로 갈아타야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지 않겠나?”
그가 눈썹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이 계산 빠른 아랍인 같으니!’
“지는 석양보다는 떠오르는 태양을 후원하는 게 투자의 정석이야.”
그가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프랑수아는 팽당한 거네요?”
“그렇게 투자를 했는데도 그런 결과밖에 내지 못했으니, 그도 할 말은 없을 거야!”
짐작을 했어야 했다.
장사꾼이라면 응당 그리함이 마땅한 것이었지만 그때는 그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 과거의 인연들이 하나하나 모여들고 있었다.
자연스레 생각을 하게 되었다.
‘코펠은 그렇다 치고, 설마! 그리스 마피아까지 오는 건 아니겠지?’
***
보스턴 타임스 기자, 제임스가 중얼거렸다.
“대체 저 성훈이라는 친구는 뭐하는 사람이야?”
“그러게, 종잡을 수가 없네. 저런 친구가 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거지?”
제임스가 까칠한 턱을 긁었다.
“이것 참! 뜬금없이 튀어나왔다는 말이지.”
“내 생각도 그래. 저렇게 젊은 사람이 아랍의 왕족들과 어울리는 것만도 상상하기 어려운데 거기다 마이어 부회장까지?”
찰스가 말을 이었다.
“더구나 그는 차기 EU 건축 협회장으로 거의 확실시되는 인물이야. 거기다 압둘 왕자의 후원까지 등에 업고 있지.”
평범한 사람이 만나기에는 너무 거물들이 아니던가?
“찰스, 저 성훈이라는 친구, 뭔가 거물의 냄새가 풍기지 않아?”
제임스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찰스도 그의 말에 맞장구 쳤다.
“나도 자네랑 같은 생각인데. 우리 한번 파헤쳐 볼까?”
둘의 시선을 마주치며, 눈을 번뜩였다.
“그럼 당장 시작해 볼까?”
나가려는 제임스를 찰스가 붙잡았다.
“왜?”
“기다려 봐!”
“응?”
“아직 더 올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에이, 설마…… 또 있을라구?”
찰스도 턱을 긁으며 말했다.
“이건 내 기자로서의 감이야. 건축계의 거물이 올지도 모른다고.”
제임스도 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그래,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자네 감이 얼마나 맞는지 확인해 보지. 다른 것들이야 박람회가 끝나고 해도 늦지 않으니까.”
***
알리와 함께 들어온 이는 프랭크였다.
건설업계의 두 거목과 건축 설계 파트의 두 거목이 자리를 함께했다.
찰스가 셔터를 누르며 웃었다.
“거 봐! 내가 뭐랬나? 내 말이 맞지?”
“그래! 그 프랭크 베리가 올 줄이야. 전혀 생각도 못했어.”
이미 한국에서 방송을 탄 적이 있는 프랭크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던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제임스도 연신 싱글벙글하며 셔터를 눌렀다.
찰스가 말했다.
“이거 내일 메인 기사로 누굴 넣어야 할까? 한 명씩 다 찍어서 올리기도 뭐 하고.”
그 말에 제임스가 대꾸했다.
“고민할 거 뭐 있어? 저기 성훈한테 다 모여 있잖아. 다 같이 한 방에 찍어서 올리면 되겠지.”
기자에게는 이슈가 될 만한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있었던 팩트만을 전달하면 되는 것이다.
그에 따른 판단은 독자들의 몫!
그 말에 찰스가 투덜거렸다.
“그런데 그게 문제란 말이야!”
“뭐가 문젠데?”
“구도가 영…….”
“구도? 그게 왜?”
“이건 꼭 성훈이 주인공 같잖아.”
찰스 입장에서는, 아마 국제적 인지도에서 가장 비중이 딸리니까 하는 말이 아닐까?
보통 가장 유명한 인물을 중심으로 배치가 되는 것이 무난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런 배치가 된다. 어디에서나 힘의 논리는 통하니까.
문제는 비등비등하게 유명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이다.
‘구심점이 없다는 말이지.’
누구를 중심으로 잡을 것인가?
성훈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지만 신문을 보는 누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젊은이에게 관심을 줄 것이라는 말인가?
겨우 오늘 방송을 탄 신출내기를 말이다.
그나마도 스티브의 후광에 가려, 빛을 잃었겠지만.
‘누가 성훈을 알기라도 하겠어?’
찰스가 투덜거렸다.
“이래서 유명인이 많으면 사진 찍기가 어렵다니까.”
최상의 구도를 위해 누구 하나를 주인공으로 세우려면, 다른 나머지에게 양보를 받아야 한다.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
아랍의 권력자인 두 왕자들에게?
권위 하면 노벨상도 부럽지 않다는 프리츠커 수상자에게?
그것도 아니면 차기 EU 건축 협회장에게?
제임스가 놀렸다.
“자네가 가서 자리 좀 정리해 달라고 말해봐!”
“미쳤어? 날더러 맹수들 목에 방울을 달라고?”
제임스가 심플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럼 여기서는 성훈이 주인공 맞아! 박람회의 주인이니까. 나머지 네 명은 손님일 뿐이잖아.”
“크, 그것도 그렇군.”
“그럼 구도를 잡아보자고.”
그나마 제일 만만한 사람이 성훈이었다.
제임스가 큰 소리로 물었다.
“성훈 군,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그 말에 성훈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압둘, 알리는 저기 양쪽 끝으로 가서 서요.”
두 왕자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떴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놈이야 그렇다고 쳐도 나는 왜?”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알리!”
당당히 중앙을 차지해도 시원찮을 인물들이었다.
알리가 말했다.
“성훈! 난 아바마마를 빼고는 중앙을 양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흥! 알리, 나도 마찬가지라고.”
성훈이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여기서 찍으세요. 누가 중앙을 잡으실지는 두 분이서 의논하시고. 어차피 기자들이 찍고 싶은 것도 두 분일 테니!”
압둘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녀석하고 사진을 찍으라고? 내가 왜?”
알리도 험상궂은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나라고 네놈하고 찍고 싶은 줄 알아? 흥!”
둘이 말다툼을 하거나 말거나, 성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프랭크와 마이어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저쪽으로 가죠. 할 얘기가 많잖아요.”
알리가 다급히 성훈을 불렀다.
“어이, 성훈, 어딜 가나?”
“두 분이서 찍으시라고요. 아니면 독사진을 찍으시든지! 제임스, 이럼 됐죠?”
제임스에게 둘을 찍으라고 손짓까지 보내는데 전혀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 왕자가 당황한 듯, 성훈의 뒤를 따라갔다.
“이봐! 성훈, 아크람이 자네와 찍은 사진을 아바마마께 보여 드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자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성훈, 난 자네 친구라고! 친구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제임스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성훈이 주인공이라고 했잖아. 그치?”
“정말 그러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찰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셔터를 눌렀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제임스의 말에 찰스가 의문을 표했다.
“뭐가?”
“누가 갑인지, 누가 을인지 말이야.”
“설마 왕자들이 을이라는 말하고 싶은 거야?”
“어쩌겠나? 그렇게 보이는 것을?”
제임스가 확신하며 말을 이었다.
“이건 확실해. 저 성훈이라는 친구는 뭔가가 있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말이야.”
“음, 나도 동의하네.”
“더 올 사람이 있을까? 이제 시간이 촉박한데. 내일 조간에 사진을 올리려면 말이야.”
“더 미루다가는 다음 날 조간이나 가능할 거야. 먼저 일어나자고.”
그 뒤에 코펠과 울산 시장 등등, 몇 명의 사람이 찾아왔지만, 인지도에 밀려서 기사에나 실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가이드를 하러 나오는데, 성훈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미현이었다.
“성훈 씨!”
“미현 씨가 여기는 웬일이세요?”
“왜요? 제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한가요?”
“아뇨, 항상 현주 씨와 붙어 계시더니 따로 있어서 그러는 거죠.”
그녀가 성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성훈 씨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미처 몰랐어요.”
성훈이 피식 웃었다.
“제가 유명한 건 아니죠. 제 주변 사람들이 유명한 거지.”
“유유상종이라고 하죠. 그 사람들은 당신을 중심으로 모였고요.”
성훈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상황이 그렇게 된 것뿐이죠.”
그걸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이 남자에게 미현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 주변 사람들이라는 게, 자신으로서는 감히 친분을 논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으니까.
‘무딘 건가? 난 그 상황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게 더 무섭다고요.’
성훈이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좀 있다가 아빠랑 할아버지가 오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게 왜요? 저하고 관련이 있는 건가요?”
“우리 아빠가 현재건설 사장이거든요.”
“예? 전통 건축 관련된 분 아니셨어요?”
“네, 아빠가 건설업을 한다고 했잖아요. 예전에.”
“그랬던 가요?”
기억을 더듬는 성훈을 보며 미현은 확신했다.
‘이 사람, 그냥 둔한 거야. 현주야, 어떡하니?’
펜션에서 처음 보는 여자가, 그것도 지나가듯 이야기한 걸 누가 다 기억하고 있으랴!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음은 전혀 생각지 않고, 그저 친구 현주를 동정하는 미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