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73화
추종자들(03)
아크람.
그는 간교한 혀를 가진 모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현자에 가까웠다.
얄팍한 수단 없이 정석으로 상대를 하되, 진심으로써 상대를 감화시키는 타입.
이제는 몸에 배인 듯, 자연스러운 겸손함.
공자가 말했던가?
이미 천명을 알았고(知天命), 귀가 순해지는 단계를 지나(耳順), 하고자하는 바 그 뜻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를 몸소 보여 주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이기적이지 않았다.
‘그가 나를 데려가면 아크람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까?’
그의 목표는 단지 그의 주인인 국왕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다른 목적이 보였다면 아마 거부했겠지.
아니면 다음에 답변을 주겠다고 했던지.
‘은인이라고 부르면서, 그 자리서 해코지를 할 미친놈은 없거든!’
전 세계의 대사관들과 기자들이 모여 있었단 말이지.
나중에 해코지를 하면 어떻게 하냐고?
‘흥! 그때쯤 되면 난 이미 대비가 되어 있을 거라고. 그때는 되레 상대가 큰 코를 다치게 될걸!’
결심을 굳혔다.
이런 사람이라면 그의 진심을 확인하는 데 약간의 손해 정도야 감수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그를 믿어보고 싶었다.
‘까짓것 한번 가 주면 되는 거잖아.’
마음이 변하면 말투도 따라서 바뀌는 것인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집사님, 제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그가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떼쟁이 손자를 이제야 달랬다는 듯 자비롭기 그지없었다.
‘꺼내지 않았으면 몰라도 꺼낸 이상은 지킨다.’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식으로 납득이 불가능한, 비합리적인 것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가 내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이 아크람, 누구에게도 상식에 어긋나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내 앞에 서더니, 그는 자신의 팔에서 팔찌를 빼어 들었다.
“성훈 님, 팔을 내밀어 봐 주시겠습니까?”
“왜요? 그게 뭔데요?”
“이 팔찌는 선선선대 국왕께서 제게 처음으로 하사하신 물건입니다. 과분하게도 친구의 증표라 하시며, 저를 감동시키셨지요.”
손에 든 팔찌를 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저는 반백 년의 세월 동안, 하루도 이 팔찌를 몸에서 떼어 본 적이 없습니다.”
팔찌 또한 세월을 말하고 싶었음인가?
찬란해야 할 금의 광택은 간데없고, 은은한 시간의 흔적들만이 팔찌에 자욱했다.
그 팔찌는 분명히 아크람의 보물이었다.
그는 내게 인생의 보물을 내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귀한 걸 왜 제게…….”
나는 팔찌를 통해 전해지는, 오랜 세월의 농축된 무게감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은근하게 웃었다.
“보아하니 성훈 님께서는 많이 바쁘신 것 같습니다.”
“그야…….”
벌려놓은 일이 많으니 수습에 바쁠 것이고, 그나마도 앞으로 벌일 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내 마음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젊으시잖습니까?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겠지요.”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뭐!”
“성훈 님의 의도는 아니겠으나, 이 늙은이와의 약속을 잊으실까 염려되어 이리 무례를 범합니다.”
그는 시계가 없는 다른 손목에 팔찌를 채웠다.
이거 완전 고단수가 아닌가?
‘그래서 내게 팔찌를 끼우시겠다? 매번 볼 때마다 생각이 나도록?’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늙은 제게는 헐렁했건만, 성훈 님께는 꼭 맞는군요.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 같아 심히 마음이 놓입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구구절절 진심이 흘러나왔다.
부담되는 선물이었지만, 이제 와서 싫다고 물리칠 수도 없는 일.
‘그래도 이게 어디야. 언제고 마음 내킬 때 가면 되는 거잖아.’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긴장되었는지 알아?;
그의 부탁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의 말과도 맞먹을 정도로 권위가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잘 간수하겠습니다.”
그의 손을 다독이며 아크람을 안심시켰다.
내 약속에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제 주인께서 하사하신 이 팔찌를 알라의 부름을 받을 때, 제 팔에 끼고 가고 싶습니다.”
‘엥!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는 거 아니셨습니까?’라는 의미의 눈빛을 보냈다.
그가 목을 뒤로 빼며 미간을 좁혔다.
‘설마요?’
아크람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다만 걱정인 것은 이 늙은 몸이 얼마나 버틸지를 알 수 없습니다. 내일이 되어 알라의 부름을 받을지, 아니면 다음 달이 될지.”
액면으로 봤을 때는 당장 한 시간 후에 생을 다한다 해도 호상이라 할 정도의 노구였으니 그의 말은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그저 내가 황당했을 뿐이지만.
‘하긴! 아크람이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
내가 지레짐작을 했을 뿐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이 늙은이 온 힘을 다해 내년의 황혼이 저물 때까지는 버티어 보겠습니다. 콜록.”
지금까지 안 하던 기침은 왜 또 하는 건지?
홀이 대중들의 안타까운 시선으로 가득 찼다.
그가 기침을 갈무리하고 온화한 미소로 물었다.
“이 염치없는 노인의 무례한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이게 선물이 아니라, 일 년 한정 시한폭탄이었단 말이야?’
군중의 시선이 내게로 몰렸다.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의 눈빛!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저 늙은 집사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할 거냐?’
그들의 눈이 내게 묻고 있었다.
‘이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
황당한 눈으로 아크람을 직시했다.
여전히 그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대중들에게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다.
‘이 노인네가 언제 죽는지는 내가 잘 안다고!’
적어도 앞으로 십 년 이상, 그는 정열적으로 아랍의 발전을 위해 일할 사람이었다.
하나 무슨 말로 이 관중들을 설득할 텐가?
‘큭, 부탁을 들어준다고 할 때부터 호랑이 등에 탄 거나 마찬가지였어.’
아크람의 능구렁이 뺨치는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코가 꿰일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어?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이런 부탁을 거절했다가는 남은 선택은 적이 되는 것 하나밖에 없다고.’
아크람의 적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적.
어쩌면 알리와 압둘조차도 내게서 등을 돌릴지 모른다.
‘아크람의 존재감을 가늠해 본다면 당연한 걸지도.’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의 정중한 부탁을 거절하는 자와 어찌 동행할 수 있겠는가?
내 대답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알리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부를 때는 그렇게 안 오더니 쌤통이다, 녀석아!’
그의 눈에서 참깨가 볶아지는 것 같았다.
압둘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받아! 저 어르신, 화나면 무서워.’
겁을 주는 듯하면서도,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큭, 이 사람들이 이렇게 나왔다는 말이지? 두고 보자.’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민수를 슬쩍 쳐다봤다.
‘실제로 디자인을 그린 건 너잖아! 조각도 네가 했고.’
민수가 고개를 모로 돌렸다.
‘젠장!’
별수 있어? 고개를 끄덕였지.
“네, 꼭 되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집사가 감격한 눈으로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알라시여, 감사합니다.”
그가 내 양손을 부여잡고 당부했다.
“이 늙은이의 보물이오니, 부디 잃어버리지 마시고 온전히 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백발의 노인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집사님. 꼭 약속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할 일을 마치니 긴장이 풀렸던 것인지 그의 노구가 비틀거렸다.
알리와 압둘이 재빨리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그러게 집사! 내가 한다고 했잖아, 왜 고집을 부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알리의 타박에 집사가 몸을 꼿꼿이 세웠다.
“놓으십시오, 왕자님. 제가 부축이나 받을 정도로 약해 보이십니까? 박람회가 끝날 때까지 이 두 다리로 서 있을 겁니다.”
뭐! 박람회가 끝날 때까지?
오늘 마지막 날이라고! 당신한테 모든 시선이 모일 건데!
그리고 건강이 더 나빠지면?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사우디 궁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경 써야 할 거야. 그건 못해!’
알리를 향해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항의했다.
‘알리, 당신! 이렇게 나를 골탕 먹이고도 성할 수 있을 것 같아?’
아크람이 어려운 거지.
알리 정도는 내가 휘두를 수 있다고.
노회한 아크람에 비한다면 압둘이나 알리는 그야말로 말랑말랑 순둥이들이었다.
협박의 눈길에 알리가 움찔했다.
그가 초조한 눈빛으로 아크람을 압박했다.
“이제 돌아가세요, 아크람.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알리의 간곡한 부탁에 집사가 고집을 꺾었다.
“아이고, 허리야. 그럼 먼저 돌아가 있을 테니. 얼른 일을 마치고 돌아오십시오.”
집사가 발길을 돌리기 전 나를 향해 인사했다.
“그럼 빠른 시일 내에 뵙기를 희망하겠습니다, 성훈 님. 콜록! 콜록! 콜록!”
하여간 편할 대로 나오는 기침이군.
그러나 그에게 아랍 원로에 대한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인사했다.
“네, 알겠습니다.”
알리 왕자가 아크람을 배웅하기 위해 자리를 나섰다. 그가 압둘을 돌아보며 말했다.
“압둘, 자네는 배웅하지 않는 건가?”
압둘이 아차하며 따라나섰다.
“내가 그럴 리가 있는가? 같이 가세나.”
“그래야지, 당연히.”
아크람을 필두로, 아랍인들이 우르르 홀을 빠져나갔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 같군.’
남아 있던 관람객들을 모아, 박람회의 일정을 계속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항상 내 뒤를 메우던 관객들이 모두 사라진 느낌이 들었거든.
진공 상태가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이건 뭐지?’
아크릴 벽으로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 모두 내게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방금 전하고는 전혀 다른 분위기!
‘내 옆의 소피와 현주조차도 집중을 안 한다고.’
갑돌이와 모니터를 향해야 마땅할 시선들이 오롯이 내 뒤통수로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뒤통수가 근질거리다 못해 익을 정도였다.
너무 조용하여 집중하는 듯 보이나 은근히 가해지는 무언의 압박.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얼른 가이드를 끝내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평소였다면 무슨 관계냐고 편하게 말을 걸어왔겠지. 그 정도의 유대 관계는 만들었다고.’
제일 친근하게 말을 붙이던 미국 대사마저도,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네놈! 정체가 뭐냐?’
스티브와의 인터뷰를 할 때만 해도, ‘장하다’며 옆집 아저씨처럼 내 등을 토닥였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고, 그의 다물어진 입은 내게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얼른 말해줘!’
나도 집중되지 않기는 매한가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집중을 할 수 있냐고!’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옆의 여성 둘은 여전히 내 팔을 껴안고 있지만, 그 눈은 이계의 존재를 보는 시선이었다.
‘이런!’
아크람의 등장!
그 사건 하나가 나와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았다.
감히 범접해서는 안 될 사람!
딱히 압둘이 남기고 간 경호원 둘 때문은 아니리라.
그들조차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경외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일 대 백의 전투랄까?
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이랄까?
‘휴, 뜻하지 않게 신고식을 너무 호되게 치르는걸.’
형식적으로라도 가이드를 마감 지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종료를 알림과 동시에 플래시가 터졌다.
그들로서도 많이 기다린 것이리라.
봇물 터지듯 동시다발로 쏟아져 나온 질문이 그걸 증명했다.
“대체 저 아크람 수석 집사와는 어떻게 관계를 가지게 되신 겁니까?”
“사우디 왕가의 문장을 디자인하셨다는데 정말이십니까?”
“정말이시라면 왜 그동안 감추고 계셨던 겁니까?”
“압둘 왕자와도 굉장히 친근한 관계로 보였습니다. 무슨 관계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크게 질문을 하면서도 다가오지는 않는다.
단지 한 사람이 왔다 갔을 뿐인데, 나를 보는 시선이 180도 달라졌다.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었다.
정치가였다면 압도적인 장점이었겠지만.
‘내가 하기 나름이겠지.’
그와 동시에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또 올 사람이 없나?’
아크람은 스티브의 방송을 보고 왔다고 했었다.
‘내 기억에는 독일 어딘가에도 내가 방송 타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화려한 출발을 예상하긴 했지만 결과는 그것을 훨씬 벗어났다.
‘이건 도약 정도가 아니라, 수직 상승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