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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272화 (272/427)

건축의 신 272화

추종자들(02)

그동안 기본이 부족하다 생각하며, 나를 감춰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 박람회를 통해 나를 드러내려 했었지.’

눈앞의 이 노인은 그런 내 심정을 꿰뚫어 보듯이 아는 것 같았다.

그랬으니 2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있다가 징후가 드러나자 득달같이 달려왔을 것이다.

찌르르르.

등줄기로 흐르는 전율이 귓가에 들렸다.

‘세상에는 이런 인물이 널려 있다는 건가?’

그저 그런 인물인 줄로만 알았다.

그저 아랍이라는 동네에서 존경 좀 받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하지만 그건 내가 지난 삶에서 신문으로 읽었던 사실을 기반으로 한 내 편견이었다.

실제의 그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과연 내가 그에게 정면으로 승부를 붙는다면, 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팔순에 가까운 그는 겸허하지만 당당했고, 머리는 새었으나 눈빛은 이십 대 못지않게 형형했다.

손자는 ‘지피지기백전불태’라 했건만 나는 그를 십분지 일, 아니, 백분지 일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지금 피해 간다고 별다른 수가 있을까?

‘아니, 피할 수나 있을까?’

스티브의 인터뷰가 방송되고 나서 처음으로 나를 방문한 사람이었다.

‘지금 도착을 할 정도라면 적어도 방송을 보자마자 사우디에서 바로 출발했다는 말이잖아.’

일단은 정면 돌파!

그를 직시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정확히 보셨군요.”

원하던 대답이기 때문이었을까?

그가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다시 한 번 은인께 인사드립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수석 집사, 아크람입니다.”

한층 더 정중한 목소리의 인사였다.

그에게 물었다.

“왜 자꾸 제게 은인이라 하십니까? 저는 딱히 왕가에 은혜를 입힌 적이 없습니다.”

부담스러움을 드러냈다.

관계에 있어서 부담이란 걸림돌과도 같은 것.

친구 사이든 남녀 사이든 마찬가지 아닐까?

하지만 그는 이제는 트레이드 마크로 보이는 예의 온화한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성훈 님께서 디자인한 문양은 국왕께서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대번 왕께서 국가의 문장을 바꾸라 명하셨으니까요.”

‘이러니까 부담되는 거라고!’

내게는 그 문양이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것은 압둘에게 패배한 알리를 달래기 위해 땜빵용으로 급히 만들었던 거였다

물론 결과물은 땜빵의 품질이 아니었지만.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해석자의 견해에 따라 똑같은 꿈이라도 해몽이 다르지 않던가?

요행히 운때가 맞아, 그렇게 된 것이었다.

‘얻어걸린 게 이렇게까지 돼 버리면 왠지 목에 걸릴 것 같다고.’

지금 같은 경우는 걸려도 크게 걸린 거였다.

능력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지금 이대로만 가도 충분히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데, 쓸데없는 무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선을 그어놓지 않으면 곤란하겠는 걸.’

그에게 말했다.

아마 이때의 나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던 것 같다.

“아크람 집사님, 그땐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운이라…… 운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는 내 말을 음미하듯 곱씹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운이었던 거죠. 저는 은혜를 입히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단호하게 말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운이라는데 뭐라고 할 거야. 사실이기도 하고.’

그가 눈을 지그시 감고 물었다.

“은인께서 말하는 운이란 이런 거겠지요.”

그는 시를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오십 년 전이었습니다. 별조차 숨어버린 칠흑 같은 사막의 밤이었습니다. 상단에서 서기로 일하던 저는 실수로 일행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곧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사막의 밤은 자비를 모르니까요.”

“그때 저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 자리서 죽을지, 아니면 무작정 걸어가다 죽을지. 절망적이었지요. 사막에서 별을 볼 수 없다니 말이죠. 그런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때 저는 알라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고개를 갸웃했다.

‘왜 느닷없이 신앙 고백이야?’

그가 말을 이었다.

“절망감에 저는 비척거리며 정처 없이 떠돌았습니다. 버림받은 제가 죽는다고 한들, 알라의 품에 안길 자격이 있을까요? 무슬림들에게 알라는 시작이자, 끝이 되시는 분이니까요. 길을 잃어버린 저는 사흘 밤낮 동안 황야를 헤매야 했습니다. 낮에는 이프리트*조차 참을 수 없는 갈증으로, 밤에는 죽음을 종용하는 샤이탄*의 마수를 견디며 사흘이 지났을 때, 저는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알리와 압둘은 그 내용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도 눈을 감고, 아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경청하고 있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에 발을 걸치고 있는 저를 구해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운이 있을까?

하지만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분은 선선선대의 국왕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의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 스스로 집사라 하나, 그 권위는 장관을 능가할 정도였다. 국왕 말고는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국왕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선대의, 그 선대의, 다시 선대의 고명대신이었다.

죽을 자가 되살아나 국가에서 존경받는 집사가 되었으니, 운이 좋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가 물었다.

“저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김성훈도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으니 운이라면 질 수 없지만 그의 운도 나 못지않았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는 사막의 태양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은인!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알라의 뜻이라 말합니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냐고요!’

다급히 반박했다.

“집사님, 그건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저는 집사가 되기를 의도한 적이 없습니다.”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제 인생은 제가 의도한 대로 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거 심각한데. 이런 논리로 접근하면 꼼짝없이 그의 의도대로 된다고.’

종교보다 더 논리적이지 않은 게 또 있을까?

그가 못을 박았다. 지극히 종교적인 관점에서.

“알라를 신봉하는 자가 그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곧,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하이고 돌아가시겠네.’

“그깟 문…….”

말을 하다가 다급히 입을 닫았다.

그깟 문양이 지금은 사우디 왕가의 문장이었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큰 실수를 할 뻔했네.’

내가 만든 거지만 지금은 내 것이 아니었다.

입술을 혀로 한 번 핥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했다고 초대까지 하시려는 겁니까?”

“비록 의도는 없었다 할지라도, 그 결과가 알라의 뜻을 대신했으니 성훈 님은 제게 은인이 맞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그러니까 그 문양이 뭘 했느냐고요. 그리고 저는 알리 왕자님께 문양의 대가를 받았다고요.”

“그 문양 하나에 왕가가 화목해지고 질서가 잡혔으니 그 결과가 적다 할 수 없겠지요. 제가…… 몇십 년 동안 이루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모릅니다, 하나……. 그 문양을 국왕께서 선택한 뒤로는, 제가 할 일이 없을 정도로 궁이 화목해졌습니다.”

평온한 어조였지만 그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에게 내가 만든 문양이란, 부적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것도 만사형통의 부적!

아크람이 말을 이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었지요. 제 인생은 의도한 바대로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노 집사의 침통한 음성이 내 가슴에 맷돌처럼 얹혀졌다.

답답한 마음에 알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좀 해봐요. 이 양반아!’

알리가 나서며 말했다.

“아크람, 성훈에게 너무 부담을 주지 말아요. 녀석은 은혜라고 하면 불편해한다고요.”

사실 알리라고 왜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몇 번이나 사우디에 들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돈으로 가능했다면 벌써 했을 것이다.

하나 압둘의 말을 들어본 결과,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스포츠카도 싫다, 요트도 싫다.

거의 강제로 안기다시피 한 게 시계 하나였다.

그것도 가격을 속여가면서 말이다.

압둘이 말했었다.

‘내가 선물하면서 마음 졸이기는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고.’

그 내력을 아는 알리는 그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야무야 미루던 것이 지금까지 온 것이었다.

아크람이 엄한 눈으로 알리를 바라보았다.

“왕자님, 은인께 녀석이라니요.”

“하지만…….”

“저를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시다면, 제 앞에서는 그런 말씀을 말아주십시오.”

사막의 카라칼이라 불리는 알리 왕자가 집사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압둘이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줬다.

‘그냥 가만히 닥치고 있으라고.’

알리가 모래 삼킨 조개마냥 입을 닫았다.

아크람이 다시 내게로 눈을 돌렸다.

“왕자님께서 드린 그깟 돈 몇 푼이 어찌 왕가의 화목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째 몇 억이 저 동네만 가면 몇 푼이 된단 말이야.’

진지한 상황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돈을 벌려고 아등바등거리는 것도 우습고.

아크람의 말이 들려왔다.

“어쩌면 이게 제가 제 주인께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보답일지도 모릅니다.”

‘엥, 저게 무슨 소리지?’

“집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늙은이가 이제 나이가 많아, 언제 알라의 부르심을 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성훈 님.”

‘저 노인네가 누구 앞에서 구라를…….’

내가 지난 삶에서 당신의 부고를 본 게, 채 삼 년이 안 되었다고!

그때 내가 굉장히 부러워했었거든.

‘아따 그 양반, 오 년 정도만 더 살았으면 한 세기를 채웠을 텐데.’

지금 팔순이 지났으니, 구십을 넘겨서 타계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앞으로도 십 년은 넉넉하게 산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기 수명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내일이라도 알라의 부름을 받는다면…….”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잖아.

‘내가 이 노인이 언제까지 사는지 안다고!’

그리고 이미 분위기도 내 편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의 편이었던 아랍인들, 지금은 각국의 대사들까지 아크람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몰염치한 놈이 되게 생겼다고.’

어쩌다 이렇게 일이 꼬였는지.

하지만 아직 나는 저 아크람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저 온화한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내가 의심이 많은 것일까?

사우디의 왕좌는 세 번이나 주인을 바꿨지만, 그 왕국의 수석 집사는 5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세 번의 왕위 다툼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랍 정치 세계의 중추에서 중재를 담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의 전면에 나선 적이 없었으니, 뒤에서 관계들을 조종했겠지.’

비록 집사의 신분이나, 젊은 시절부터 왕을 보좌하며 중동의 나라들과 폭넓은 교류를 해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랍 국가들의 전쟁을 막아 왔다.

어찌 그런 사람이 보통 사람일 수 있으랴!

‘그는 문양 하나의 은혜를 말하지만 다른 내막이 있을지도 몰라.’

그가 죽었을 때, 사우디와 적대적인 아랍의 국가들조차도 그의 생에 있어서만큼은 흠집 하나 남지 않기를 기도했을 정도이니 비열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깨끗한 삶을 살았지.’

그러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법.

나 같은 범인이 상상하지 못할 이유 말이다.

내 고민을 간파한 것인가?

아크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은인이시여, 저는 주인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알라의 뜻을 받들어 처신했고, 제 양심에 어긋난 짓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또한 사람을 대함에 있어, 맹세코 표리부동한 행동을 보인 적도 없습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알리나 압둘은 그가 자신들의 일인 양,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휴, 부처 앞에 손행자가 된 기분이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는 내게 파격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명예와 권위를 가진 자가 쉽게 빠지는 자가당착, 강요하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강요가 되는 것!

아크람은 내게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다.

지극정성으로 부탁을 했을 뿐이다.

자연히 마음속의 저울은 아크람에게로 눈금을 옮겨 가고 있었다.

*작가주

*이프리트 : 연기의 마신.

난폭하고 강하며, 추한 용모를 가지고 있다.

알라딘의 램프에 등장하는 ‘지니’가 아랍의 요괴 ‘이프리트’이다.

*샤이탄 : 이슬람에서의 악마.

신을 배반한 자이며, 전염병을 퍼뜨리고 인간에게 악을 불어넣는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천사였다는 설도 있고, 이슬람 요괴인 ‘진니’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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