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68화
각자의 하고 싶은 것(02)
스티브가 흐뭇하게 웃으며 손뼉을 마주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관객들을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라고.”
자신의 전문 분야이기 때문인가?
스티브는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갑돌이로 가이드하는 것. 그것만 있어서는 다큐멘터리야. 다큐는 재미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어.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리지.”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직시했다.
“그런데 자네가 하는 부스는 항상 사람이 넘쳐! 그야말로 인산인해지. 이유가 뭐라고 보나?”
“그건 제가 컨트롤에 가장 능숙하기 때문 아닐까요?”
그는 손가락을 저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정답은 아니야. 그건 자네가 했기 때문이야. 다른 친구들이 하는 건, 다큐였어. 재미없어. 하지만 성훈, 자네는 안내를 하면서 재미있는 부분을 적절하게 부각시키지. 거기다가 관련된 고사나 전설들을 중간중간에 말해주더란 말이야. 그렇지?”
그가 내게 눈을 맞추며 동의를 구했다.
익살스럽지만 여유 있으며, 순수한 눈빛이었다.
“네, 그랬죠.”
나는 영어에 능했고, 다른 학생들에 비해 전통 건축에 관심이 있었으며, 갑돌이의 컨트롤에 능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들과 근본적으로 달랐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아니, 어떤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비밀 말이다.
지난 삶의 모든 것이 쓸모없다고 스스로 비관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살며 머릿속에 쌓인 것들, 살다보면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던 것들, 소파에 뒹굴며 봤던 TV 내용들.
‘쓸모없는 시간은 없다는 거군.’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인생에 전혀 쓸모없는 것으로 천대받던 게임이 E-Sports라는 이름으로 날개를 편다.
게임으로 억대 연봉자가 생긴다.
세상은 변한다.
스티브가 확신에 찬 어투로 결론을 내렸다.
“자네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야!”
그가 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까 자네 앞에 있던 관람객들은 석굴암이 뭔지, 팔상전이 뭔지 몰라! 그저 아름다움에 감탄을 했을 뿐이지. 하지만 자네는 달랐어.”
스티브는 아까의 가이드를 생각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적재적소에 재미있는 멘트를 넣음으로써,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했단 말이야. 모형으로만 존재하던 건물에 설화의 인물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는 거지.”
그가 반개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신라의 경덕왕? 삼국유사? 나는 그런 거 몰라. 그런데 몰라도 돼. 왜? 재미있잖아. 그게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과 뭐가 달라. 자네의 안내에 나는 흠뻑 빠져서 봤다고.”
그는 눈을 감고 지휘라도 하는 것처럼 흥에 겨워 아까의 광경을 상상하며 상체를 흔든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그것도 내가 이래라 저래라, 맘대로 할 수 있는 영화!”
혼자 침을 튀기며 자신의 감상을 말하고 있었다.
“세트 다 있겠다. 갑돌이라는 주연 배우 있겠다. 거기다가 전통 건축이라면 빠삭한 감독 있겠다. 더 뭐가 필요해!”
그가 벌떡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영화 한 편을 찍어도 된다고! 이런 재능이 있는데, 왜 영화를 안 한다는 말이야? 그건 재능의 낭비라고.”
그의 말에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기, 승, 전, 영화냐? 이 양반아!’
순수하고 재미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가 간절한 눈으로 나를 설득했다.
“성훈! 그러니까 자네는 영화를 해야 해! 나랑 영화 찍자고. 감독시켜 줄게. 응?”
파격적인 말이었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다.
내 꿈과는 다른 길일뿐더러, 최고로 잘 대우해 준다고 해도, 모형을 관리하거나 스티브의 보조역이지, 감독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잖아. 내 뭘 믿고?’
하지만 그의 정성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스티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요. 당신은 내가 만든 영화를 그 자체로 즐겼어요.”
스티브는 고개를 주억였다.
이번에는 나를 가리켰다.
“하지만 나는 이 건축물을 재미있게 보여 주기 위해서 영화 한 편을 만들었어요.”
“그렇지.”
그는 내 말뜻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 했다.
스티브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게 나와 당신의 차이예요. 당신에게는 영화가 목적이지만 나는 건축이 목적이에요. 영화는 단지 그걸 잘 보여 주기 위한 수단일 뿐!”
그래도 그는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재능이 아깝지 않나? 내가 보증해. 자네는 영화 분야에서 단연 돋보이는 감독이 될 수 있어!”
그의 칭찬에도 내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내 목적은 건축! 그걸 바꿀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스티브가 목을 앞으로 빼며 물었다.
“그리고 또 뭐?”
“감독이라면 나도 원 없이 해봤습니다.”
“정말? 어디서? 어느 영화야?”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공사 현장에서 현장감독을 해봤죠.”
“에이, 그거랑 이거랑 같아? 이건 영화의 전반을 기획하고 책임지는 자리라고.”
스티브의 자부심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그의 말에 지그시 웃어주었다.
영화감독이나, 현장감독이나 다를 게 뭐 있나?
분야가 다르다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현장감독도 그만큼 기획하고 책임지는 자리라고 항변해서 무엇하랴!
생각의 기준이 다를 때, 가끔씩은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아무튼 전 영화 쪽으로는 관심 없습니다.”
“흠……. 각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단호한 내 말에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를 소세키가 어깨를 감싸며 위로했다.
“스티브, 우리로 만족하라고. 성훈 사마께서는 더 큰일을 하실 거라고. 크크크.”
위로하는 건지, 약 올리는 건지는 애매했지만.
“알았으니까, 그만 놀리시지. 소세키.”
실망한 스티브에게 말했다.
“만약 제 일을 하는데, 영화 계통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스티브 당신과 제일 먼저 상의할게요.”
“당연히 나를 찾아야지.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오도록 하지. 성훈.”
스티브.
그는 알아 두면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건축이란 영화와 비슷하다.
하나의 장대한 드라마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보금자리’를 짓는 일이다.
인간은 집에서 일생 동안 숨 쉬며 살아간다.
그저 쉬는 ‘둥지’가 아니라, 단지 생존을 위한 ‘피난처’가 아니라, 꿈을 키워가고 미래를 설계하는 삶의 ‘터전’이다.
거기에는 추억이 있어야 하고, 삶의 드라마가 있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가 그러하듯, 철새처럼 메뚜기처럼 해마다 자리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태어나고, 아이를 키우고 마지막 숨을 내쉬는 날까지 함께하고 싶은 집을 만들고 싶다.
‘수억 명의 인구가 있다면 수억 개의 드라마가 펼쳐지겠지. 과연 이게 영화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 말할 수 있다면 오만한 것이다.
그리 말할 수 있는 자는 떠돌이 뿐일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만들어 갈 건축은 이런 것이었다.
미래에 대해, 인간의 상상력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영화감독이지 않을까?
왜 그에게 도움받을 것이 없겠는가?
길가의 돌멩이에서도 깨달음을 얻는다고 했거늘.
그가 인간에 대해 고민하는 만큼 나도 그들의 삶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숙고할 것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주방을, 취미가 낙인 자에게는 서재를 겸한 작업 공간을, 단란한 가정을 꿈꾸는 가장에게는 넉넉한 거실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해 주는 것.
그것이 건축가가 건축을 대하는 가치가 아닐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집을 만들기 위해!’
‘발전을 고민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건축가란, 벽돌로 집을 지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어느 자리에 있건, 얼마나 나이를 먹건, 그 기본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진심에 호의로 답해야 할 것이다.
“스티브, 당신도 건축에 관련된 일이 있으면 저를 찾으세요. 제 팀원들을 설득해서 도와드리라고 할게요.”
그 말에 스티브의 입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정말? 그래 줄 거야?”
“그럼요. 좋은 재능은 써 먹어야죠.”
적절한 거래이지 않은가?
그는 손재주 좋은 장인을 구하기 위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나는 장인들에게 명성을 높일 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더 나아가 그들의 실력도 한층 업그레이드할 수 있겠지.’
제아무리 명검이라 한들 갈고 닦지 않는다면, 녹밖에 남는 것이 더 있겠는가?
그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제 작품에 대해 언급할 일이 있으면 좋게 말해주세요. 알겠죠?”
“이를 말인가? 내 입이 닳도록 칭찬해 주지.”
그의 대답을 들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거래 완료, 내 작품을 칭찬할 기회는 머지않아 올 거야.’
주머니의 송곳은 어떻게든 두각을 드러낸다.
그리고 저런 어설픈 변장으로는 들통이 나도 진작 났어야 하는데 아직도 정체를 감추고 있다는 건, 기자들이 내 작품 말고는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스티브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 뜬금없어서 감지를 못하는 것이리라.
모르면 가르쳐 주면 된다.
우물을 파야 목을 축이고, 밭을 갈아야 배를 채운다.
‘그리고 그건 답답한 녀석이 하는 일이지.’
이렇게 스티브한테 약을 쳐 뒀는데, 박람회가 끝나고 나서 스티브가 아무리 칭찬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
죽은 놈 불알 만지기랑 뭐가 다른가?
만사형통에는 때가 가장 중요한 법!
‘내일 아침에 기자들한테 떡밥이라도 던지라고 해야겠네.’
워낙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 약간의 떡밥만으로도 기자들이 흥미를 가지겠지.
호언장담하는 스티브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하라고, 스티브. 당신의 칭찬에 따라서 내가 보내 주는 장인들의 수준도 달라질 테니까.’
다음 날 아침.
민수를 보내서 찔렀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지, 그저께 나와 인터뷰를 했던 미국 기자가 스티브를 알아봤다.
“혹시 스티브 감독님 아니십니까?
“맞습니다만.”
기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모습으로 스티브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감독님, 그런데 어쩐 일로 예까지 오셨는지.”
하지만 스티브의 인지도는 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질문할 새도 없이, 플래시 세례가 잇따랐다.
예상하지 못했다면 짜증이 났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민수를 향해 남몰래 엄지를 세웠다.
‘잘했어!’
스티브가 근엄한 목소리로 기자들에게 말했다.
“지금은 성훈의 가이드를 즐기고 싶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스터 소세키가 재미있는 일이 있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이런 즐거운 일이 있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하하.”
스티브가 말했다.
“지금은 인터뷰를 할 시간이 아닙니다. 이 감동을 더 맛봐야 할 시간이죠.”
“인터뷰는 성훈 군의 가이드가 끝난 후에 시간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그 말을 끝으로 스티브는 현주가 가져다 준 자신의 지정석, 앉은뱅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느긋한 스티브와 달리 기자들은 바빴다.
“영화계의 거장 스티브 감독이라고!”
“그래, 맞아! 이건 신문 지면으로만 대체할 기사가 아니야! 이 조그마한 나라에 그가 왜 왔겠어?”
기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당장 카메라맨들을 불러오라고. 당장!”
“안 되면 다른 방송국에서 빌려서라도 와! 얼른 움직이자고.”
가이드가 끝나고 돌아섰을 때,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방송국에서 스티브를 인터뷰할 준비를 끝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기자가 물었다.
“한국에는 처음 방문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문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스티브는 긴장하지 않았다.
그가 온 이유와 이곳에서 느낀 점을 담담하고 재치 있게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운명이었습니다, 아니, 신의 안배였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렇게 시작된 그의 인터뷰는 과장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축소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겠다는 듯, 여기에서 느낀 점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 순간, 박람회의 주인공은 스티브였지만 나는 즐거웠다.
‘스티브는 내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고! 어설픈 평론가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감독이 말이야. 세상에 이런 홍보가 어디 있겠어?’
박람회가 끝나면 그동안 박람회가 한국에서 차지하던 위상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전 세계의 방송국에서 전파를 탈 테니까.
돈을 주면서 취재해 달라고 해도 오지 않을 방송국에서 지금 내 작품을 찍고 있다.
스티브 한 명 때문에!
‘스티브!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