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65화
음모(09)
압둘이 말했다.
“탈랄. 아까 그놈, 뭐하는 놈인지 알아 봐.”
그의 명령은 채 5분도 안 되어 수행되었다.
“왕자님. 대사를 데려왔습니다.”
압둘은 본국의 대사에게 힐끗 눈을 주고는 말했다.
“거기 앉게나.”
“네. 전하.”
그는 말없이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
“영광입니다. 왕자 전하.”
대사는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들어 입만 축이고는 바로 잔을 놓았다.
그리고 바로 압둘이 원하는 답을 말했다.
“마에다는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는 자입니다. 직급은 총영사이지요.”
“그래?”
“네.”
“간단하게 말하지.”
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청하겠습니다. 전하.”
“내가 그놈 때문에 기분이 심히 불쾌하다.”
“그러시온지요.”
“이유를 설명해야 하나?”
대사는 지긋이 웃으며 답했다.
“그러실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저희는 왕가를 대신해 파견된 손발입니다.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짜증은 나는데 말이야. 명색이 왕자라 함부로 움직이기도 어려워. 곤란해. 곤란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대사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일본 대사를 오라고 할까요?”
압둘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기분 나쁘다고 남의 나라 사람을 불러서야 되겠어? 걔들도 기분 나쁘지.”
“손발에 감정이 어디 있습니까? 오라면 와야지요.”
“쩝. 귀찮은 일은 싫은데 말이지.”
이미 왕자의 마음은 정해졌다.
부르는 방식은 대사관에서 하기 나름.
대사가 말했다.
“왕자님. 일본 외무성에 공문 한 장만 띄워도 되겠습니까?”
“뭐하려고.”
“간이나 한 번 보시지요. 우리 뜻대로 움직이는지, 그렇지 않은지요.”
“뭐라고 띄울 건데.”
“기름 값 인상 가능성이 있다. 일본에만…….”
“훗! 똥줄 좀 타보라 그건가? 인상 사유는?”
대사가 피식 웃었다.
“멀어서 힘들다. 우리 기름으로 너희들이 돈 많이 벌어서 배 아프다. 등등. 명분은 붙이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인상할 건데?”
대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루에 0.1%를 인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헉! 0.1%나? 그래도 될까?”
“자기들이 답답하면 연락을 주겠지요.”
“크크크. 알겠네. 외무장관에게 바로 연락하지.”
왕족이 지배하는 사회, 왕위 계승권이 있는 압둘에게 있어서, 장관에게 부탁하는 것은 일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힘이 세건 그렇지 않건 그건 문제가 아니다.
우물은 목마른 놈이 파는 법이니까.
“전하. 남의 나라 손발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지요.”
대사가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제 발로 찾아오는 거야. 어찌 말리겠습니까만.”
압둘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국제 관계에 대해 뭘 알겠나? 자네 같은 베테랑이 있으니, 믿고 맡길 뿐이지.”
이제 방법은 정해졌다.
실행 가능성 100%!
답답한 것은 일본이지, 자신들이 아니었다.
대사가 물었다.
“혹여 부스에서 원조 갑돌이를 조정하던 성훈 님에 관련된 일이온지요?”
“응? 그걸 자네가 어찌 알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애지중지하시던 시계를 차고 있지 않았습니까?”
압둘이 미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네. 알고는 있었지만, 저희가 어찌 전하의 친구 분께 먼저 아는 체를 하겠습니까?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지요.”
그 말에 압둘이 콧수염을 쓱 쓰다듬었다.
“그래. 잘했어. 자네들이 아는 척하면 녀석이 눈치를 챘을지도 몰라.”
그리고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참! 그때는 수고들 많았네.”
공항에서의 관세 문제를 말하는 것이리라.
“지시하신 대로는 하였으나, 전하의 성의가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 속이 상했습니다.”
수억을 호가하는 시계를 몇 백으로 둔갑시키라니, 그런 지시를 하는 사람도 있었던가?
몇 백짜리 물건을 몇 억으로 과장하는 거면 몰라도 말이다.
“됐어. 몇 푼 안 되는 거 가지고 생색내는 것도 그렇고, 비싸다고 집에 모시고 있다가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낫지. 덕분에 알아볼 수 있었다며?”
대사가 압둘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하셨군요. 현명하신 선택이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물일 테니까요. 하지만 알게 되면 어찌 하실는지요?”
압둘이 쓴웃음을 지었다.
“몰라. 끝까지 모르기를 빌어야지. 알게 되더라도, 모른다고 사기 쳐! 저놈 성깔에 알게 되면, 빚을 갚던지 돌려보내겠지만……. 아니지. 돌려보내겠지. 빚지는 건 또 무지하게 싫어하는 녀석이니.”
오지도 않을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싫은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대사. 오래는 못 기다린다네. 한 시간 내로 내 앞으로 데려오게.”
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
종로경찰서에 일본 대사관의 항의전화가 왔다.
분노한 일본대사의 음성이 서장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무리 공공장소에서 추태를 부렸기로서니, 외국인을, 그것도 대사관저의 직원을 그런 식으로 연행할 수 있는 것이오?
반백의 서장이 허리를 굽실거렸다.
‘왜 나한테 전화를 하고 지랄이야! 억울하면 공문 넣으라고!’
이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차라리 이렇게 전화를 받는 것이 나았다.
절차가 복잡해지면, 자신의 상관들이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어떤 놈이 되던, 한 놈은 책임지고 옷을 벗어야 하지.’
안타깝게도, 그 어떤 놈은 서장 자신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더 위에 있는 상관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 위에, 그 위에가 다 잘려나가도 확실한 것 한 가지!
‘나는 무조건 잘려나간다는 거지!’
상관의 경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말이다.
그런 관계로 거만한 태도의 대사였지만, 오히려 그가 고마웠다.
“대사님. 그런 것이 아니오라, 다른 대사관…….”
대사의 호통이 이어졌다.
-더 말하기 싫소! 대사관의 사람을 보낼 터이니, 당장 풀어주시오.
“그래도 다른 대사관의 눈도 있는데, 저희도 면피는 해야…….”
그러나 대사는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지금 바로 해결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소. 반드시 한국 정부에 항의할 것이오.
“대사…….”
뚜뚜뚜.
콰직. 뿌직!
애꿎은 전화기만 반쪽이 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개 쌍노무 새끼! 사람이 말을 하는데, 끝까지 듣지를 않아!”
남은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었다.
-네. 형사…….
“아까 잡아온 쪽발이 새끼 풀어줘!”
-네? 서장님. 하지만…….
“한 따까리 할까?”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이따가 쪽발이들 온다고 했으니까, 넘겨줘. 그리고 다른 대사관에서 어떻게 됐냐고 물으면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끊어!”
지금 어딘가 에서는 또 한 대의 전화기가 부서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장은 그걸 고려할 정신이 아니었다.
“아 씨! 정신 사납게. 지들끼리 치고받을 것이지, 왜 애꿎은 민중의 지팡이를 괴롭혀! 쌍노무 새끼들. 우리가 봉이야? 엉?”
냉수를 마시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귀를 세차게 후볐다.
“아 또! 귀는 왜 이리 간지러워! 아 진짜!”
***
“칙쇼. 왜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리는 거야. 우리 일본이 우습게 보여!”
씩씩거리며 의자 팔걸이에 팔을 걸쳤다.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감히 한국의 경찰 따위가 끌고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국 정부에 항의 서한을 넣을 수 있었음에도 간결하게 처리를 한 것은 마에다의 언행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에다. 그 경박한 놈은……. 쯧쯧.”
그래도 어이하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혼낸다고 해도, 자신이 혼내는 게 나았다.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따끔하게 주의를 줘야겠군.”
인터폰의 빨간 불이 깜박였다.
“뭔가?”
-대사각하. 본국의 외무대신께서 긴급 연락이 보내오셨습니다.
대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왜 이리 일이 많이 터지는 거야?’
“따로 보고 드려야 할 게 있었나?”
-없습니다.
“그래? 그럼 얼른 연결하게.”
띠띠.
“주한국 대사, 기무라입니다.”
-무슨 일인가?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뜬금없는 대신의 말에 기무라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에 있었던 해프닝 때문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해외에 파견나간 말단 직원 때문에 대신이 직접 전화를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정말 모르는 건가? 본국에서는 난리가 났건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전쟁이라도 난 거야?’
“도무지 무슨 말씀이신지…….”
-도대체 자네가 거기서 하는 일이 뭐야?
대신은 버럭 역정을 냈다.
허나 내용을 모르는 기무라로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급하게 문이 열리며, 비서 문서 한 장을 가지고 들어왔다.
발신이 쿠웨이트로 찍힌 외교공문이었다.
<쿠웨이트 원유 인상에 관한 건>
상당히 간추려진 내용의 문서였다.
“쿠웨이트 대사에게 전달해야 할 내용이 아닙니까?”
-그 발신자인 압둘 왕자가 지금 한국에 머물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겠나?
“끙. 알겠습니다. 대신.”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폭탄을 맞았다. 이 문서 이대로 진행된다면, 우리 경제는 일 년도 채 안 되어 휘청거릴 것이다.
기무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금방 인식했다.
하루에 0.1%, 우스운가?
이게 일 년 누적되면, 145%에 육박하는 인상이 이루어진다.
압둘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계속 되겠지.
“이해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게. 어떤 수를 써도 허락하겠다. 어떻게든 압둘 왕자의 마음을 돌리라는 말이야. 알겠나?
“넷! 알겠습니다.”
대신이 진중하게 말을 맺었다.
-행운을 비네. 기무라 군!
기무라가 크게 숨을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전의 시간이었다.
***
“그럼 그렇지. 제깟 놈들이 감히! 스즈키. 대사님께서는 여기 뭐 하러 오신 거냐?”
“제가 높은 분들이 하는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저는 그저 마에다 상을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래? 일단 들어가자고.”
대사의 연락으로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경찰서에서 풀려난 마에다는 의기양양했다.
강국의 국민인 일본인을 한국의 경찰 따위가 감히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기 때문이다.
“스즈키!”
“네. 마에다 상.”
“난 이럴 때, 내가 일본인이라는 게 자랑스러워!”
“저도 그렇습니다. 자. 얼른 들어가지죠. 기다리시겠습니다.”
마에다가 박람회장으로 들어섰다.
소세키들이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스즈키. 내, 저 친구들에게 할 말이 좀 있군.”
“네. 들렀다 가시죠. 이제 시간은 충분할 테니까요.”
마에다가 힘찬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이! 소세키!”
칼날 같은 목소리에 소세키들이 흠칫 놀랐다.
“어. 어. 마에다…….”
소세키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소세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 친구들아. 내가 말했지! 날 얕보지 말라고. 사람은 말이야. 오래 살고 싶으면 줄을 잘 서야 하는 거야!”
마에다가 이빨을 갈며 말을 이었다.
“으드득! 그리고 너, 구라야마. 네놈이 감히 내게 술을 부었겠다. 대일본의 공무원에게 그딴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이 무슨 감정의 변화인가?
얼굴에 만연한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나는 관대하거든.”
그가 다시 준엄하게 소세키들을 꾸짖었다.
“너희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지. 아까의 행동을 정중하게 사과해라.”
그가 준엄하게 소세키들을 꾸짖었다.
“네놈들이 그 하찮은 깝또리 놈에게 그렇게 길 이유가 어디 있냐? 우리 일본 국민이 뭐가 아쉬워서, 그 한국 놈에게 사정을 구걸하는 것이냐?”
하지만 구라야마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너는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네놈과 척을 지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흥. 그래?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라고. 그놈이 우리 대사님이 계신대도 내게 그런 눈을 할 수 있는지 보겠다.”
마사키가 걱정하며 말했다.
“소세키. 우리가 너무 일을 크게 키운 것 아냐?”
“그래도 나는 그게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나라, 인종? 그깟 게 뭐가 중요해?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했어. 마에다 놈의 말을 듣고 꼬투리를 잡았어 봐. 잠시는 편했을지 몰라도, 우리가 업계에서 쌓아온 명성과 인맥은 모두 망가졌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을 테지. 그리고 성훈 사마의……. 으! 난 하루를 더 살아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의리남 구라야마가 기합을 넣으며 말했다.
“마에다를 따라가자. 대사가 아무리 자기 휘하의 직원이라고 해도 우리들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을 거야. 우리도 엄연히 일본의 국민이라고.”
“그래. 우리라도 성훈 사마의 힘이 되어 드려야지. 그게 인간의 도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