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58화
음모(02)
시디를 나눠 주는 동안에도 소피아의 눈은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성훈에게 가 있었다.
곁눈질로 보며 웃던 승범이 물었다.
“소피아 양. 성훈과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그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모두의 귀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 모두가 궁금해 하는 점이었다.
도통 여자에는 관심도 없었던 성훈이 어떻게 저런 미인과 알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 말이다.
‘머리도 좋고, 몸도 좋은 녀석이……. 이런 미인까지! 세상은 불공평해!’
그래도 ‘뭔가 노하우가 있지 않을까?’ 하는 부러운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소피아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우리는 롱샹에서 처음 만났죠.”
기억을 더듬듯 먼 곳을 응시하는 소피의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만리 타국에서 그렇게 만나다니, 운명이었군요.”
승범의 말에 소피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성훈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말았어요.”
승범이 심술궂게 물었다.
“지금 소피아의 표정은 빚진 얼굴이 아닌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한국말을 그렇게 잘해요. 유럽 쪽에서는 가르치는 학원도 없을 텐데.”
“성훈과 더 친해지고 싶었으니까요.”
“결국은 성훈 때문에 한국말을 배운 거네요.”
소피의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쯤 성훈과 결혼할 생각이에요.”
소피아는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힌 채 말을 돌렸다.
“저기 손님 오셨잖아요. 쉬는 시간동안 다 나눠주지 못하면, 성훈이 가만있지 않을 걸요!”
“쳇!”
소피가 말을 돌린다는 것을 승범이라고 모르랴.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반응에 모른 척 넘어갈 뿐이었다.
“정민아. 우리 완전 대박이다.”
보람의 말에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솔직히 시작이라서, 끝까지 이 인기를 유지할지는 미지수지만, 지금만 보면 뭐…….”
“대상은 따 놓은 당상이지.”
보람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막말로 내 눈에는 경쟁자가 없어 보인다.”
맞수로 한복점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규모가 달랐다.
정민이라고 다른 의견이 있으랴!
수많은 부스 중에서도 북적거리는 곳은 자신들의 건축 모형 부스밖에 없었다.
“대체 성훈 선배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요? 로봇도 그렇고, 건물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비록 한 달 간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들은 지옥을 맛봤다.
“그러게! 처음에는 엄청 원망 많이 했었는데.”
“정말 이럴 거라고 예상했던 걸까요?”
“모르지. 저놈 속을 알 수 있나?”
“아무도 이렇게 할 생각을 못했었는데.”
보람이 체념하듯 말했다.
“그냥…… 우리 하고는 다른 놈인 거지. 생각이든 뭐든.”
‘선배가 많이 힘들었나 보네.’
성훈과 대립각을 세우며, 라이벌로 여기던 패기 넘치는 보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정민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선배. 현재 건설에 들어가면 계속 성훈 선배랑 부딪히겠죠?”
보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어? 같은 회사니까.”
“그럼 보람 선배 인생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왜? 그게 무슨 말인데?”
“매번 승진할 때마다, 성훈 선배 뒤로 밀려날 것 아녜요. 저야 뭐 한해 뒤에 들어갈 계획이니까, 기수가 달라서 큰 상관이 없겠지만.”
그 말에 승범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게 더위 먹었나? 무슨 말도 안 되는 뻘 소리를 하고 있어. 그놈은 나하고 노는 물이 아예 다를 건데!”
그가 정민을 놀리며 말을 이었다.
“너도 봤잖아. 이사들이랑 딜하고 다니는 거. 그런 놈이 과장, 부장에 관심이나 있겠어?”
“그럼 성훈 선배한테 질투도 안 나세요?”
같은 나이에 비교를 당하면 기분 나쁘지 않느냐는 말이리라.
하지만 비교되는 것도, 비슷한 레벨에서나 가능한 일!
‘비교 대상이라도 되면 좋겠다.’
보람이 시디를 나눠주며 말했다.
“질투할 시간이 있으면, 놈이 시킨 거나 제대로 해치울 고민을 하는 게 승진 가도에 훨씬 도움이 될 걸.”
보람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상을 타고, 현재 건설과의 인연이 있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아까는 쿠웨이트 왕자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 건 기억에서 지워달라고. 녀석아. 잠시라도 저런 괴물 같은 녀석을 라이벌로 생각했다니. 으으…… 낯 뜨겁다고.’
***
“그나저나 여기만 대성황이네요.”
쉬는 시간이라 가이드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관람객들의 시선은 여전히 건축 모형과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저거 보이지? 저 땅이 뒤로 스르륵 물러나면서, 석굴암의 숨어 있던 본 모습이 나왔다고. 으으.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으으…….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니까. 글쎄!”
석굴암의 가이드를 본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 옆을 지나가며, 자신이 본 석굴암의 내용을 무용담처럼 말했다.
“저건 또 뭐야? 팔상전?”
“응? 이것도 신라시대에 만들었던 거야?”
“그러네. 석굴암보다도 빨리 지어졌는걸!”
“난 서울에만 있어봐서 한국의 문화재라고 하면 남대문과 경복궁만 생각을 했었거든. 기껏해야 오백 년의 문화가 아니겠냐고.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더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고려와 신라까지 하면 거의 2,000년이 훨씬 넘은 시간이라고 하더군.”
“참 대단해. 그 시간동안 자신만의 문화적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남았다니.”
“하긴. 한글만 해도 남다르지. 이상한 나라야.”
설명을 읽다가 다른 말을 발견했던 모양이다.
“이것 봐! 임진왜란 때에 불타 없어졌다가 다시 지었다고 하는군.”
“이번에도 일본이야? 석굴암도 그렇게 망쳐놨다고 하더니. 쯧쯧.”
“일본은 왜 뻑하면 한국을 침략했을까?”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나라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나도 예전에는 한국의 국력이 약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네. 또 한국인의 성정 자체가 침략을 하지 않질 않나.”
“그건 일리가 있는 말이지.”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어떻게 말이야?”
“쯧쯧. 일본은 한국이 부러워서 그런 거야. 이런 문화재들이 있는 게 말이야.”
“크. 일본 사람들이 들으면 열 좀 받겠는 걸?”
“들으라지. 뭐. 자국 문화의 뿌리가 된 고대 문화에 대해 존중하지는 못할망정, 무식하게 전쟁으로 훼손시키고, 힘으로만 빼앗으려드는 놈들은 그런 말을 들어도 싸!”
“그런데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른다고도 한다던데?”
“그게 무슨 말인가?”
“땅이 탐났던 게 아니라, 도자기가 탐나서 그걸 훔치려고 침략을 했다는 말이지.”
“에이. 설마…….”
“실제로 임진왜란 때 가장 많이 끌려간 사람이 도공이라는 기록도 있었다고.”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
마에다가 분노를 삼키며 각오를 했다.
‘증거만 잡히면, 두 번 다시 얼굴을 들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한 시간이나 채 지났을까?
스즈키가 돌아왔다.
‘아니! 벌써 돌아온단 말이야?’
경위를 물어볼 것도 없었다.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빠가야로! 끈기도 없는 녀석! 내가 그렇게 쉽게 포기하라고 가르쳤나? 엉?”
상관이 시켰으면, 설령 그게 이치에 부합하지 않거나 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해도,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한 시간도 안 돼서 포기를 해! 이렇게 나약한 정신을 가졌으니, 한국 따위에게 추월을 당하는 게 당연하지. 멍청한 놈들!’
실망감만큼이나 분노 또한 컸다.
“내가 자네만 할 때는 말이야, 일하라면 일했고, 죽을 자리에 뛰어달라고 해도, 죽을 각오를 했다. 그렇게 일본의 경제를…….”
스즈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또 확인도 안 해 보고.’
하급자의 충성은 상급자의 신임과 인내에 의해 만들어지는 법!
허나 마에다는 인내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마에다의 반응에 실망한 스즈키는 저도 모르게 안색이 찌푸려졌다.
그게 더 화를 돋운 것인가?
마에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노야로. 네가 감히 내 앞에서…….”
그는 품에서 시디 한 장을 꺼내어 마에다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말씀하신 자료. 구해 왔습니다.”
“으잉! 정말인가?”
급히 시디를 집어드는 마에다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져 있었다.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스즈키를 노려보았다.
“아까 보셨다는 것과 같은 겁니다. 저도 확인해 보고 왔으니, 확실할 겁니다.”
“미처 확인도 하기 전에 화를 내서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실수를 하기 전에 미리 내놓지 않은 귀관의 잘못도 분명히 있다.”
‘그렇지. 그래야 마에다지.’
스즈키가 재깍 고개를 숙였다.
“네. 저의 실수였습니다. 앞으로는 먼저 내어놓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런 태도!”
‘후. 이럴 때는 말꼬리를 물고 들어져 봐야 득 되는 게 없다고.’
자신의 상관 마에다는 옹졸한 인간이었다.
그의 기분이 좋을 때, 빨리 보상이나 얻고 사라지는 게 상책이었다.
‘내가 시디를 어떻게 구해 왔는지를 알게 되면, 한 달의 유급휴가와 특진이 날아가겠지.’
아니!
오히려 자신을 농락했다고 지랄 발광을 할지도 모르지.
시디를 얻게 된 경위를 사실대로 얘기할까 고민하다가 그는 미련을 접었다.
‘그가 원한 건 시디지, 그 경위가 아니잖아.’
마에다는 무슨 첩보작전을 하면서 구해 온 것으로 알겠지만, 사실 부스에 가서 돈 주고 사온 것이었다.
그것도 거의 끝물에 가까스로 말이다.
지금 있는 시디가 다 팔린 뒤에 신청한 사람들은 우편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더 이상 이 시디가 박람회에서 나돌 일은 없다는 말이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마에다는 분명히 일 계급 특진과 한 달의 휴가는 과하다고 생각을 할 것이고, 그걸 꼬투리 잡기 위해 없는 실수라도 만들어 낼 인간이었다.
그것도 한 달 유급휴가와 특진을 충분히 상쇄할 만큼 큰 과오를 말이다.
자칫하면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겠지.
‘왜 내 상관임에도 이렇게 낮게 평가를 하냐고?’
지금의 모습만 척 봐도 알 수 있잖아.
다른 나라에서는 박람회의 성공을 축하하고 기뻐하는데, 우리는 지금 이게 뭐하는 꼴이냐고!
남 잘 되는 게, 그렇게 배 아프냐?
‘당신처럼 우월감에 찌들어 있는 인간이 있어서, 다른 나라처럼 발전하지 못하는 거라고요.’
스즈키가 말했다.
“마에다 총영사님. 이제 저는 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시디를 보며 썩은 미소를 짓던 마에다가 기분 좋게 말했다.
“그러도록 하게. 수고했네. 포상은 바로 지불하도록 하지. 관리과에 말해 두겠네.”
“감사합니다.”
스즈키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흐흐흐. 깝또리놈. 금방 이렇게 들통 날 것을 가지고 내게 사기를 쳤다는 거지.”
마에다는 비릿하게 웃으며 노트북을 열었다.
“일단 화질 보정 프로그램을 열고……. 보자. 모자이크 프로그램도 열고…… 그래. 이정도면 되겠군.”
저화질? 모자이크?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모자이크 하면 바로 우리 일본이지. 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모자이크 제거 기술을 가진 나라가 바로 우리 일본이라고. 감히 꼼수를 부리기만 해 봐라. 흐흐흐.”
잠시 후,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이렇게 화면이 깨끗한 거지?”
아까 석굴암으로 입장하던 동영상에서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화질은 깔끔했고, 군더더기도 없었다.
“아까는 분명히 이상했는데.”
그는 스즈키를 원망했다.
“이렇게 잘된 영상을 가져오다니, 내가 그동안 스즈키를 너무 무시했던 건가?”
그가 책상을 탁 치며 중얼거렸다.
“이건 한 달짜리 아니라, 보름치를 내 걸었어야 했는데. 흠. 어쨌든 좋아.”
그는 시디를 복사해서 메일을 보내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내 눈은 속여도 내 친구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그들은 세계 최고의 전문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