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250화 (250/427)

건축의 신 250화

박람회에서… (01)

박람회 개최 전날.

현주와 후배들이 군무를 연습하고 있었다.

“얘들아! 잠깐만 쉬었다 하자.”

그녀의 말에 후배들이 동작을 멈추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미진아. 거기서 네가 너무 들어오면 모양이 흐트러지잖아. 조금만 더 옆 사람과 보조를 맞춰 줘.”

“네, 알았어요. 언니.”

“그리고 정숙이 넌! 자꾸 눈길이 이상한 곳으로 간다? 우리 스텝 맞추는 것도 간신히 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 신경을 쓰면 어떡하니?”

“헤헤헤. 죄송해요. 언니.”

어리광을 부리며 달라붙는 녀석들을 어떻게 혼낼 수 있으랴!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이제 안무가 거의 완성된 것 같으니까, 성훈 씨한테 다녀올게. 쉬는 동안 안 맞거나 어색한 부분들에 대해 맞춰 보고 있어.”

“네, 다녀오세요. 언니.”

연습에 지친 여자들이 벤치에 앉아 버선발을 주물렀다.

“성훈 오빠. 오랜만에 보니까, 더 터프해진 것 같지 않니?”

“미진이 너도 봤어? 어쩜. 그냥 지시하는 것뿐인데, 그렇게 멋있어도 되는 거니? 박력이…….”

정숙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게. 성훈 오빠, 가을에 봤을 때보다 더 멋있어진 것 같아.”

두 명이 수다의 물꼬를 트자, 기다렸다는 듯 너도나도 입을 열었다.

“꿀꺽. 저 팔뚝 꿈틀거리는 것 봐!”

“이마에 맺힌 땀은 또 어떻고, 엄청 섹시하지 않아?”

“그치. 내가 가서 닦아주고 올까?”

그 말에 정숙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얘! 미친 거니. 성훈 오빠는 현주 선배밖에 모르잖아.”

“그러니? 그건 현주 언니 생각이고, 내가 보기엔 오빠는 별로 관심 없는 것 같던데?”

미진이 정숙의 말에 반박을 했지만, 그녀도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긴……. 관심 있으면 저렇게 무덤덤할 수가 없지.”

정숙이 미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넌 민수 오빠랑 사귄다면서, 성훈 오빠한테 눈은 왜 돌리니?”

“물론 민수 오빠도 다정다감해서 좋지만, 성훈 오빠는 전혀 다른 매력이 있잖니? 짐승 같은…… 그런……. 아웅! 말 못해.”

“요 여우같은 것아. 이미 민수랑 그렇고 그런 사이면서.”

“에구! 그게 무슨 연애니? 맨날 전화 통화하기도 어려운데.”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꼬박 만난다면서?”

그 말에 미진이 울상을 지었다.

“그것도 몇 달 전 얘기야. 요 근래는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어.”

“왜?”

“박람회 때문에 성훈 오빠한테 붙들려 가지고. 저기 안 보여. 우리 오빠 얼굴 누렇게 뜬 거?”

“그럼 네가 내려가면 되지. 그 정도 정성도 없이 무슨 연애를 하니?”

“요 기집애야. 당연히 저번 주에 갔었지.”

“정말? 혼자서 순진한 척은 다하더니.”

정숙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연애 초반이고, 거기다 찾아간 여자의 정성이 있는데, 설마 그냥 보내기야 했겠는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만난 지 삼십 분도 안 돼서…….”

“어머! 삼십 분도 안 돼서? 이런 짐승! 민수 오빠가 그런 면이 있다니?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여성이 꿈꾸는 로맨스, 그 이상의 야릇함을 상상하는 것이리라!

귀를 쫑긋하는 정숙을 보며, 미진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정숙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이렇게 기대서 말이야.”

“응! 기대서…….”

상기된 얼굴로 미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두근! 두근! 꿀꺽!

‘귓볼에 키스라도 한 건가? 꺅!’

“쿨. 쿨. 자더라.”

정숙이 짜증을 내며, 미진을 어깨로 밀쳐냈다.

“그게 뭐니? 서울에서 내려간 사람한테.”

“그러게 말이야. 그뿐인 줄 아니? 침까지 흘리더라. 상상이 되니?”

저 바른 생활 사나이가 입을 헤 벌리고 침을 흘렸단다.

“하긴 민수 오빠가 그랬다니까, 도저히 상상이 안 되네.”

“그렇지? 얼마나 성훈 선배가 일을 빡세게 시키는지 말도 못한대.”

“넌 네 낭군님을 그렇게 괴롭히는데, 성훈 오빠한테 눈이 가니?”

미진이 검지를 올리고 좌우로 흔들었다.

“흥. 이거랑 그거는 다른 이야기라고요.”

“근데 미진아. 민수 오빠가 뭐래니?”

“뭘 말이니?”

“성훈 오빠가 현주 언니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대?”

“글쎄.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성훈 오빠가 현주 언니 얘기하는 건 못 들었다던데?”

“그럼 진짜로 현주 언니 혼자서 짝사랑하는 거야?”

다른 무용수들도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설마……. 현주 언니가 어떤 사람인데! 언니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대학 앞에 남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몰라?”

한 여자가 성훈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현주 언니가 성훈 오빠 옆에 바짝 붙어 있어. 팔짱이라도 끼려나 봐! 그 청순한 현주 언니가. 세상에.”

현주의 적극적인 대시!

남녀 사이에,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하지만 그녀들의 확장된 눈망울이 ‘이건 보통 사건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미진들이 안타깝게 고개를 저었다.

“쯧쯧. 안타깝지만 저것도 성훈 오빠한테는 안 통하나 보다. 돌아보지도 않잖아.”

“그러게. 언니만 불쌍하게 됐네.”

“매번 쉬는 시간마다 성훈 오빠 옆에 붙어 있는 것 같은데? 현주 언니가 지금까지 남자한테 저렇게 강하게 어필한 적 있었나?”

미진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저렇게 목석같을까? 둘 다! 나 같으면 그냥! 어휴!”

“아쉬우면 네가 해보지 그러니?”

“미쳤니. 현주 언니도 안 되는데, 나 따위가 언감생심!”

“알면 애초에 꿈 깨. 이것아.”

서로 토닥거리며, 수위 높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화장실에서 돌아오던 현주는 후배들의 농담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래서 내가 처음에 망설였던 거라고.’

이런 일밖에 모르는 남자가 뭐가 멋있느냐고?

성훈의 본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본신의 능력, 재력, 머리, 카리스마.

현주가 보기에는 어느 것 하나 딸리는 것이 없는 남자였다.

‘아니, 비교할 만한 남자가 있기나 하려나?’

그걸 알기에 여기 있는 후배들도 모두 성훈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이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런 말은 성훈 씨를 위해 존재하는 건지도 몰라.

‘지금 봐도 그렇잖아.’

성훈이 일에 임할 때는 성별이나 지위 고하가 의미가 없다.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팀 전체가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인다.

‘거기다가 또 얼마나 듬직하다고.’

처음 과에서 소개팅을 제안했을 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언니! 아무리 그래도 지방 삼류대, 그것도 건축과는 너무 심하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서로 나가겠다고 치열하게 경쟁할 정도였다.

‘그게 다, 성훈이라는 사람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렇게 인기가 많은데, 성훈 씨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고.’

또 모르지. 여자에 관심이 없는지도.

“지금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좀 더 맞춰 보고 성훈 씨한테 체크 받아야지.”

***

“어때요, 성훈 씨?”

성훈이 호흡을 정리하는 무용수들과 일일이 눈을 맞췄다.

“수고하셨어요. 정말 제가 기대하던 것 이상이네요.”

미진이 말했다.

“저희가 뭐 한 게 있나요. 현주 언니가 고생이 많았죠. 성훈 오빠도 언니 공을 잊지 마세요.”

“그럼요. 당연히 잊지 않죠.”

“그럼 이거 끝나고 언니랑 영화 보러 가는 거 어때요?”

성훈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죠. 뭐. 그걸로 되겠어요? 현주 씨?”

현주가 볼을 상기한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으이그, 숙맥 같으니라고.’

보다 못한 미진이 나섰다.

“오빠! 영화 보란다고 영화만 볼 거예요? 레스토랑 가서 식사도 하고, 드라이브도 하고, 미사리 쪽에 좋은 카페 많은데, 알려드려요? 네?”

“알겠어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성훈이 돌아서며 말했다.

“현주 씨, 수고 했어요. 좀 쉬고 있어요. 그럼.”

성훈이 다시 모형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열두 시까지 작업을 마쳐야 한다고.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고!”

손뼉을 치면서 동료들을 격려했다.

“기계과! 목 관절이랑 팔목 관절들 모두 제대로 조절했어? 아까 보니까, 어깨 올라갈 때 흔들리던데?”

“네, 선배님. 어제 어깨와 팔꿈치 약간만 조절하면 됩니다.”

“한 시간 뒤에 점검하러 올 테니까, 그때까지 완료해 놓도록. 더 이상 결함을 찾을 수 없을 때까지 계속한다!”

다른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전자과는? 광원 조절 다 끝났어? 부재를 지적한 곳에 초점이 정확히 안 맞으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포인터로 거리 계산 후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아직 각 부의 오차도 있고, 조도도 학교하고 달라서…….”

성훈이 고함을 쳤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언제까지 끝나는지만 말해!”

그들의 전문 영역을 알 리가 없지 않나?

설명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수정하는 게 이득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느 한 가지라도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건 실수해도, ‘학생들이니,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너그럽게 넘어가는 학예회가 아니라고.”

학생이라고 프로들보다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학생이라는 게, 변명의 이유가 될 수는 없지.’

“자자! 거기 승범이 팀 작업 끝났으면, 바로 보람이 팀으로 붙어. 얼른. 발이 보인다!”

“그리고 기계과에서는 인형 장비들 다시 정리해라. 새로 들어온 옷들 다 갈아입히고. 얼른.”

미진이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으이그. 성훈 오빠는 여자 마음을 너무 모른다니까요. 이러다 다른 남자가 현주 언니를 채가면 어쩌려고.”

현주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타박했다.

“얘! 미진아. 너는…….”

하지만 미진은 오히려 미소를 띠며 현주를 찔렀다.

“잘했죠, 언니?”

“몰라! 얘!”

현주도 성훈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난 모형 설명 들어야 되니까. 부족한 부분들 더 맞춰 보고 있어.”

“저러니까, 성훈 오빠가 꿈쩍도 안 하는 거지. 밀당을 몰라요. 밀당을. 쯧쯧!”

***

내일 아침 9시에 오픈을 하지만, 진열 작업은 늦어도 밤 12시까지 끝나야 한다.

그 뒤에는 회장의 정리와 개최 측의 준비 작업이 진행될 계획이었다.

각자의 동선이 꼬여서는 어떤 것도 마무리가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 주최 측의 계획이었다.

지금은 오후 5시.

“휴!”

그저 모형만 진열하는 거라면 쉬웠겠지만, 우리가 만든 게 어디 그런 단순한 작품이던가?

나름 손이 많이 간 작품들이라서, 그 설치에도 공을 들여야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어디지. 모르는 번호인데.’

받지 말까?

오전부터 전화가 불통이 났었다.

‘첫 번째는 압둘 이었지.’

-성훈. 마이 프렌드!

다른 사람에게나 왕자지, 내게는 친구였다.

“왜요? 압둘! 바빠 죽겠는데?”

-아무리 바빠도 사람이 쉬면서 일을 해야지. 샤롯데 호텔 스위트룸에 있으니까, 놀러 와!

‘흥. 갑부라 이거냐?’

샤롯데 호텔 스위트룸이라.

하루 숙박비가 천만 원은 훌쩍 넘어가는 곳이다.

‘돈이 썩어 남아도, 내 돈으로는 못 갈 텐데.’

왜냐고?

자기 손으로 직접 돈을 만질 일이 없는, 압둘 같은 사람이나 묵을 수 있는 곳이니까.

하여간 압둘 이후로 몇 번이나 비슷한 전화를 받았는지 모른다.

알리, 마이어, 코펠, 프랭크 등등.

내가 아는 인맥들에게는 다 연락이 된 모양이었다.

‘한 교수가 장난을 친 거겠지. 그럼 이건 박람회 관련이겠군. 휴!’

이제 전화 올 인간들은 다 왔으니까!

수화기를 열었다.

“여보세요?”

-성훈?

살짝 떨리는 듯한 프랑스 억양의 독일 말, 그리고 여자!

내게 그 조건이 맞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소피?”

-잊지 않았네. 성훈……. 잘 지냈어요?

“응. 잘 지내고 있지. 어떻게 지냈어?”

-나도 잘 지냈어요. 그런데 나 지금 한국에 가요.

“어! 그래? 무슨 일로?”

-아빠 회사가 한국에 지사를 만들었어요. 거기 일 보러 가는 거예요.

‘벌써 지사를 만들었다고? 그 회사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몇 년 뒤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미래는 계속 변하고 있었다.

-나 지금 한국으로 출발해요. 만나고 싶어요. 찾아가도 되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못 찾아올 이유가 뭐 있어?

“나야 환영하지. 얼마든지.”

-그럼! 울산으로 가면 되는 건가요?

왜인지 살짝 들뜬 목소리였다.

“아니! 서울 종로로 와. 며칠 동안은 여기 있을 것 같으니까.”

-내일 봐요. 성훈.

“그래. 조심해서 오고.”

오랜 친구와 통화가 끝났다.

‘벌써 내가 아는 것과 이렇게 달라지다니!’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알고 있던 미래가 조금 변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뭐! 마음에 안 드는 미래라면 뒤집어엎어 버리지.’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웃음이 픽 났다.

‘그리고 소피는 또 얼마나 예뻐졌을까?’

작년 겨울에 있었던, 꿈같은 여행을 내 인생에서 다시 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바닥에 앉아서 통화를 했던 모양이다.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거는 과거, 미래는 미래!’

지금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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