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247화 (247/427)

건축의 신 247화

마무리 작업(03)

현주의 공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현주야. 식사라도 하고 가지 않으련? 2시가 넘었는데?”

현주는 조수석의 의자를 뒤로 젖혔다.

“아냐. 엄마. 너무 피곤해. 얼른 가서 씻고, 침대에 눕고 싶어요.”

“그래도 식사는 하고 가는 게 좋지 않겠어? 우리 매번 가던 레스토랑에서…….”

“엄마. 미안. 피곤해.”

현주는 눈을 감은 채 말했고, 이내 잠이 들었다.

10분이나 지났을까?

현주의 전화벨이 울렸다.

힘없는 손짓으로 전화기를 핸드백에서 꺼내 들고 귀로 가져갔다.

“여보…… 세요. 어멋! 성훈 씨.”

그녀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무슨 통화를 하는 것일까?

“네. 아. 모델요? 그럼요. 가능하죠.”

“지금? 종로에요? 아뇨. 괜찮아요.”

“호호호. 미안하긴요. 절대 무리한 거 아니니까. 네. 좀 있다 봐요.”

짧은 대화 내용으로 봐서는 성훈이라는 남자가 현주에게 뭔가를 부탁했고, 그걸 수락하는 모양이었다.

통화가 끝나고 엄마가 물었다.

“누구니?”

“성훈 씨.”

“저번에 너 구했다는 그 학생?”

“응. 맞아.”

“그 학생이 왜 너한테 전화를 했니?”

“그건 됐구. 엄마. 나 여기서 내려주세요.”

방금 전까지 피곤해 하며, 밥도 먹기 싫어하던 딸이 눈에 생기가 넘쳐 있었다.

“종로 가려고?”

“왜 엄마는 남의 통화를 엿듣고 그래요?”

이런…….

이 좁은 차안에서 엿듣고 말고가 어디 있겠는가?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현주를 바라봤다.

“조금 더 작은 소리로 통화를 하지 그랬니? 별 꼴이야.”

“엄마. 나 여기서 내려달라니까.”

그녀는 전혀 차를 세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 성훈이라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보고 싶었다.

물론 현주가 위험할 때 구해 줬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현주의 말이었고…….

‘어떤 의도로 접근을 하는지는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 현주가 너무 순진해서, 그 남자에게 혹한 것일 수도 있고.’

딸의 친구인 미현의 말을 들어보면 사실인 것 같기는 한데, 어디까지나 추억 보정일 거라 생각했다.

‘말이 그렇잖아. 무너지는 건물의 지붕에서 여자를 안고 뛰어내린다는 게 말이나 돼?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녀의 딸에게 대시를 하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현주가 직접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기에 더 호기심이 당겼다.

그런데 그 남자에게서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그것도 모델이 되어 달라는 요청과 함께.

그녀의 직감이 말했다.

‘어디서 수작이야! 수작이!’

그것보다 더 어이가 없는 건, 낯선 남자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딸의 모습이었다.

‘에구. 너무 곱게 키웠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

두 모녀가 박람회장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저 멀리 성훈의 모습이 현주의 눈에 들어왔다.

“저기 있어요. 엄마. 저 남자!”

성훈을 가리키며, 현주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딸의 미소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 다물어. 이것아. 철딱서니 없이……. 쯧쯧.”

“아까부터…… 엄마는 참.”

엄마가 입구에서 성훈을 살피며 물었다.

“저 녀석이 네가 입에 부르고 닳도록 자랑하던, 그 성훈이니?”

“내가 언제?”

“흥. 내가 오죽했으면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이름까지 기억하겠니? 요것아!”

“엄마. 자꾸 쓸데없는 소리하면 가만 안 있을 거야!”

“그럼. 네가 엄마한테 어쩔 건데.”

몇 번이나 소개팅을 주선하면서, 성훈과 만났지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엄마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니, 현주는 속이 상했다.

‘기분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자꾸 이럴 거면, 엄마 먼저 가! 나 택시타고 갈 테니까.”

엄마의 계속되는 놀림에 현주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성훈이 있는 부스로 가기 전, 현주가 물었다.

“엄마. 나 화장 영 아니지?”

현주의 말에 엄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만 더 말하면 백 번이다. 백 번.’

방금 전까지 공연을 하고, 화장을 지우지도 않고 왔는데, 아름답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 오는 동안에도 얼마나 화장을 고쳤던가?

“예뻐.”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좋은 말도 한 두 번이지. 이제는 입이 아플 지경이니, 이것도 많이 인내한 거였다.

“정말이지?”

“얘! 신부 화장도 그거보다는 못 해.”

확신하는 엄마의 말에도, 현주는 울상을 지었다.

“엄마. 지울까?”

“어디서? 이것아. 예쁘다니까!”

그녀는 고민하는 현주를 뒤로 하고 마음을 다졌다.

‘어떤 놈팡인지 몰라도, 여기서 확실히 마음을 정리하게 하는 게 좋을 거다. 어디 우리 현주를 넘봐.’

모델을 해달라고 한다고 했다.

‘수영복이라도 입힐 심산인가? 싸구려 모델을 시키려고, 감히 우리 현주를 불러!’

전의를 불태우며, 딸을 불렀다.

“현주야! 가자.”

부스 앞에는 성훈과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 입은 여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여자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성훈만이 보였다.

‘혼쭐을 내주지.’

***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현주가 환한 미소를 띤 채, 손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저 친구예요. 이제 왔나 보네요.”

“어머나. 멀리서 척 봐도 선이 참 곱네. 뭐하는 처자지?”

이제는 한 여사도 내가 불편하지 않은지, 스스럼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한국무용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잘은 모릅니다.”

“그런데 소개를 해 준다고 했을 때는 확신이 있었을 거 아니니?”

“네. 저 친구가 춤추는 걸 봤거든요.”

MT에서의 기억을 되새기며 말을 이었다.

“아마 부채춤의 일종 같았어요. 아니, 그때는 부채를 들고 있지 않아서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오호라. 그럼 전통무용을 전공하는 모양이네.”

“네. 맞아요. 하여간 전 살면서 그렇게 아름답게 춤추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한 여사가 내 옆구리를 툭 찔렀다.

“저 처자가 좋아서 그렇게 보인 건 아니고?”

그녀의 장난에 장단을 맞추며 너스레를 떨었다.

“저런 예쁜 여자가 춤을 추는데, 안 예쁘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죠.”

“말 돌리기는. 능글맞아.”

한 여사가 눈을 흘기며, 내 등짝을 툭 때렸다.

“성훈 씨.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녀의 미소는 예뻤다.

“반가워요. 현주 씨. 그리고 갑작스런 부탁이었는데,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옆으로 눈을 돌렸다.

“같이 오신 분은 누구세요?”

“아. 우리 엄마에요. 인사하세요.”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성훈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반면, 그녀는 형식적으로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네. 반가워요. 성훈 씨.”

고개를 들었을 때, 현주의 어머니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보고 있다.

노려본다고 하는 게 어울리지 않을까?

‘혹시 내가 실례되는 행동이라도 한 건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현주에게서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아. 그렇습니까?”

“네. 우리 현주가 위험에 처했을 때, 큰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위험에 처하면서 우리 현주를 구했나요? 혹시 다른 마음이라도 있었던 거 아닌가요?”

현주 쪽을 힐끔 보자, 그녀도 당황했던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성훈 씨. 미안해요. 엄마. 이리 와요. 나랑 얘기 좀…….”

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단호했다.

현주의 손을 옆으로 밀치며 말을 이었다.

“현주가 당신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고마워하는 것, 또한 진심이에요. 하지만 오해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어떤 오해를 말씀하시는 건지?”

“현주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지는 말아달라는 말이에요.”

“엄마!”

그녀는 뭔가를 오해하고 있었다.

‘오해가 있으면 풀어버리면 그만이지.’

현주 말고 다른 사람을 써도, 박람회의 일정은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남에게 이상한 녀석으로 취급받는 건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고.’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 그건 착각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됐어요.”

“현주 어머님. 그런데 왜 그런 걱정을 하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현주에게 모델을 부탁한다고 얘기를 들었어요.”

현주가 언성을 높였다.

“엄마. 그건 내 일이라고요.”

“혹시 수영복이라도 입힐 생각이라면, 그런 생각은 애저녁에 접으세요.”

“엄마! 누가 수영복 이야기를 했다고…….”

그녀는 현주의 제지하려는 손을 옆으로 쳐냈다.

“현주는 성훈 씨에게 고마운 마음이 남아 있어서 덥석 허락한 모양인데, 저는 보호자로써 전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걸 말씀 드리러 왔어요.”

‘이분이 나를 파렴치한으로 보시나?’

“일단 수영복 모델은 아닙니다.”

“그럼 뭔가요?”

그녀가 생각하는 모델은 쌍팔년도에 선술집에 걸린 달력모델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시니, 무리는 아니지만.’

하지만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그리고 자신의 딸도 잘 모르는 것 같고.

그녀의 어디가 수영복이 어울리는 몸인가?

‘안고 뛰어내릴 때 보니까, 45킬로도 안 나가겠더구만. 수영복 모델은 자고로 ‘올록이볼록이’여야 한다고요.’

그녀가 도전적인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뭔가요?”

내가 설명하기 보다는, 옆에 있는 한 여사에게 넘겼다.

“선생님께서 설명을 해 주시죠.”

그녀는 그제야 내 옆에 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한 여사도 황당한 모양이었는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내 말에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한복 만드는 늙은이예요. 한복주라고 해요.”

현주의 엄마도 퍼뜩 놀라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 네? 한복주 선생님?”

그녀는 인사를 하다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나. 한 선생님!”

“네. 맞아요. 그런데 뉘신지?”

한 여사가 고개를 모로 돌리며, 그녀를 살폈다.

하지만 금세 생각이 나지는 않는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어머. 그사이 더 예뻐지셨어요.”

영문을 몰라…….

“저를 아세요?”

“어떻게 선생님을 모를 수가 있어요. 한복하면 한복주 선생님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요.”

“고마워요. 그렇게 높이 봐 줘서.”

“그럼? 모델이라는 게, 선생님 한복 모델이었나요? 호호호. 저는 그것도 모르고.”

아까 모델에 대한 선입견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얼굴에 웃음이 만개한 채, 한 여사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한 여사가 말했다.

“어머님. 아직 정해진 것도 아니고.”

“어머. 망설일 게 뭐가 있어요? 선생님 옷이라면 당연히 해야죠. 현주에게 영광이죠. 현주야! 이리 와 보렴?”

현주도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고현주라고 해요.”

현주의 인사가 끝나자, 다시 그녀의 어머니가 수다를 떨었다.

“저 완전히 선생님 팬이에요. 오죽하면 시집갈 때도 선생님 한복을 입으려고, 식을 석 달이나 미뤘다니까요.”

“그러셨나요. 호호.”

그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어졌다.

‘고수일세. 난 한 여사 마음을 여는데, 한 시간이 넘어 걸렸는데……. 단 일 분 만에…….’

따발총처럼 말을 하며, 한 여사 칭찬을 하고 있었다.

한 여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눈짓을 했다.

얼른 옷이나 입혀 보자는 말이리라.

‘맘에 들었으니, 입혀보고 싶은 게지.’

내 눈이 정확하다면, 저기 걸린 옷들 어느 것을 입혀도 현주에게 딱 맞을 것 같았다.

“선생님. 여기서 이야기를 하실 것이 아니라, 빨리 한복을 입어보는 게 어떨까요?”

기다렸다는 듯, 한 여사도 내 말을 받았다.

“그래요. 성훈 씨 말이 맞아요. 저 쪽에 가요. 여기! 김 실장!”

차를 줬던 직원이었다.

“저기랑 저기. 마네킹에 있는 한복이 치수가 맞겠네. 가지고 탈의실로 따라오도록 해요.”

그녀가 현주 모녀를 이끌고 탈의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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