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45화
마무리 작업(01)
박람회장은 서울 종로에 있었다.
차를 주차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민수가 왜 전화했지?’
-형. 서울에는 잘 도착하셨어요?
“응. 지금 막 종로에 도착해서 들어가는 중이야.”
-가이드 음성 녹음 때문에요.
“왜 문제 있어?”
로봇의 동작을 수정하고, 디테일을 만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설명을 해줄 목소리가 부족했다.
‘아무리 로봇을 섬세하게 잘 만들면 뭐해. 그건 설명을 편하게 하고, 시선집중의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
민수의 침묵에서 망설이는 게 느껴졌다.
‘녀석. 하여간 남한테 안 좋은 소리는 못한단 말이야. 너무 착해.’
“대충 알아들을 테니까, 그냥 까놓고 말해. 말 돌리지 말고.”
-한 교수님은 별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정희 씨는 긴장해서 그런지 발음이 좀 꼬여요. 영어발음 자체도 좀 문제가 있구요.
주변의 인물 중에서 사람을 찾으니, 만만한 여자가 전자과의 정희밖에 없었다.
돈으로 돈질을 하자면, 못 할 것이 뭐가 있겠냐마는, 그건 마지막에나 생각해 볼 방법이었다.
“음. 그렇다는 말이지.”
외국인들을 상대하는데, 한국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 않나!
‘물론 대사관 직원이니, 어느 정도 알아듣기는 하겠지만, 디테일한 설명은 어렵다고.’
만의 하나지만, 가이드를 하고 있는데도 질문이 날아들 수도 있었다.
물론 내가 대답을 받을 수도 있지만, 항상 그곳에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원어민 발음은 둘째 치고, 회장에서 긴장해서 버벅거리면 영 모양새가…….’
상상만 해도 고개가 저어지는 상황이었다.
서울이라면 유학을 다녀온 학생들이 많으니, 영어의 구사가 좀 자유로웠겠지만, 지방에 있는 대학들은 아직은 영어에 대한 진입장벽이 높았다.
‘쯥. 일이 꼬이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지방에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성우를 구하기는 쉬울 것인가?
“그럼 일단 영문과 쪽에다가 사람 구한다고 공문 보내. 알바비는 학과 경비에서 처리하고.”
-알았어요. 형.
“나도 여기서 틈나는 대로 사람 구해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쪽은 문제없죠?
“그래. 아직은 없어. 만약 생겨도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작업 마무리나 잘해 줘.”
-고생하세요. 형.
시작부터 살짝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박람회장으로 들어갔다.
아직 2주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작품을 배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리 배정표를 들고, 우리 자리로 향했다.
“음. 8~11이라……. 여기서부터 저기…….”
벽 끝에서 반대편 벽 끝까지.
일부러 한 면을 다 차지하도록 자리를 받았다.
“옳은 선택이었지. 응?”
누군가가 우리가 작품을 설치할 곳에 박스를 쌓아둔 것이 보였다.
‘옆 팀에서 진열하는 작품인가? 저렇게 박스를 쌓아두면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 물건을 쌓는단 말이야.’
이상한 심리지만, 남이 그렇게 하면, 자신도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사라진다.
분주하게 작업을 하는 12번 구역으로 가서 말을 걸었다.
“혹시 저 박스, 이 팀에서 가져오신 겁니까?”
진열을 하다가 나를 본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희 건 아니에요.”
‘뭐라고? 그럼 다른 팀이 가져다 놓은 건가?’
작업 상황을 보니, 한참 전부터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누가 가져다 뒀는지,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U대학 건축모형을 설치할 자리인데, 혹시 어느 팀에서 두고 간 건지 아세요?”
우리 자리에 다른 팀의 물건이 있는 건 빨리 치워버리는 게 좋았다.
‘우리 팀 자리라고 팻말이라도 세워둬야겠어.’
파손 시, 책임질 수 없다는 문구와 함께.
“U대학이라고요? 잠깐만요?”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뒷주머니를 뒤적였다.
“전 한복주 디자이너 자리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럴 리가요?”
그녀는 표를 확인하고는 내게 그것을 내밀었다.
“제 기억이 맞네요. 거기 한복 진열이 될 자리예요.”
“네?”
“여기 보세요. 10~11, 한복주, 전통한복.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히 그렇게 신청을 했는데.’
신청을 하고도 몇 번이나 확인을 했던 부분이었다.
“제 표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데.”
내 표를 보고는 그녀가 말했다.
“제 표가 좀 더 최근 거네요. 주최 측에 가서 알아 보셔야겠는데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자리를 뜨기 전,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 물건 가져다 놓으신 분들 금방 오시겠죠?”
“네. 짐꾼들이 짐만 놓고 갔으니까, 진열하시는 분들도 금방 오실 거예요.”
이건 큰 문제였다.
한복집에다가 자리를 돌려달라고 말하는 것도 무식한 짓. 그러면 그들도 피해자가 되겠지.
그렇다고 공무원에게 가서 따진다?
지난 삶에서 그런 일은 수도 없이 해봤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
책임자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내 배정표와 변경된 것을 그의 앞에 들이밀었다.
“왜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겁니까?”
“그게…… 담당직원을 불러서 물러보겠습니다.”
잠시 후 담당자가 왔을 때, 책임자는 대뜸 호통부터 쳤다.
“무슨 일처리를 그렇게 하는 거야!”
“부장님. 그게……. 경미 씨가 담당했었는데, 나중에 접수를 받으면서 누락된 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 한동안 난리가 났었잖아요.”
“아. 그랬지. 그래서? 그 직원이 따로 연락하기로 하고 일단락 된 거잖아?”
“그게……. 연락이 누락된 모양입니다.”
“쯧쯧. 그 직원 어디 있어?”
“이민 간다고 사표 냈습니다. 이번 가을에.”
“하. 이거 골치가 아프게 되었네. 하필이면 U대학이야?”
“왜요? 그 대학에 뭐가 있습니까?”
“얼마 전에 신문에 났잖아. 현재 건설이 취업지원하기로 했다고 말이야.”
“아! 이런…….”
둘의 속닥거림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누군가 실수를 했고, 그 직원은 그만 둬 버렸다.
그리고 왜 책임자라는 사람이 고분고분한 건지도.
그가 돌아서서 말했다.
“저희 직원이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서요?”
난감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웃음으로 대응해 줄 상황이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건 당신의 사과가 아니라, 내 작품을 놓을 자리라고.’
“조금만 양보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훗. 무슨 양보?’
당신들은 양보하지 않으면서, 나만 일방적으로 양보하라고? 그걸 나보고 받아들이라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니, 화를 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말은 이거였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포기하고 물러나세요.’
좀 더 달래다가 안 되면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라고 하겠지.
하! 지친다. 지쳐.
한숨을 내쉬는데, 책임자가 말했다.
“사실 한복주 디자이너가 아니라, 다른 집 같았으면, 그쪽에 양보를 부탁드렸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계속 말해 보세요.”
“저희가 박람회를 기획할 때부터, 한복주 선생님은 뺄 수가 없을 정도로 비중이 있었습니다.”
한복주 디자이너, 나도 이름은 알고 있었다.
‘나중에 한복 디자인으로는 독보적인 사람이 되지.’
이런 사람과 갈등을 만든다는 건, 명분을 떠나서 그것 자체로도 마이너스였다.
‘어떡하냐? 김성훈.’
그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혹시 좀 구석진 자리지만, 거기라도 괜찮으시다면…….”
“그건 의미가 없습니다. 왜 제가 처음부터 이어서 받았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이미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자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작품을 띄엄띄엄 놓고,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라는 말인가?
다음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장소를 옮기는 동안, 딴 팀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올 텐데.
‘그럼 이미 주의력은 흐려지고, 승부는 끝나버린 상황이 된다고.’
참으려 해도, 그 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억눌린 감정이 꾹 다문 이 사이로 흘러나왔다.
“당신네들 때문에 지금까지 짠 각본이 다 엉망이 되었다고요. 알아요?”
“그게 저희도 어쩔 수가 없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침착하자. 김성훈. 이미 물 건너간 걸 되새기면 뭐 하겠어?’
하지만 여기서 그냥 물러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
‘잃었으면 얻는 것도 있어야지.’
그리고 내 자리는 스스로 얻어내겠어.
그게 안 되면 대책이라도 마련을 해야지.
그에게 물었다.
“당신들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뭡니까?”
내게서 타협할 건수를 봤음인지,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박람회를 하는 동안 불편한 게 있으시면, 이번에는 무조건! U대학의 요청을 우선적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건 약속합니다.”
“약속하신 겁니다. 무조건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무조건 말입니다.”
***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벌거벗은 마네킹들이 줄을 서 있었다.
주변으로 디자이너들이 한복을 입히고 있었다.
그중에 단연 돋보이는 사람.
60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현장을 가로지르며, 옷매에 대한 지적을 하고 있었다.
“어깨선을 좀 더 살려줘요. 아니. 그렇게 말고, 이렇게 한복을 잡고 올려야지. 봐요? 아까랑 달리 훨씬 선이 살지 않아요?”
“그걸 생각 못했네요. 선생님.”
한발 뒤로 물러서서 보기도 하고,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기도 하며, 옷의 맵시를 살리고 있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짜고짜 가서, ‘양보해 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잖아.’
지피지기 백전불태.
거래를 하려고 하면 상대가 뭐가 필요한지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괜히 멋모르고 다가갔다가는 경계심만 북돋을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관찰밖에 방법이 없다고.’
어차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녀에게 양보를 얻어내는 것.
몽땅 양보 받을 필요도 없었다.
작품을 만들 때, 넉넉하게 공간을 구성했지만, 줄일 수 있는 부분을 줄이면 된다.
‘약간, 한 칸 정도면 충분하다고.’
허나 그건 내 생각일 뿐.
‘저렇게 준비를 했는데, 양보를 하겠어? 내가 봐도 저건 한 로트에 넣을 수가 없다고.’
빽빽하게 작품만 채운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다.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에 걸맞는 배경이 있을 때가 아니던가?
한국의 미는 여백의 미라고도 말한다.
나도 내 작품들을 빽빽하게 배치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것이고.
전투에 앞서, 상대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
‘보기 싫어도, 그렇게 보이는 걸. 젠장!’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그녀의 행동에서 일정한 패턴을 찾을 수 있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하는 동작.
남들이 보기엔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지만.
또 다시 그녀의 습관이 나왔다.
마네킹에게 다가가, 눈을 맞추고 한복의 선을 정리한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전체적인 조화를 확인한다.
‘거기까지가 일반적인 동작이지. 그리고 거기.’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아미를 찡그렸다.
나이를 먹었지만 주름 하나 없는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휴. 좀 더 생동감이 있으면 좋을 텐데. 옷맵시가 영 마음에 안 드네.”
그리고 입술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생동감이라면 모델인데, 모델을 왜 쓰지 않는 걸까?’
그사이 또 다시, 그녀의 고민이 입으로 흘러나왔다.
“요즘 모델들은 몸매가 서구적이라서, 한복이 어울리는 애들이 없던데……. 이를 어쩐담.”
그녀의 고민을 들으며 잠시 생각을 해 봤다.
‘모델은 서구적이라서 못 쓰겠고, 옷이 생동감이 없다라…….’
뭔가 빛이 보이는데, 명확하지 않았다.
그녀의 고민을 좀 더 듣다보면, 길이 보일 것 같았다.
‘한 여사와 이야기를 해 보면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그녀는 한복의 멋을 살리고, 나는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면, 최고의 결과가 나올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번뜩이는 재치. 그것이 부족했다.
일단 부딪쳐보기로 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옆 칸에서 건축 모형을 전시할, U대학의 김성훈입니다.”
그녀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돌아섰다.
“어머. 그래요? 반가워요. 이웃사촌이 되었네요.”
인자한 웃음으로 나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