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34화
현장실측(01)
한 사람이 일어서서 물었다.
“그럼 평가의 시간이 좀 더 늘어난 건가요?”
“당연한 거 아니야. 평가를 두 번 한다잖아.”
준비기간이 늘어나는 만큼, 더 많은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만큼 탈락의 위험은 적어지니, 기쁜 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리라.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승범의 얼굴은 어두웠다.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나를 봐서일까?
‘이제 진실을 알아야 할 시간이지.’
그들에게 정색하며 말했다.
“최종 평가는 일주일, 변함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우리는 다른 팀과 똑같은 조건으로 경쟁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이의를 제기할 빌미를 제공할 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탈락시키라고 보내놨더니, 미적거리면서 시간만 끈다고 말입니다.”
“너무 과대해석 하는 것 아닙니까? 팀장?”
승범이 그를 보며 말했다.
“아냐. 팀장 말이 정확해. 다른 팀 녀석들은 우리가 불편할 거야. 과대해석이든 뭐든, 불편하다는 사실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승범 학우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저들과 동일한 일주일 동안 저들이 반박하지 못할 결과를 만들어야 합니다.”
말은 길었지만, 요지는 이거지.
‘남들 한 번 할 때, 우리는 두 번 하자! 두 배로 괴로울 테지만, 생존확률도 두 배로 커질 거야.’
승범이 팀원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이것들아. 적당히 봐줄 때, 그냥 못 이기는 척 따라가자고.’
여기서 따지고 들었다가는, 더 심한 조건을 내걸 게 분명한데.
성훈이 팀원들을 보며,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더 말해 봐. 더. 더.’
웅성대는 소리 속에서도, 불평은 잘만 들리는 모양인지, 성훈은 불평을 토로하는 학우의 얼굴을 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저 녀석은, 아주 고생문을 여는구먼.’
불만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승범 뿐이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점수나 좀 만회해 두자.’
결심을 굳힌 승범이 말했다.
“학우 여러분, 지금 느긋하게 마음먹을 때가 아니라고요.”
“승범아. 다른 팀의 두 배라잖아. 지옥의 스케줄이 될 거라고.”
“그럼 우리가 기존 팀과 똑같이 대접받기를 바란 거야?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라고.”
“…….”
“어차피 벼랑 끝이야. 회장이라고 남들보다 두 배로 고생하고 싶겠어? 다 우리 생각해서 하는 말이잖아. 애처럼 굴지 말자고. 우리!”
“하지만…….”
“팀장 말대로 녀석들이 입을 딱 벌릴 결과를 만들어서 보여주자고. 너희가 쫓아낸 우리가 더 뛰어나다는 걸 증명하자는 말이야.”
분위기를 끌어가는 승범을 보며 속으로 웃음이 났다.
‘허 참. 저 녀석이 제일 잘하는 건, 공부가 아니라 선동이 아닐까?’
양날의 검이지만, 제대로 쓰기만 한다면 제 역할을 톡톡히 하겠는 걸?
승범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분위기를 몰아서, 내게 토스하는 느낌이었다.
‘이 분위기 그대로 가자, 그거지?’
이미 생각해 둔 것은 있었다.
그게 만들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던 거니까.
그 전에 선결되어야 할 과제.
함께 한다는 집단의식.
‘나 혼자 끌고 가는 건 한계가 있지.’
승범이 분위기를 잘 만들어 두었다.
‘녀석.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걸.’
무엇보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좌중을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우선 팀원들의 의견을 다 들어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아시다시피 우리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결과를 내야 하죠.”
승범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말을 받았다.
“그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팀장이 생각해 놓은 게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좋군.’
리더의 심경을 살펴서, 할 말을 미리 해주는 것.
내 주변의 인물들, 민수나 한석과는 너무 달랐다.
승범의 분위기에 한 학우가 동참했다.
“승범 선배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의견을 모으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바로 실행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왕 할 거라면, 팀장의 의견을 따라가죠. 어제 보람 선배에게 조언하는 걸 보면, 안목도 충분한 것 같던데요.”
“맞아. 그리고 적어도 그 팀보다는 더 나을 거 아냐? 그렇게 생각지 않아?”
은연중에 승범이 분위기를 주도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러면 오히려 내가 편하지. 부팀장을 시킬까?’
리더가 되기엔 포용이 부족하지만, 좋은 참모가 되기에는 자질이 충분했다.
그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남들 두 배로 작업 진행이 될 테니까요.”
승범이 말을 받았다.
“이미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민수 학우를 통해서 넌지시 들었습니다. 어떻게 작업을 하시는지 말입니다.”
그가 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음…….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봐야죠. 팀장의 지옥행군은 이미 다…….”
‘각오가 되었다는 말이지?’
각각의 의지가 눈동자에 서려 있었다.
“좋습니다. 제가 우리 팀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건 ‘법주사 팔상전’이었습니다.”
“팔상전이요?”
“너 그게 뭔지 알아?”
“모르겠는데. 역사책은 고등학교 이후로 본 적이 없어.”
“흠. 나도 그래. 역사는 달달 외웠었는데, 기억이 안 나.”
“그래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걸 할 줄 알았는데.”
“그러게.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걸, 왜 하려는 거지?”
국보 제55호인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이지만, 관심이 없다면 금방 알 수는 없었다.
‘몰라도 돼. 금방 알게 될 테니까.’
한 학우가 손을 들었다.
“팀장! 질문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다른 팀들은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아는 걸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도 남대문이나, 불국사 대웅전처럼 유명한 것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의문이 있다는 것은 관심의 표시이며, 질문은 의지를 투영하는 것이었다.
역시 반응들이 좋네. 실망에 빠져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적어도 리더의 의도를 알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겠어? 혼선의 여지가 줄어들지.’
흔쾌히 그의 물음에 답했다.
“제가 굳이 인지도가 없는 법주사 팔상전을 택한 것은 박람회의 주요 참가자를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참가자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아는 것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초청자들 대부분이 외국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의아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맞습니다. 우리 작품을 볼 사람들은 대사관의 직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죠. 어느 정도는 한국의 문화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느 정도’라는 단어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우리와 그들의 어느 정도는 기준점이 다를 수밖에. 학습의 정도가 다르니까.’
“그 어느 정도라는 말을 저는 ‘수박 겉핥기.’라고 표현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들은 우리가 중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수준이 낮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물론 한국에 관심이 있어서, 한국 대사관을 지원한 사람도 분명히 있겠지.
‘하지만 아직 알려지지도 않은 작은 나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한국에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2002 월드컵’이 아닐까?
그 이후에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었다.
지금은 거의 관심의 불모지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자신들의 일에 필요한 것보다 더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지난한 일이리라 생각했다.
“팀장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들은 임기를 마치면, 자국으로 돌아갑니다. 평생 살 것도 아닌데, 과연 우리들처럼 관심을 가질까요? 자신들의 뿌리도 아닌데?”
수긍하는 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한국의 문화란, 불국사 대웅전, 남대문, 경복궁 정도가 한국의 전부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존재 자체를 모르는데, 어떻게 호불호가 생길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더 다양한 문화들이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니, 식상해 하고 관심도 없죠. 지루해 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편견을 깨야 합니다.”
‘무슨 수로?’
팀원들의 눈이 묻고 있었다.
“아직도 한국에는 네가 모른 것투성이다. 그리고 당신을 즐겁게 할 보물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고 알려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뻔히 아는 걸 해야 할까요?”
“그럼 그런 것들은 엄청나게 많을 텐데, 왜 하필 법주사 팔상전입니까?”
“그들에게 선보일 작품은 깊이가 너무 깊어도, 얕아도 곤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문화충격이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이 있다.
고건축이 아름답다 하지만, 보는 이의 수준에 맞지 않으면, 그것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세월의 초라함만 느끼게 된다.
그건 나의 취지와 벗어나지 않겠는가?
“적당한 선을 지키지 않으면,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겁니다.”
승범이 물었다.
“그런데 문제는, 저희가 그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겠습니까?”
시간만 부족하겠는가?
‘아니! 오히려 부족하지 않은 걸 찾는 게 빠를 정도라고.’
“하지만 여러분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믿습니다.”
한 학우가 성훈에게 물었다.
“팀장. 도면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자료는요?”
“그것도 없습니다.”
“도면도 없고, 관련 자료도 아무 것도 없네요. 그럼 대체 어떻게 시간 내에 결과를 만든다는 말입니까?”
경악하는 그들에게 성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없으면 우리가 직접 만들면 됩니다.”
“네? 직접 만든 다고요?”
성훈이 생각하기에는 당연했을 수도 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 그대로 베끼는 것뿐인데, 뭐 그리 어렵게 생각해?’
하지만 그건 성훈의 생각이었고, 승범은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뭐, 생짜로 맨땅에 헤딩이잖아!’
다른 학우가 승범을 앞지르며 말했다.
“도면 없이, 우리가 뭘 한다는 말입니까?”
“하물며 우리는 건축학과도 아니라고요.”
그들의 말을 가로막으며, 성훈이 말했다.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것은 건축물입니다.”
“그러니까요? 도면이 없잖아요?”
“똑같이 만든다는 건, 도면을 그대로 현실화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학우가 갸웃하며 물었다.
“전 이해가 안 되는 군요.”
“도면이 아니라, 분위기를 재현한다는 말입니다. 모형을 봐도, 그 건축물의 느낌이 나게끔.”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성훈이 웃으며 말했다.
“실측하러 갑시다.”
제각기 반응이 달랐다.
“엑? 실측이요?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요.”
“박 목수님께서 특별히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시간도 없는데, 왜 그런…….”
“지금 출발하면, 왕복 하루로 충분합니다.”
승범이 불평하는 학우들을 달랬다.
“이렇게 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니면 지금 우리끼리 다른 모형에 대해서 다시 의논해 볼까요? 시간도 없는데?”
“하지만 승범 선배!”
“불평할 시간 있어! 움직이면서 생각하자고.”
승범이 학우들을 밖으로 떠밀었다.
모두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투덜대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친걸음이다. 멈추면 탈락이다.’
첫날인데, 성질 더러운 팀장의 비위를 거스를 수도 없지 않겠나!
승범이 물었다.
“팀장.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냐?”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처음? 나 어제 팀장 달았다. 알지?”
“칫!”
직접 보지 않고 만든다는 것은, 그 분위기를 살릴 수 없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랴.
실측은 숫자로 나타나지만, 분위기는 다르다. 현장에 가본 당사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다.
‘뭐든지 시작은 어려운 법이야.’
※ 작가주
보은 법주사 팔상전
: 국보 제55호. 높이는 22.7m이며,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
법주사는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되었고, 팔상전은 정유재란 당시 불에 타 없어진 후 선조 38년(1605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인조 4년(1626년)에 완성된 것으로, 1968년의 해체 복원 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벽의 사방에 각 면 2개씩 모두 8개의 변상도(變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보은 법주사 팔상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