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16화
새로운 제안(02)
비서가 말했다.
“총장님. 박람회 출품 책임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왜? 문제가 있나?”
“다른 과에서 지원을 갔던 학생들이 줄줄이 이탈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불만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총장은 찻잔을 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쯤 약발이 떨어질 때도 되었지.’
“하지만 그게 학생회장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빙긋이 웃는 총장이었다.
그는 이 사태를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총장님께서 그렇게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학과에 거의 강제하다시피 학생들을 투입했는데, 박람회의 결과가 좋지 못하다면 분명히 총장님께도 해가 미칠 것입니다.”
심각한 사안임에도 여전히 총장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문제라네.”
아직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성훈이라는 학생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시는 거겠지.’
“총장님. 이탈하는 학생들의 불만은 더 근원적인 곳에 있습니다.”
“근원적인 곳? 그게 뭔가?”
“기껏 도움을 주러 갔는데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하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비서의 말에는 진심 어린 우려가 섞여 있었다.
턱을 만지던 총장이 물었다.
“그걸 학생회장이 모르고 있을까?”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일을 실제로 진행하는 녀석이 민수라는 학생입니다. 그는 학생회장의 충성스런 심복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간에서 보고하지 않을 리가 없지요.”
총장이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그 녀석이 알고 있는데도,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거지?”
드디어 자신의 충언이 먹혔다고 생각이 들었다.
비서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네. 모를 리가 없는데도 아무런 대책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그게 더 염려가 됩니다.”
총장이 찻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럼 내버려둬. 녀석이 모르고 있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조치를 안 한다는 건 이미 다른 계산이 있다는 말이지.”
“네? 정말 저대로 두실 셈입니까?”
총장이 느긋하게 물었다.
“이탈되는 인원이 많은가?”
“네! 벌써 50%나 이탈을 했습니다.”
“저런!”
“남일 보듯 하실 일이 아닙니다. 학과장들의 성화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신경을 써 줬는데도, 후속 대응이 미진해서 자기들을 찬밥 취급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경 쓰지 말게. 다음 주까지도 아무런 조치가 없다면, 그때 내게 말하게. 녀석을 불러서 이유나 물어볼 테니.”
“총장님. 그러면 이미 늦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책임자를 경질하고 총장님께서 다른 방안을 모색하셔야, 나중에 책임지실 일이 적어지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을 총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허허허. 이 사람 정치꾼이 다 됐구만.”
총장이 찻잔을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으면 나가라는 축객령이었다.
비서가 총장의 등에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자신의 충심은 전해졌고, 이미 머리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터.
‘절대로 실수를 하실 분이 아닌데, 이번에는 돌을 잘못 놓으신 게야. 여차한 경우에는 내가 방패막이가 되어 드려야겠군.’
***
양 이사였다.
-성훈아. 이번에는 또 무슨 사건이냐?
“왜 이렇게 늦게 전화하신 거예요?”
-허. 녀석! 보자마자 타박이냐?
‘나도 급하단 말이에요.’
좀 더 일찍 현재 건설을 떠올렸다면, 느긋하게 작업이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대응이 약간 늦었다.
대뜸 그에게 물었다.
“기획서는 꼼꼼하게 검토하신 거죠?”
-그래? 그거 검토하느라고 늦었다. 그 기안을 통과시키려고 내가 며칠 동안 고생했는지…….
‘흥. 기획실을 통째로 쥐고 있으면서 엄살은.’
그의 너스레가 계속될 것 같았다.
“이사님. 결과 먼저 말씀해 주세요. 저 숨넘어가니까.”
-허. 어지간히 급했나 보구나. 숨 돌릴 틈도 없이 몰아붙이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어떻게 되기는 바로 결재 떨어졌지.
“그럼 제가 올린 안 그대로 진행 되는 거죠?”
-응. 사장님도 네 이름 대니까 바로 결재하셨지. 기대가 많으시더라. 이번에는 어떤 일을 만들지 말이야.
얼굴도 모르는 사장의 기대라니, 기분이 약간 설레었다.
‘사장이라면 확실히 이사들과는 급이 다르겠지.’
“갑자기 부탁드려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힘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미안할 게 뭐 있냐? 네 덕분에 여기까지 왔는데! 뭐든지 말해라. 내 양손 다 걷어붙일 테니까.
“참! 따로 올린 자금 지원 10억도 확실히 타내신 것 맞죠?”
-그래. 자세한 건 우편으로 보냈으니까, 내일쯤 도착할 거다. 그런데 그 큰돈은 어디다가 쓰려고?
“돈이야 다다익선이죠. 없어서 문제지, 쓸 곳은 찾아보면 널렸습니다.”
-그건 맞는 말이지.
“일 원 한 푼 비는 곳 없이 꼼꼼하게 장부 써드릴 테니까, 아무 염려하지 마세요.”
업무적인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이제 얼마나 수고했는지 무용담을 말씀해 주세요.”
-허허허. 이거 원 참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기획실장이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는 둥, 회의시간에 취업지원에 대한 타당성을 설명하느라 목이 쉬었다는 둥. 제 업적에 대해 늘어놓았다.
“고생 많으셨어요. 이사님.”
자금 지원이야 돈으로 끝나는 일이라지만, 취업지원은 그 의미가 달랐다.
그야말로 회사의 미래를 거는 게 아니던가?
-성훈이, 너는 대박만 터뜨리면 돼. 다른 지원은 나만 믿으라고.
그의 호탕한 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재주도 좋으시네요. 이사 직함을 달자마자 바로 기획실을 거머쥐시다니.”
-원님 덕에 나발 분다더니. 부사장이 날 그렇게 밀어줄 줄 어떻게 알았냐?
“부사장이요? 원래 친했던 분이셨어요?”
-아니. 부사장은 자기 라인 아니면 다 싫어해.
“그런데 어떻게…….”
-황 전무가 너무 세력이 커지니까 견제하느라 그랬던 거지. 기획실까지 넘겨줄 수는 없다. 뭐 그런 거였지.
“그래서요?”
들으면서도 웃음이 났다.
자신이 가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적에게 줄 수도 없으니, 중간에 있는 양 이사를 밀어 올려버린 것이다.
-나야 뭐. 힘 있는 자리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어? 사장님도 그런 의중을 비추시더라고. 그래서 냉큼 챙겨버렸지. 살다 보니 이럴 때가 다 있네. 내가 부사장이랑 황 전무 덕을 볼지 누가 알았겠어?
“거기 해외사업에도 영향력이 있는 곳이죠?”
사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양 이사를 그쪽 관련으로 밀어줄 생각이었다.
‘거기가 내 주 무대가 될 테니까.’
알아서 밥이 지어지는 느낌이랄까?
-그렇지. 그러니까 얼른 와. 둘이서 지금 박 터지게 싸우느라고 날 볼 틈이 없어.
“야금야금 힘이나 많이 키워두세요.”
-그러려면 네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얼른 오라고. 네 자리 비워 놓을 테니까.
“졸업은 해야죠.”
-얼른 안 오면 고새 밀려날지도 몰라.
“흐. 알았어요. 그동안 어떻게든 자리만 잘 지키고 계세요.”
-알았어. 그리고 거기 후원 설명회 하러 갈 때, 내가 직접 가도 되지? 너랑 술이나 한잔하게.
“그럼요. 환영합니다.”
-그럼 곽 이사 전화 받지 마.
“그건 또 왜요?”
-부득불 자기가 적임자라고 우기는 거야. 말리느라 애먹었어.
‘로펌 건으로 찔리는 게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흥.’
***
며칠 후, 민수가 리스트를 내밀었다.
“형. 대충 윤곽이 드러난 것 같아요.”
불평하는 놈, 선동하는 놈, 방관하는 놈. 흔들리는 놈. 그리고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 하는 사람.
민수에게 그들 중,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라고 지시했었다.
민수는 항상 그 회의에 참석을 하니까, 동향을 살피는 게 가능했지.
‘원하지 않는 녀석들은 나도 필요 없다고. 필사적으로 달려들어도 시원찮을 판에.’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꼼꼼한 민수답게, 실력과 성향을 잘 분석해 놓았다.
“고생이 많았구나.”
“뭘요. 시키는 대로만 한 건데요.”
“그래. 그럼 시작을 해도 되겠네.”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 이사와의 통화가 끝나고 민수가 물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어요.”
“뭔데 물어 봐.”
잠시 머뭇거리더니 민수가 말했다.
“항상 형은 주도적으로 움직였잖아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박살을 내버렸죠.”
‘내가 그렇게 과격했었나?’
하지만 돌이켜 보니 그랬던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응. 그랬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요.”
“음. 민수야. 디테일보다는 전체를 보는 것에 신경을 쓰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생각이었다.
민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품질을 보는 눈은 민수 네가 더 좋았지만.”
“에이. 설마요. 제가 형한테 배운 게 얼마인데?”
그 말은 민수의 겸양이었다.
실제로 나보다도 눈썰미는 좋았다.
나는 지난 삶의 경험이 있었기에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을 잡아낼 수 있었던 것뿐.
‘그리고 내가 앞서는 것은 현장 경험뿐이지.’
건축가는 건축의 전반을 감독하는 직책이다.
눈썰미는 필히 좋아야 한다.
그걸 가지려면 많이 보는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눈썰미가 반드시 좋은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수정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세부적인 것에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그 자리를 맴돌 가능성이 높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알아도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가 아닐까?
수정하고 넘어가라고, 후임에게 말할 수 있는 여유.
어쩌면 운명과의 타협인지도 모른다.
정해진 수명을 살고 있는 인간이기에.
끝없이 파고들어도 일의 깊이에는 도달할 수 없기에, 할 수밖에 없는 운명과의 타협.
“모든 것에 완벽할 수는 없겠지. 디테일은 내가 아니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거야.”
“훗. 그 말을 들으니, 형이 좀 인간답네요.”
“뭐야? 그럼 지금까지는 뭐 같았는데?”
“기계 같았다고나 할까. 완벽을 추구하는?”
“민수야. 이게 잘못된 생각일까?”
정확한 정답은 나도 모른다.
어쩌면 생이 끝날 때까지 고민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시도해 보고 싶어.’
이게 잘못된 판단이라면, 조금 더 일찍 경험하는 것도 한 방편이 아닐까?
사회에 나가서의 실수는 더 이상 실수가 아닐 테니까. 그건 실패라는 말과 직결된다.
민수가 내 의문에 답했다.
“형이 보지 못한 부분은 제가 챙길게요. 그리고 경호도 이제 어느 정도 익혔으니까요.”
“그래. 고맙다. 민수 너라면 믿을 만하지.”
지금까지의 내 방식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디테일보다는 전체적인 균형미를 신경 써야 할 때였다.
작품에 있어서건, 작업에 있어서건.
“특히나 이번에는 나보다 더 전통에 해박한 최 옹이 계신데, 내가 굳이 디테일에 간섭할 이유가 없지.”
그 말에 민수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해 놓고 나중에는 일일이 간섭할 거잖아요.”
“야! 그건 마무리할 때나 그렇겠지.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다른 게 보이거든.”
나무에 집중하면 숲을 보지 못하고, 숲을 보면 나무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런 대중적인 말보다, 아직 초보인 내게는 한 걸음이 딱 어울렸다.
‘급하게 갈 필요가 뭐 있어? 딱 한 걸음씩 물러나면서 확인하는 거지.’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도 말이다.”
“네.”
“작년에는 날 대신할 사람이 없었지만, 지금은 네가 있잖아. 그래서 나는 느긋하게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거지.”
미소 짓는 민수에게 말을 이었다.
“나중엔 다시 또 네가 내 위치로 올 거고, 그 때가 되면 나는 더 큰 그림을 그릴 수가 있을 거야.”
민수가 커피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그런 거죠?”
이 분위기를 조장한 이유를 묻는 것이리라.
“맞아. 굳이 적극적이지 않은 녀석들을 잡으려고 해 봐야, 시간 낭비가 될 뿐이야.”
“그런 것 같았어요. 평소와는 달랐거든요. 하지만 현재에서 취업 지원을 한다고 우리 일에 무관심하던 녀석들이 적극적으로 변할까요?”
민수의 의문에 확신으로 답했다.
“흐흐. 두고 봐. 이번에는 다를 거야. 그것도 진짜로 실력 있는 놈들이 몰려들 테니까.”
“왜 그렇게 확신해요?”
“최고의 기회를 코앞에 두고 빼앗길 정도의 멍청이들은 발도 들이지 못할 거야.”
민수가 커피 잔을 내밀며 웃었다.
“그렇게 되면 훨씬 일하기는 편해지겠네요.”
‘곧 확인하게 될 거야. 목마른 자 앞에 내밀어진 물 한 방울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를.’
이튿날.
양 이사가 우리 대학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