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15화
새로운 제안(01)
성훈은 계약 문제를 마무리되자 학과 사무실을 들렀다.
“민수야. 잘되고 있냐?”
“네, 그럭저럭요. 한동안 안 보이시던데.”
“일이 있어서 서울 좀 다녀왔어.”
“잘 해결되셨고요?”
“응. 그런데 요즘 타 학과 학생들이 박람회에 좀 소극적이지?”
민수가 놀라며 물었다.
“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김선우들과의 문제로 박람회 참석인원과 회의 결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회의록만 봐도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뒤로 갈수록 회의록 내용이 줄어들었거든. 예측했었던 상황이지만.’
민수에게 말했다.
“지금쯤 슬슬 총장이 내놓은 학점 약발이 떨어질 때가 됐거든.”
총장은 건축과의 박람회를 도와주는 학생들에게 특별 학점을 주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그래도 그 덕에 초반의 인재 유입은 좋았었잖아요.”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의 미끼였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달려들 만한 맛있는 먹이는 아니었던 거지.
“이대로 가다가는 원하는 결과를 못 내겠어. 지금 와 있는 인재들이 정말 학과 최고의 인재인지도 모르겠고.”
민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사실 우리 일보다는 자기들 일에 더 관심을 쏟죠. 주기로 한 학점은 참석만 하면 나오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 평가의 기준이 모호하지.”
“그렇긴 해요. 우리가 그 과의 특성을 모르니까요.”
“그리고 진짜로 똑똑한 놈들은 이미 학점을 다 따 뒀으니, 추가 학점에 관심이 없을 게 뻔하지 않냐?”
‘달리 말하면 학점이 만족스럽지 못한 학생들을 모았다는 말도 되겠지.’
총장으로서는 그것 말고는 대안이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독이 되었다.
타 학과 학과장들의 입장에서도 총장이 말했던 학점만 참가자들에게 줘도 책임은 다하는 것이기에, 그리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들 말로는 각과 최고의 인재를 보냈다고 하지만, 그걸 확인할 방법은 없지.’
물론 컴퓨터 공학과의 경우에는 최고의 인재를 보낼 정도의 열의를 보냈지만, 다른 학과에서도 비슷한 정성이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요. 믿을 수밖에요.”
“아니지. 학생 스스로 달려들게 하면 돼.”
민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처음부터 그런 방법을 쓰시지. 왜 그랬어요?”
‘생각이 안 났으니까, 안 쓴 거지. 맹추야.’
“곽 이사랑 통화하다 보니, 방법이 떠오르더라고.”
“현재건설에 후원 요청하시게요?”
“응. 정답이다.”
“하지만 후원은 지금도 학교에서 하고 있잖아요. 굳이 현재건설에까지 손을 내밀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그런 후원을 이야기하는 게 아냐.”
현재건설과 대학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뭘까?
그것은 취업이었다.
취업 준비를 하는 입장에서 기업은 언제나 갑이다.
학생을 취직시켜야 하는 학교는 항상 을이고.
“그럼 무슨 후원을 말하는 건데요?”
“재정 후원이 아니라, 취업 후원인 거지.”
“취업 후원이요?”
“지금 애들이 학점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는 이유가 뭐냐?”
“훗. 당연히…….”
“그렇지. 취업이지. 그런데 그걸 현재에서 제시한다.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아?”
“당연히 흥미가 생기겠죠. 하지만 어떤 식으로 현재에 어필하시게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해 줘.”
***
김선우는 박람회 회의를 끝내고 회의실을 나왔다.
“어? 선우야. 너, 박람회는 안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계약 문제 때문에 머리 아프다고?”
“인규구나. 그러려고 했는데, 일이 잘 해결됐어.”
인규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잘 해결된 얼굴이 아닌데?”
얼마 전보다 더 푸석푸석한 피부에 눈 아래가 거뭇거뭇하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건 다른 일 때문이고.”
“어떻게 해결이 된 거냐? 이렇게 금방 처리될 문제가 아니었잖아. 법학과 친구한테 물어보니까, 적어도 몇 달은 싸워야 할 거라던데.”
“맞아. 그런데 금방 처리하는 방법도 있더라고.”
그는 선우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었다.
“그럼 설마 돈질을 했다는 말인가?”
“그야 모르지. 난 그냥 결과만 들었으니까.”
김선우가 말을 이었다.
“우리 사장님. 대단하지 않냐?”
“허……. 벌써 사장님 소리가 나오냐?”
“그럼 뭐 어떠냐? 틀린 소리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한테는 은인이야. 은인.”
“그런데 그 사장이라는 분이 누구냐?”
“그…….”
성훈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받은 그로서는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다.
“그……. 뭐? 왜 말을 못해?”
“하여간 있어. 넌 말해도 모를 거야.”
김선우가 급히 말을 돌렸다.
“너도 나갈 거라더니. 왜 나왔냐?”
“너희들 나가는 것 보고 따라 나가려고 했지. 아무래도 혼자 나가는 건 너무 튀잖냐?”
김선우가 웃었다.
“이런 기회주의자 같은 녀석. 우리가 먼저 나가기를 기다린 거네?”
“뭐 어때. 여기서 받을 거 다 받았는데.”
“이미 학점 받았다, 그거지?”
인규가 띠꺼운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사실이 그렇잖아. 우리는 도와주러 왔는데 거기다 대고, ‘이거 해라. 저거 바꿔라. 더 좋은 안을 구상해 봐라.’ 어디 요구가 한두 가지냐? 꼴랑 학점 몇 개 받고 이렇게 무시당할 바에야 나가는 게 맞지.”
“아니야. 그래도 건축과 학생회장이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줄 거야. 기다려 봐.”
“됐어. 이미 학점도 받았고, 짜증 나는 이런 곳에 있을 생각이 없어졌어.”
“그럼 나갈 거냐? 혼자서?”
‘네가 나가긴 어딜 나가냐?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녀석이.’
인규를 잘 알기에 놀리려고 했던 것이다.
“불만 있는 애들도 많던데, 같이 나가야지. 아무래도 혼자서 나가면 보기가 안 좋잖아.”
‘어. 예상과 다른데? 그럼 박람회가 무산될 수도 있잖아.’
“나갈 거면 혼자 나가! 다른 사람은 왜 끌고 나가는데?”
선우의 말에 인규가 고개를 모로 뉘였다.
“야. 왜 그렇게 흥분해? 너 건축과 회장한테 뭐라도 받아먹었냐?”
“받아먹긴 뭘 받아 먹냐?”
“그렇잖아. 자식아! 나보다 먼저 나갈 거라고 했던 놈이?”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냐? 이미 받은 학점이 있는데, 의리 없이 내팽개치면 안 되지.”
“그깟 학점. 이제 충분해. 나머지도 받으면 4.0은 넘겠지만, 지금도 충분하다고. 이제 이런 데 참석할 시간 있으면 이력서나 넣는 게 더 이득이라고.”
“꼭 그렇게 해야겠냐?”
어깨를 잡은 선우의 손을 치며 말했다.
“이거 놔. 이 새끼야. 넌 이미 취직됐으니까 그렇게 속편한 소리 하는 거라고.”
그 말을 듣는 선우의 속도 편치 않았다.
“넌 사내새끼가 왜 그렇게 치사하냐?”
“치사? 운 좋아가지고 프로그램 하나 얻어걸린 새끼가. 니가 뭐라도 된 줄 알아?”
여태껏 정성으로 만든 프로그램을 비하하는 말을 들으니, 선우가 욱했다.
“이 자식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라. 새끼야.”
“그래, 부럽다. 됐냐? 꺼져. 새끼야.”
***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사장님, 큰일이 났습니다.”
“뭡니까?”
“박람회를 도와주기로 한 사람들이 대거 이탈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지금 이렇게 한가하실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마침 잘됐네요. 김선우 씨도 적당히 기회 봐서 빠지세요.”
대수롭지 않다는 내 반응에 그는 벙찐 얼굴이 되었다.
‘이건 뭐지? 이미 예측하고 있었나?’ 하는 표정.
그러나 김선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박람회 건은 사장님께서 신경 쓰시는 사안이 아닙니까?”
“신경 쓰는 건 맞는데, 언제라도 한 번은 생길 일이었어요. 지금 있는 인원들이 최고의 인재들인지도 모르겠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들만 봐도, 컴퓨터 공학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당신네 교수하고 내가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그런 거고.
“그리고 교수님께서 학점 약속을 하셨는데, 그것도 못 받는 것 아닙니까?”
“선우 씨가 학점이 왜 필요해요? 지금도 보니까 4.3이더구만.”
“학점을 많이 받아야 취직도 잘될 것이고…….”
“지금 저한테 취직했으니까, 기각!”
“그리고 교수님과 약속한 것도 있고.”
“그건 교수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그래도 여느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박람회 일에 임하고 있는데.”
‘나하고 마주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고? 어디서 꼼수를 부려.’
선우들과 며칠 정도 함께 일을 했더니, 이제는 멀리서 내가 보이기만 해도 슬슬 피했다.
***
그래서 꼬꼬마한테 물어봤었지.
평소라면 자기들 프로그램 하느라 바빠서 박람회 회의는 항상 뒷전으로 미루던 인간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회의에 가고 싶어서 안달을 하더라고.
“저 친구들, 원래 저렇게 박람회 일에 열심이었냐?”
정희가 코웃음 치며 내게 되물었다.
“오빠. 정말 이유를 몰라서 물어요?”
“그럼. 모르니까 묻지, 알면 왜 묻냐?”
“오빠 보기 싫어서 도망치는 거잖아요.”
“왜?”
“오빠가 내주는 과제가 얼마나 살인적인지 몰라요? 오빠가 내주는 건 아무리 간단해도 며칠 밤을 새워야 한다고요.”
‘그건 당연한 거고. 십 년을 당기는 게 쉬운 줄 알아?’
“흥.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정희가 양손을 허리에 딱 올리고,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냥 보는 거랑 직접 코딩하는 거랑 다르다는 걸 오빠가 모를 사람도 아니고.”
“그 정도는 컴퓨터 전공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당연히 하죠. 하지만 딱 죽지 않을 정도로 잠만 재우니까 그게 문제죠.”
“내가 언제?”
“언제는 언제예요. 매일 그러면서. 어제는 그 선배들 셋이 동시에 코피가 터져서 사무실이 피범벅이 되었었다고요.”
“아이고, 소중한 내 직원들이 그래서는 안 되지. 이번 건 끝나면 휴가 보내준다고 그래.”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정희가 방방 뛰었다.
“오빠만 없으면 그 선배들 휴가라고요.”
“훗. 어쩌냐? 내가 없을 일은 안 생길 것 같은데.”
“그나마 박람회 회의에 참석하는 게, 그 선배들한테는 유일한 휴식이라고요. 이 악덕 사장아.”
성훈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보수 없이 일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만한 대우를 해준다고.’
“못하면 못한다고 말하면 되지. 왜 말을 못해?”
“흥. 말해서 한 번이라도 들어준 적 있어요?”
“말 안 되는 소리만 하니까 그렇지.”
“어떻게 사람이 하루에 네 시간만 자고 살아요?”
“난 지금도 그렇게 한다고?”
“그건 오빠한테나 통하는 거고.”
***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눈 밑에 다크써클 좀 봐요. 지금도 한계구만.”
“그래도 우리는…….”
“박람회 회의 간답시고, 책상에서 자고 오는 것 아닙니까?”
김선우가 방방 뛰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여기 회의 내용 다 적어 온 것 안 보이십니까?”
‘얼굴에 소매 단추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구만, 어디서 꼼수를. 노트가 침으로 안 젖었으면 다행이겠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만하게 회의록 노트를 내밀었다.
“다행히 침은 안 묻었네요?”
그걸 잠시 훑어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름 머리를 굴리긴 했는데.’
“이거 글자체가 세 가지네요. 세 명이 번갈아 가면서 썼나 보죠?”
“헉!”
김선우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손가락이 아파서……. 키보드 많이 쳐서 생긴 직업병입니다.”
‘이 양반들아. 내가 당신들 나이 때, 그런 거 안 해본 줄 알아? 꼼수는 내가 더 선배야.’
“셋이서 번갈아 쓰면서 잤다는 말이네요.”
참다못한 정희가 말했다.
“선배들, 그냥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한 번도 말싸움에서 못 이겼으면서.”
“하지만 정희야. 우리도 살아야지.”
울상이 된 선우들에게 말했다.
“이번에 말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발리로 일주일 동안 휴가 보내드릴게요. 물론 회사 비용으로.”
“정말입니까? 사장님.”
셋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정희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야. 나 같은 사장 봤냐?”
그녀가 코웃음 쳤다.
“휴가 갔다 오면 또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돈 준 만큼 일하는 게 당연한 거지.”
“그나저나 박람회 건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대책이 있기는 해요? 민수 씨가 곤란해하는 것 같던데.”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미 대책은 서 있고, 그 녀석도 알고 있어. 하지만 정에 끌려서 그러는 거지.”
“정이라뇨?”
“그런 게 있어 설명하려면 길어.”
그녀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쯤이면 전화가 올 때가 됐는데?”
“무슨 전화요?”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기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런 게 있어. 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