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14화
거래(去來)(03)
-성훈 님. 삼일 로펌의 전 대표입니다.
‘대체 몇 번을 전화하는 거야.’
곽 이사에게 한마디 불평을 했던 여파가 그들에게까지 미친 것이리라.
갑질에는 도가 튼 곽 이사이니, 얼마나 그들을 괴롭게 했을 것인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훤했다.
세 번째 전화가 울릴 때는 받고야 말았다.
“저는 당신에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실은 울산에 내려와 있습니다. 꼭 만나 뵈었으면 합니다.
일단은 만나기로 했다.
‘얼마나 급했으면, 울산으로 내려왔을까?’
곽 이사가 생각보다 과하게 반응한 모양인데?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도와줄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만난 자리에서 전 대표는 성훈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대표님은 저에게 곽 이사님을 컨트롤해 달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곽 이사님과 제 일은 상관이 없습니다. 저도 곽 이사님께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이 아니고요.”
“그러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요? 뭐 때문에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전 대표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제 곽 이사의 태도로 봐서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던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곽 이사가 그렇게 허리를 숙일 인물은 많지 않았다.
함께 온 전지혁이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어제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성훈이 삐딱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여기 오시기엔, 너무 고급스럽게 차려입고 오신 것 같습니다.”
전지혁 또한 등에서 삐질 삐질 식은땀이 나왔다.
어제 자신이 성훈을 비꼬며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으니까.
얼굴 둘 곳을 모를 정도로 부끄러웠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진심입니다.”
진심인지 아닌지가 뭐 중요하랴.
어차피 확인할 수 없는 진심.
그러나 그 말을 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지.
철저히 머리를 숙이던지, 그게 아니라면 덤비든지.
덤비면 더 좋다. 밟을 명분을 주는 거니까.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이미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는데, 들이댈 이빨이나 있을까?’
“바쁜 걸음 하신 것 같은데, 용건이나 말씀하고 돌아가시지요. 저도 바쁜 몸이라.”
“어제의 실례를 사과하러 왔습니다.”
성훈이 말했다.
“네. 사과 잘 받았습니다. 그럼.”
“성훈 님.”
일어서려는 성훈의 소매를 부둥켜 잡았다.
“어제 가져오신 의뢰 자료를 꼼꼼히 읽어 봤습니다.”
“아. 제가 어제는 짜증이 나서, 그걸 받아온다는 걸 깜빡했네요.”
손을 내밀자, 전 대표가 말했다.
“어제 말씀하신 것은 계약의 파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네. 그랬습니다만. 이미 다른 곳에 의뢰했습니다.”
전 대표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헛. 그렇게나 빨리…….”
성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여기는 촌동네라서요. 제가 언제 또 서울을 올라갈 기회가 있겠습니까?”
비꼬는 말임에도, 그들에게는 뭐라 대응할 말이 없었다.
성훈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좋은 곳에, 그렇게 비싼 비용으로 맡길 일이 아니더라고요.”
전 대표가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그건 전 변호사가 실수를 했었더군요. 사과하겠습니다.”
“그건 이미 사과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말뿐이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훈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성훈 님의 그 건, 저희가 해드리겠습니다.”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바로 말을 이었다.
“아! 물론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것 같습니까?”
입꼬리를 올리는 성훈에게 전 대표가 다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곽 이사님께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만, 제게 이러신다고, 딱히 곽 이사님께서 화를 푸실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척하면 척이라고.
전 대표는 간절했다.
‘일단 이 일이 해결이 되어야, 곽 이사의 화를 풀든지 말든지 할 거란 말입니다.’
간절한 눈빛이 통했던 것인가?
성훈이 일어서며 말했다.
“정 그러시면 해보세요. 하지만 제게 협조를 구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제게 연락하지 마시고요.”
성훈은 귀찮은 티를 냈지만, 전 대표는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성훈을 마중한 후, 전 대표가 말했다.
“사흘 내로 이 일을 마무리 지어 야 한다.”
“아버지. 그건 불가능해요. 사흘 만에 어떻게 소송을 마무리한다는 말이에요?”
“어쩔 수 없다. 그것밖에 시간이 없구나.”
전지혁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국제 소송이었다. 무조건 몇 주는 잡아먹게 되어 있었다. 그걸 아버지가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이다.
결국 답답한 마음에 말을 꺼냈다.
“왜 사흘에 끝내야 하는지, 이유라도 말씀해 주세요.”
“지금부터 사흘 동안이 현재 건설에서 우리를 대체할 다른 로펌을 찾는 최소한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
“그 안에 이 일을 완료하지 못하면, 그 뒤에 해 봐야 ‘죽은 놈 불알 만지기’란 말이다.”
“그러네요. 하지만 곽 이사란 분한테 좀 늦춰…….”
전 대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가격 흥정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말미를 달라면 해 주겠냐? 아예 전화를 받지도 않는데? 분명 수신 거부를 해놓은 게지.”
물론 사무실로도 해 봤지만, 괜히 곽 이사의 화를 돋우지 말라는 비서의 핀잔만 들었을 뿐이다.
‘지금 기사회생의 유일한 끈은 이 젊은이 뿐이라고.’
“알아듣겠냐? 아들아. 우리 삼일로펌에 주어진 시간은 단 사흘뿐이다.”
‘이 건은 돈을 써서라도 해결을 봐야 한다고.’
중요한 건 결과이지,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아니다.
전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미국으로 날아가겠습니다.”
“그래 한시가 급하다. 네가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그 일을 마무리 지어라. 여차하면 얼마가 들어도 바로 보내주겠다.”
“네. 알겠습니다.”
***
그리고 사흘 후.
그들이 몇 장의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
“성훈 님. 이건 계약 취소 관련 서류입니다.”
“상당히 일을 빨리 처리하셨네요.”
“실제 재판이 진행되면, 아무래도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의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그 말뜻이 이해되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 대표가 말을 이었다.
“가장 빠른 방법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럼 이제 계약 문제는 해결이 된 건가요?”
상당히 빠르게 일을 해결했군.
확실히 실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건네받은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이 뒤에 있는 것들은 뭡니까?”
“‘아메리카 홈 스마트’에서 넘겨받은 데이터, 그것의 회수에 대한 관련 서류입니다.”
“호오. 그래요?”
이들이 약간 달라보였다.
‘알아서 가려운 부분을 긁어줄 줄 아네.’
사실, 넘어갔던 데이터는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었는데.
“꼼꼼하시네요. 이런 부분까지 짚어주시고.”
“성훈 님께서 목적하신 프로그램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차후 그 회사에서 그 비슷한 것을 제작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 부분은 걱정을 했었지요.”
전 대표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할 거라면 확실하게 해야겠지요. 끝까지.”
“하지만 이미 코딩한 것을 다른 곳에 카피했다면, 모조리 수거하기는 어려울 텐데요?”
전 대표가 열의에 찬 눈으로 말했다.
“그 부분에서는 계약파기와 동시에 저작권을 등록하고, 차후 그런 프로그램이 나오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했습니다.”
호오. 거기까지 생각을 했단 말이야?
그럼 홈 네트워크 관련으로는 당분간 안심하고 진도를 나갈 수 있겠군.
‘생각보다 일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성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 정도면 베스트잖아.’
“삼일에서 일을 제대로 했네요.”
전 대표가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가끔 가다가 미흡한 일처리로 나중에 소송이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의 마무리는 저희 삼일이 한국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거래란 주고받는 것.
설령 이게 사과의 표시라고 해도 받아먹고 입 싹 닦는 게 내 방식은 아니지.
‘이들이 원하는 것이 뭘까? 내가 좋아서 해준 건 아닐 테고.’
일하는 속도와 꼼꼼함이 마음에 들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한 번의 착신음이 끝나기도 전에 연결되었다.
-성훈 님. 전화를 몇 번이나 드렸는데…….
곽 이사가 호들갑을 떨며 전화를 받았다.
“곽 이사님.”
-저번에는 제가 주의가 부족했습니다. 삼일! 그놈들의 처리는 이번 주면 끝날 겁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은 잘도 하네.’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사람 볼 줄도 모르는 것들이 무슨 일을 하겠다고!
‘이 양반. 또…….’
어찌나 고함을 쳐대는지 수화기를 귀에서 떼었다.
그의 격앙된 음성이 수화기를 뚫고 나왔다.
걱정으로 찌푸린 전 대표의 얼굴이 보였다.
곽 이사를 달래며 말을 이었다.
“그건 됐고요.”
-되긴 뭐가 됐습니까?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은 제가 빠른 시일 내에……. 으드득.
뿌드득거리며 이를 가는 소리도 들렸다.
“제 일은 이미 처리되었습니다.”
-아. 소송 건 말이군요. 다행입니다. 빨리 처리가 되셔서.
“네. 곽 이사님 덕분입니다.”
곽 이사의 눈동자 굴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소송인데 벌써 처리가 될 리가 없는데……. 그 사무실 어딥니까? 저한테도 소개 좀 해주십시오.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그에게 웃으며 물었다.
“뭐 하시게요?”
-그렇게 일을 잘하면, 현재랑 일해야지요. 꼭 좀 소개해 주십시오. 어딥니까?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때 거기, 삼일 로펌요.”
-네? 삼일이요?
“네. 일 잘 하시는데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자세히 설명을…….
“미안하다면서 사과를 하러 왔더라고요.”
-네? 지금 옆에 있습니까? 저 좀 바꿔주십시오. 그렇게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건만. 내 이것들을!
곽 이사의 포효에 전 대표와 전 변호사의 얼굴이 노래졌다.
‘둘이 짠 건 아니라는 말인데?’
전화를 하기 전에는 곽 이사과 전 대표가 짜고, 내 화를 풀어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었다.
그런데 반응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스스로 이렇게 판을 짰다는 건가? 그럼 제법이잖아.’
잘 달리는 말에게는 당근을 주는 법.
삼일 로펌이 마음에 들었다.
곽 이사에게 물었다.
“이미 현재는 삼일과 거래를 끊기로 하신 겁니까?”
-네. 이미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이미 결재가 올라간 모양이군요?”
-네. 이미…….
‘이 양반이 어디서 구라를.’
“아직 삼일의 대안을 못 구하신 것 같던데…….
-네. 그렇기는 합니다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현재 건설에서 대안도 없이 결재를 올린다고요?”
-그게……. 아직 대안이 없어서.
“그럼 아직 결재가 안 올라갔다는 말이네요.”
-사실은 그렇습니다.
대안도 없이 결재를 올렸다가는 결재판 모서리에 머리통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구라는 통하는 사람한테나 치세요. 방금 전에 로펌을 찾는다고 한 사람이.’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재고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실 가치가 있겠습니까?
“이사님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도리가 아닌 건 알지만.”
-…….
“두 분이 화해하시고 좋게 해결하시죠?”
잠시 후 곽이사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끄응. 그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그럼 그렇게 해 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전 대표에게는 제가 따로 전화 넣겠습니다.
“그러면 더 좋고요. 요즘 제 일을 하시느라 살이 많이 빠지셨더라고요.”
전화를 끊었다.
전대표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성훈 님.”
허리를 굽히며 큰 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성훈 님께 관련된 소송은 제가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 반드시 공짜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해 드리겠습니다.”
“대표님.”
“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당황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제 성의인데.”
“과도한 친절은 불편합니다.”
그리고 준비해 둔 오천만 원을 내밀었다.
“성훈 님. 이러실 필요까지는…….”
“일의 대가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이러면 제가 죄송합니다.”
거절하는 전 대표의 손을 붙잡아 수표를 쥐어주었다.
일의 대가!
그것은 너무 적으면 불공정하고, 너무 많으면 부적당하다.
대가란 넘치기 직전의 물그릇과 같아서 적정선이 있다.
그 선이 지켜지지 못할 때, 건강하지 못한 관계가 되고, 사회는 병든다.
‘그리고 사실 호의를 호의로만 받아들이기도 어려웠거든.’
내 눈에는 그의 계산이 보이는 걸 어떡하나.
나를 붙잡음으로써 곽 이사를 묶어놓겠다는 계산, 더 나아가 당분간 현재 건설과의 끈을 굳건하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아직 그러기에는 현재와 삼일이 격이 맞지 않다고요.’
더 크고 나면 다시 도전해 보던지.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자리에 맞는 옷을 입고 오란 사람은 당신 아들이었으니까.’
“네?”
“언젠가 또 좋은 기회가 오겠죠.”
전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일이 생기면, 반드시 삼일을 찾겠습니다.”
그들이 서울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