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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213화 (213/427)

건축의 신 213화

거래(去來)(02)

내가 기죽기라도 바랐던 것인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고객님.”

오억 짜리 계약을 무산시키는 데, 이억을 내놓으라 한다.

‘그것도 추가 금액까지 얘기하면서?’

이건 무조건 하기 싫다는 것이고.

나도 안 하면 되는 거다.

‘기분은 별로지만, 똥 밟은 셈 치지. 뭐.’

한국에 로펌이 이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곽 이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업체를 소개시켜 줬다 이거지. 아무 생각이 없네.’

그게 아니라면, 현재 정도의 기업이 와야 상대해 준다는 건가?

내 스스로의 피해망상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보아하니, 경력도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래도 납득을 시키려고 일일이 귀찮게 설명을 한 건데.’

그래도 안 통하면 일어서야지. 방법이 있나?

하지만 물어보고 싶었다.

“너무 비싼 것 아닙니까?”

전지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 지었다.

‘이왕 어긋난 것, 끝까지 대차게 나가야지.’

한번 약한 인상을 보이면 깔보이게 될 걸?

“고객님. 비싸다고 생각이 드실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돈을 지불하고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뒤통수 맞으면서, 거래를 할 수는 없잖아.’

얼마나 호구 취급을 받을 것인가?

‘돈은 있지만, 너하고는 안 해.’라고 큰소리를 치자니, 바보가 될 것이고.

‘이 인간은 코웃음도 치지 않을 텐데, 혼자서 생쑈를 하는 거지.’

허나 ‘그 금액에 하겠다.’고 돈질하면 당장은 기분이 좋겠지만, 그건 바보천치가 된다.

그럼 답은 조용히 일어나는 것, 하나였다.

‘쩝. 일하는 것 보고, 차후의 소송도 맡기려고 했더니, 이건 영 사기꾼이네.’

위험 부담이 크고, 패소를 할 가능성이 많다면 큰 비용을 들여서라도 승소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이치에 맞겠지.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여차한 경우에는 그냥 위약금 일억 오천 물어버리고, 계약 취소하는 게 낫지, 내가 미쳤다고 이억이나 들여서 이 일을 하겠어?’

거기다가 그들이 컴퓨터를 구입한다고 사용한 계약금 오천은 당연히 지불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도 위약금에 포함되니까.

고로 나는 일억만 있으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데 뭐? 이억. 그것도 추가 비용이 들어?

‘이 양반이 누굴 호구로 아나?’

이미 내가 제출한 계약서 사본을 자세히 훑어보기만 해도, 내가 얼마 정도를 생각하고 왔는지 뻔히 알 텐데.

이렇게 나온다는 건, 하기 싫다거나 혹은 나를 바보 취급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거기에 장단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하여간 변호사님은 이억이 마지노선이라는 거 아닙니까?”

“정히 비용이 부담되신다면, 약간의 협의를 거쳐서 디스카운트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일을 제대로 해 주길 원하는 거지. 처음부터 비용을 깎아줄 생각으로 세게 부른 거라면 신뢰가 가질 않네요.”

“제가 일부러 그랬다는 말입니까?”

살짝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나도 기분이 안 좋기는 매한가지.

허나 다른 곳을 찾아가면 될 일.

굳이 여기서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있을까?

나중에 정히 열이 받는다면, 곽 이사를 불러서 화풀이나 해야겠다.

‘네가 화가 난다고 어쩔 거냐?’라는 당당한 눈빛이었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친구와 드잡이 질을 해서야 내 체면만 상한다.

나이든 사람이 이랬다면, 어떻게든 작살을 내려고 덤볐겠지만 말이다.

눈썹을 으쓱이며 답했다.

“아뇨. 제가 받아들이면 거래 성립. 받아들이지 않으면 거래 무산. 그게 거래란 거죠.”

그가 수긍하듯 나처럼 눈썹을 으쓱했다.

“그러니까 저는 다른 로펌을, 당신은 다른 고객을 찾으면 되는 거죠.”

“그렇지요. 거래가 무산되어서 섭섭합니다.”

“저도요. 어느 정도 프리미엄이 붙을 걸 생각하고 왔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문턱이 좀 더 높았나 봅니다.”

일어서는데, 변호사가 말했다.

“고객님. 앞으로 이런 곳을 드나들 때는 어울리는 차림을 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나중에 수트를 입고 와 봐야겠네.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다시 올 일이 있겠느냐마는.

***

통유리 너머로 상담하는 모습이 보였다.

‘불쾌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곽 이사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까 대표와 사무장의 대화로 봤을 때는, 뿔이 나도 단단히 났을 것 같은데.

‘아. 시팔. 나도 알래스카로 가는 것 아니야?’

김성훈이라는 인간과 척을 쳐서 좋게 끝나는 꼴을 본 역사가 없지 않은가?

문을 열릴수록 그의 가슴도 두근두근 방망이질 쳤다.

‘여길 소개해 준 사람이 나라고. 제발…….’

아직 의뢰가 파토나지만 않았다면, 전 대표에게 압박을 넣어서라도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젠장. 이미 늦었구먼!’

막 자리에서 일어서는 성훈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미 노란색 카마로에서 그 주인의 정체를 짐작했지만, 뒤통수만 보고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 것인가?

저 뺀질뺀질한 젊은 변호사 놈의 얼굴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성훈이 돌아섰다.

뭔가 찝찝함이 남아 있는 얼굴.

기분 좋게 의뢰를 맡겼다면, 절대로 나오지 않을 표정.

‘크흑. 망했구나.’

전 대표가 말했다.

“하하. 마침 상담이 끝났나 보군.”

젊은 변호사가 책상을 돌아 나왔다.

“엇? 대표님. 지금 막 끝났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 곽 이사님. 이 친구가 아까 말씀드린…….”

전 대표가 웃으며 곽 이사를 돌아보는데, 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십니까? 이사님.”

그에 대한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캐주얼차림 젊은이의 목소리였다.

“이사님. 이거 완전 뒤통수 맞았는데요?”

곽 이사가 급히 허리를 숙였다.

전 대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어찌된 영문이지?’

자신의 아들, 전지혁에게 하는 인사는 아닐 터,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한 명 뿐.

“곽 이사님. 뜬금없이 이게 무슨…….”

곽 이사의 입에서 공손한 인사말이 나왔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연락을 드리지 못해서.”

“곽 이사님 잘못은 아니죠. 이런 차림으로 여길 방문한 제가 잘못이죠.”

성훈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이런 데를 방문하려면 드레스 코드를 맞춰야 하나 봅니다. 몰랐습니다.”

곽 이사는 나가려는 성훈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성훈 님. 그럼 제가 다시 한 번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곽 이사가 고개를 들며, 성훈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미?”

“여기랑 거래하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요.”

성훈에게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다른 곳을 알아볼까요?”

“아뇨. 이제부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성훈이 문을 열고 로비로 나갔다.

“이사님. 이게 어찌된 일인지?”

곽 이사는 자신의 소매를 붙드는 전 대표의 손을 뿌리치며 으르렁거렸다.

“당신네 직원이 지금 무슨 일을 한 건지 아는 거요?”

성훈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서며 말을 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할 거요. 전 대표.”

방금 전까지 화기애애했었는데, 이 표정 변화는 어인 일인가?

얼마 전 미국에 있는 친구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전 대표. 현재 건설과 일하려면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곽 이사라네.’

‘그 사람이 요즘 뜨는 실세라면서? 사람이 그리 막돼보이지는 않던데?’

‘내가 지금까지 현재와 일하면서 만난 인물 중에 가장 교활한 사람이지. 그리고 한번 밉보인 자는 절대로 그냥 두지 않거든.’

그리고 그는 이렇게도 말했었다.

‘곽 이사. 그는 양날의 검이야.’

‘그게 무슨 말인가?’

‘잘 되고 있을 때는 한없이 잘 대해주지만, 관계가 틀어지면 바로 자네 목을 겨눌 거라네.’

‘음. 그래서 양날의 검이군.’

친구는 이전에 현재와 거래한 경험이 있었다.

그가 전 대표를 걱정하며 말을 이었다.

‘그에게 밉보이면 안 돼. 절대로.’

‘훗. 밉보인다고 죽기야 하겠어?’

웃음 섞인 대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적어도 같은 일을 하면서 한국에서 살 생각은 하지 마.’

‘훗. 그럼 어쩌라고?’

‘그냥 변호사를 접든지, 아니면…….’

‘아니면?’

‘다른 나라로 뜨던지.’

영문을 몰라 하는 자신에게 그는 말했었지.

‘나처럼 말이야.’

그게 고작 일 년 전 이야기였다.

일 년 동안 현재와의 협업은 순항일로였고, 곽 이사가 어떤 인물인지를 잊고 있었다.

허나 한 번 실수로 대업을 그르칠 수는 없지 않을까?

‘이류였던 회사가 현재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일 년 만에 일류로펌이 되었다고. 이제 초일류로 발돋움하려는 찰나였는데.’

지금 양날의 검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이게 무슨 영문이람.’

이유도 모른 채 목을 베이게 생겼다.

‘이 일을 따내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물을 곳은 단 한 명, 아들에게 시선이 닿았다.

‘원인을 알면, 해결책도 보이리라.’

“그래서? 그 고객에게 바가지를 씌웠다고?”

“바가지가 아니죠. 저는 제가 생각하는 가격을 불렀고, 그는 포기한 것뿐이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포기가 아니라, 버림당했다는 걸 모르겠냐? 멍청아. 미국에서는 잘만 하더니.’

법 공부는 했지만, 세상 공부는 아직 덜 된 모양이었다.

‘품에서 가르칠 것을, 미국에 너무 일찍 보냈어.’

전 대표가 고함을 질렀다.

“그걸 바가지라고 한다. 망할 녀석아.”

전지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버지. 거래가 무산된 것뿐이라고요. 그래봤자 고작 이억이고.”

“고작 이억? 고작! 이억!”

“왜 그러세요? 아버지. 무섭게. 진정하세요.”

“내가 이 회사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아?”

속사포처럼 고함을 질러댔다.

“수임료 50만 원부터 시작해서 이 자리까지 오는데 30년이 걸렸다. 삼일이라는 이 이름 하나로 말이다. 그런데 고작 이억?”

“이렇게 공들인 회사가 한꺼번에 무너지게 생겼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아버지의 격한 반응이 의외였던가?

전지혁은 도끼눈을 뜨며, 대꾸를 했다.

“조건이 안 맞아서 못하는 걸, 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세요?”

그의 말에 전 대표의 눈 밑에 경련이 일었다.

“후우……. 네가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아까 나랑 들어왔던 분이 누군지는 알아?”

“모르죠.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않았잖아요.”

“우리를 일류에서 초일류 로펌으로 끌어올려줄 현재 건설의 곽 이사다.”

“고작 우리 회사가 겨우 이사에게 기대야 올라갈 정도로 작은 회사인가요?”

아들의 속편한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허.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 회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알기는 하냐?”

“에이. 설마요? 한국이 그렇게 무법천지는 아니잖아요.”

돈 앞에 법은 무의미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까 어떻게든 붙들고 사과했어야 했는데.’

***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다.

“네. 곽 이사님. 아까는…….”

-전 대표. 현재와의 일은 없던 걸로 아시오.

“하지만…….”

여기서 우릴 괴롭힐 거냐는 말을 하는 건 순진해 빠진 소리. 곽 이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길을 막아설 것이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어떻게든 그의 기분을 풀어야 해.’

“일단 사과할 기회라도…….”

-흥, 그런다고 실수가 없어지는 거요?

“하지만…….”

-전 대표. 세상 참 편하게 사십니다.

비꼬는 것이 명백한 말임에도, 그는 감히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는 갑중의 갑인 현재 건설, 그 중에서도 떠오르는 실세인 곽 이사가 아니던가?

작년 말, 그는 중동에서의 일을 잘 처리하고, 사장에게 직접 중동 관련 법적 분쟁을 총괄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중동!

샘솟는 석유로 건물을 쌓아올리는 건설업계 최대의 블루칩이었다.

건설 사업이 가장 많은 곳이 중동이고, 현재 건설의 중동 책임자는 곽 이사, 게다가 곧 전무로 승진될 것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에게 밉보이고서 중동 관련의 법률 문제를 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곽 이사님. 해명할 기회라도 주셔야…….”

-닥치시오. 전 대표. 다음에 봅시다. 으드득.

이빨 가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뚜.

뭔가 섬뜩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

다급하게 리다이얼을 눌렀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 대표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혁아. 방법을 찾아라.”

“왜요? 아버지는 자존심도 없어요?”

“그건 네가 곽 이사를 몰라서 하는 말이야. 그가 얼마나 냉혹하고 비정한지를.”

“그냥 사과하면 되는 일이잖아요. 제가 가서 사과할게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 일을 해결할 방법부터 찾아. 사과는 그 뒤의 문제다.”

알아서 기어야 한다.

그래야 이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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