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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211화 (211/427)

건축의 신 211화

뜻밖의 발견(03)

선우가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조건이라뇨? 어떤?”

지금 당장 써먹지도 못하는 그걸 내가 미쳤다고 오억이나 주고 사겠어?

바꿔야 할 것 투성이인데!

이십 년의 시간을 일 년으로 줄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줄 알아?

그리고 그건 나밖에 못하는 거라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지.

‘그리고 무조건적인 호의라고 느껴지면, 의심부터 해 봐야 되는 거 아니냐? 이 호구들아.’

하지만 이들의 창의성은 존중해 줄만 했다.

‘원래 이 프로그램의 주인은 이들이니까.’

허나 그가 납득할 만한 답을 줘야겠지.

“오억은 제가 저작권을 갖는 비용입니다. 그리고 계약금 포함, 기본적인 조건은 ‘아메리카 홈스마트’와 같습니다.”

선우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저희는 또 다른 조항이 걸리는 줄 알고.”

금액을 깎는다거나 하는 그런 것을 염려했나 보지.

‘그만한 가치가 있으면 지불한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제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럼…….”

“당신들은 각 연봉 3,000에 제게 2년간 고용되어야 합니다. 물론 세부 조항은 제가 정할 겁니다.”

1년으로 제시하려고 했지만,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선우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봤다.

셋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새옹지마가 이런 의미 아닐까?

하지만 정희는 그들에게 동참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오라방. 이렇게 후한 조건을 내걸 사람이 아니잖아.’

그들의 대답을 재촉했다.

“이래도 하시겠습니까?”

이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지금 당장 계약금은 물론이고, 위약금까지 도합 2억을 물어야 할 판인데?

세 명이 동시에 나를 보며 말했다.

“당연히 저희야 좋죠! 앞으로는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겁니까? 사장님?”

그들의 입에 걸린 웃음에 화답하며 말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날 즈음에는, 당신들 모두 적어도 홈 시스템이 관한 한, 권위자가 되어 있을 겁니다. 2년 후 계약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결정하도록 하죠. 어떻습니까?”

왜 이들을 추가로 비용을 들이면서 고용하냐고?

이건 월급이 아니라고.

그들이 받을 정신적 피해보상을 미리 지급하는 거지.

내게도 이들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들, 내가 그걸 일일이 분석하는 건 시간낭비지.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불러서 분석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

‘구관이 명관이라고, 자기들이 만든 작품이니 더 애착을 가지지 않겠어?’

비밀엄수 때문에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도 없거니와, 어중이떠중이를 고용해서 기밀을 유출하는 것보다는 기본 틀이 잡힌 이 친구들을 혹사하는 게 훨씬 더 낫다고.

앞으로 나올 결과물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그걸 본 정희가 도끼눈을 한 채, 부르르 떨었다.

도산 사무소에서 공모전을 하면서 나에게 갈굼당했던 생각이 나서 일까?

지금이야 그녀도 한 사람 몫을 하는 3D 디자이너가 되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남달랐다. 다시 한 번 하라면 할까?

‘하긴 정희가 내 최초의 직원이었지.’

정희가 나를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심전심.

정희와 나의 시간은 짧았지만, 그만큼 치열했고, 밀도가 높았다.

‘흥. 눈치 깠구나.’

‘당연하죠! 제가 오빠와 지낸 시간이 얼만데요! 사. 장. 님!’

그녀를 보며, 인상을 팍 썼다.

‘다된 밥에 초치면 죽을 줄 알아.’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근데 오라방.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래서 연봉도 3,000이나 제시했잖아.’

삼송, 현재의 연봉이 2,500 겨우 될랑 말랑 하거든!

‘이 정도면 국내 최고의 대우라고.’

‘그래도 오빠는 3,000만 원보다 더 많이 뽑아 먹을 거잖아요?’

‘당연하지. 본전치기 할 거면 투자 왜 하냐? 내가 대가리 총 맞았냐?’

다시 정희가 고개를 흔든다.

‘에구. 저러니까 도산 소장이 오빠라면 고개부터 흔들지.’

‘어차피 대안이 없으면, 선택의 여지도 없어!’

공모전에 관한 한, 울산에선 내가 탑이라고!

정희가 계약에 연관되고 싶지 않았던지, 커피를 탄다며 은근슬쩍 자리를 피했다.

‘잘 생각했어! 꼬꼬마.’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다가, 김선우가 물었다.

“왜 저희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겁니까?”

호의?

이걸 과연 호의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뭐. 상관없지. 일주일 후면 진상을 알게 될 테니. 계약 파기하자고 빌어도 안 해줄 거니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고,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

일단 계약부터 성사시키고 볼 일.

그러자면 저들에게 내 이미지를 최대한 아름답게 포장해야 하리라.

“저는 당신들의 패기로 탄생한 아이디어를 사장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계약이 파기되고 나면, 당신들은 빚더미에 앉을 것이고, 그들은 당신의 아이디어로 승승장구하겠죠.”

개인이 기업에게 이길 수 없고, 그 뒤의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김선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랬죠. 어떻게 할 방법도 모르고.”

“그 꼴은 못 보죠. 안 그래요?”

“그렇죠. 성훈 씨 덕에 살았네요.”

차를 타던 정희가 물었다.

“선배들. 계약금을 받은 거 있으니까, 그걸로 변호사를 고용하면 안 돼요?”

‘꼬꼬마! 너 지금 …….’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정희가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그들의 답이 가관이었다.

셋이 자기 자리의 컴퓨터를 가리키며 멋쩍게 웃었다.

“계약금 받자마자, 컴퓨터부터 바꿨거든요.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꿈에나 생각했겠어요?”

‘휴. 일단은 대안이 없다는 말이군.’

셋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씨 뿌린 자가 열매를 거둬야 공정한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희가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노동자보다 땅주인이 더 가져가기도 하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게 아주 초를 치려고.’

내 눈가가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녀가 내 눈을 피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말이 그렇다고요. 말이.”

정희가 시원한 주스를 가져와 나눠줬다.

“그래도 선배들. 성훈 오빠한테 혹사당하면, 호의라는 말이 쏙 들어갈 걸요?”

허풍이라 생각했던지, 김선우가 웃었다.

“야! 지금도 충분히 혹사하고 있다고, 이 이상 더 어떻게 혹사당하겠어? 하하하.”

그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럼요. 선우 씨는 지금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이 친구들아. 이십 년 세월을 일 년으로 단축할 거라고. 의자에 앉을 때마다 신물이 나오게 해주지.’

권위자가 되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딱 과로사로 죽지 않을 정도로만 굴려주지.

정희가 그들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불쌍한 중생들! 늑대를 피해서 범 아가리로 기어들어가네. 쯧쯧쯧.’

김선우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성훈 씨. 계약 부탁드립니다.”

그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봅시다. 박람회 건도.”

“그럼요. 해결해 주실 줄 알고, 박람회 건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가슴이 뿌듯했다.

앞길이 창창한 프로그래머, 몇 살린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돈이 될 나무까지 얻었다.

‘아메리카 머시기’의 생각은 잘못되었다.

프로그램만 빼먹고, 저들을 버릴 속셈이겠지.

‘될 성 부른 나무를 장작으로 만들어서야 쓰나?’

고이고이 길러서 열매를 거둬야지.

내 안의 김성훈이 물었다.

-너 완전 악당에, 사기 케릭인 거 알지?

‘당연히 알지.’

‘하지만 생각해 보라고.’

-뭘?

‘이 계약은 분명히 깨어지게 되어 있어. 아마 이들은 혹사만 당하다가 인생이 망가질 거야. 소송을 건다면, 이 친구들이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소송 자체가 불가능하겠지. 소송에도 돈이 들 테니.

‘저들에게 다른 대안이 있을까? 나처럼 그들의 가치를 알아줄 사람이 있느냐는 말이야.’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 프로그램은 시기상조였다.

-지금까지 넘긴 데이터로 ‘아메리카 스마트’가 먼저 홈 시스템을 만들 가능성도 있지 않겠어?

그의 물음에 웃음이 난다.

‘콜럼부스의 달걀이라고. 이건. 그들이 몇 달을 고민해야 하는 결과를 난 이미 알고 있다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왜 십 년 후에나 이런 시스템이 나오는지를 생각하면 답은 간단하다.

그때까지 안 나왔다는 말이다.

‘아메리카 머시기. 아직 유명하지 않다고? 영원히 유명하지 못하게 해주지.’

-휴. 맘대로 해라.

손을 마주 비비며 웃었다.

“이제 느긋하게 변호사만 찾으면 된다. 이 말이지.”

***

전화가 울렸다.

“곽 이사님. 어쩐 일이십니까?”

-성훈 님. 부탁드릴 게 있어서 말입니다.

“말을 놓으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둘이 있을 때는, 그게 영 익숙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편할 대로 하세요. 무슨 부탁이신대요?”

‘그가 내게 부탁할 일이 뭐가 있을까?’

딱히 생각해봐도, 중동 관련 일밖에 없었다.

-이번에 우리 현재 건설이 사우디의 입찰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습니다. 그 건으로 그쪽에서 소송을 걸었습니다.

“그래서요?”

-성훈 군께서 알리 왕자에게 전화를 한 통 해주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그걸 제가 왜 해야 하는데요?”

괜히 알리에게 신세를 질 이유가 없었다.

필요하다면 곽 이사가 직접 하면 될 것 아닌가?

“알리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은데요.”

저번에 프랭크 건으로도 신세를 졌단 말이지.

물론 알리는 좋다면서 승낙했지만, 빚진 기분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알리 왕자에게도 좋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중동 내부의 썩은 고름을 짤 수도 있거든요.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곽 이사의 설명은 이랬다.

중국 쪽에서 저렴한 인건비를 내세우며 입찰에 참가했고, 그와 동시에 건설 관련 공무원들에게 무한 로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 건의 경우도 중국 쪽의 로비를 받은 공무원이 고의적으로 클레임을 건 것이 이 일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낙찰은 유찰이 되고, 중국 쪽에서는 입찰에서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다며, 소송을 했겠지.

-현재건설만 없으면, 제 놈들이 입찰할 게 뻔 하니 소송을 건 것이지요.

고름이란 사우디에서 행해지는 비리를 말하는 것이리라.

‘이상한데? 그걸 왜 내게 떠넘기는 거지?’

곽 이사의 성격상, 자기가 말하고 알리에게 생색을 내어야 마땅한데 말이다.

“곽 이사님이 직접 하시는 게 좋지 않습니까?”

-그게…….

잠시 망설이던 곽 이사가 말을 이었다.

-그날 이후로 알리 왕자가 영 껄끄러워서 말입니다.

“그날이라뇨?”

-그…… 그 알리 왕자의 응접실에서 저희 단둘이 독대했던 날, 기억 안 나십니까?

‘응접실? 그게 무슨 말이지.’

눈동자를 굴리다가 생각이 났다.

“아! 그날이요?”

때린 놈은 기억에 없어도, 맞은 놈은 평생 가슴에 새긴다고 했던가?

곽 이사에게야 평생에 남을 악몽일지 몰라도, 나야 뭐! 쩝!

-네. 그 날 말입니다. 성훈 님께서 별 일 아니라고 하셨으니 왕자도 그냥 넘어갔지만, 뭔가 개운치 않았나 봅니다.

‘당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거겠지.’

-그 뒤로도 몇 번 통화를 했는데, 제 말이라면 일단 먼저 의심을 하는 것 같아서. 영…….

그는 자신이 없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자업자득이지.’

“정보는 확실한 겁니까? 저도 전화했다가, 괜히 알리에게 실없는 사람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오. 이건 확실합니다. 다만 그쪽 건설부에 관련된 문제인 만큼, 제가 로비 문제를 거론하면, 알리 왕자가 자존심 상해 할 것이기에,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중동에서는 공공연히 행해지는 일입니다.

알리에게 잘 보일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로 떠미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그날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었다.

‘쯧쯧. 내가 너무 심했나?’

알리 왕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프랭크 때 진 빚이나 갚아야지.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잘 말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엇! 소송?

이번 건도 국제 소송이 될 건데.

“잠깐만요. 곽 이사님.”

급히 전화를 끊으려다 다시 받은 모양인지, 그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네. 다른 말씀이라도?

“곽 이사님. 우리나라에서 국제 소송을 제일 잘 하는 변호사가 누굽니까?”

-그건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혹시 사업을 시작하시는 겁니까?

‘눈치는? 정말…….’

“아뇨. 제가 아는 사람이 곤란한 일이 있어서요.”

건축에 관련된 일이라고 미리 알렸다가는 여기저기서 투자하겠다고 나설 지도 모른다.

아직 시기상조이니 관심이 덜할지는 몰라도, 내가 한다고 하면, 돈부터 들이밀 인간들이 꽤 있었다.

그런 거 있잖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투자하겠다는 인간들.

‘당장 곽 이사부터도 마찬가지고.’

-아! 그럼. 지금 저희 회사의 소송을 담당하는 로펌 대표에게 전화를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아뇨. 작은 건이라서 그럴 필요 없어요. 다음 주에 갈 거니까, 회사 이름이랑 연락처나 가르쳐 주세요.”

-그러시다면 제가 문자로 넣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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