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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210화 (210/427)

건축의 신 210화

뜻밖의 발견(02)

사무실에는 세 명의 남자가 모니터에 얼굴을 처박고, 키보드를 부술 듯이 쳐대고 있었다.

“김성훈입니다. 이번 박람회를 총괄하고 있죠.”

옆에서 정희도 거들었다.

“선배들, 건축학과 학생회장이기도 해요.”

“아. 그래? 반갑습니다. 김선우라고 합니다.”

정희에게서 내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악수를 청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지원을 갔으면 끝까지 할 일을 다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저희 일이 급해서 도저히 그쪽으로 신경을 쓸 수가 없네요.”

그는 내게 탁자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정희가 잽싸게 커피를 내왔다.

“성훈 오빠가 온 이유는요.”

정희의 말을 제지하며 말을 꺼냈다.

‘셋 다 팬더가 되어 있는데, 굳이 더 부담을 줄 필요가 있을까?’

그녀가 말하면 변명이나 재촉으로 들릴 우려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 일을 타박하려고 온 건 아닙니다. 지금 진행하시는 일이 메인이 되는 건 당연하겠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선우에게 물었다.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그때, 정희가 끼어들어 설명을 늘어놓았다.

“성훈 오빠가 계약에는 빠삭해요. 저도 옆에서 많이 봤거든요? 그런데 손해 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아마 정희가 말하는 계약이란, 도산 소장과의 계약을 말하는 것이리라.

‘뭐. 소장은 내 봉이었지.’

지난 삶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랄까?

그때는 내가 그의 봉이었는데!

“그래? 정말이야?”

선우들의 상체가 앞으로 숙여졌다.

“실은 저희도 계약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거든요. 도움을 청해도 될까요?”

‘크. 정희가 분위기를 잘 잡았네.’

원래는 내가 보여 달라고 부탁을 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옆에서 정희가 나를 보며, 눈을 찡긋 거린다.

‘잘했죠. 오라방?’ 하는 눈빛.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냈다.

선우들을 보며 말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돕고 싶습니다.”

김선우가 일어서며 머뭇거렸다.

“왜 문제가 있습니까?”

“영어로 되어 있는데…….”

“상관없습니다.”

그들에게서 계약서를 받아서 찬찬히 검토했다.

“모든 계약이 갑의 입장에서 기술되어 있군요.”

‘갑이 요구하면 을은 요구에 응해야 한다.’의 반복이었다.

갑의 요구 사항만 있으니, 달리 말하면 ‘노예계약’이었다.

내 말에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런 계약을 했을까?

굳이 질문이 필요할까?

책상머리에서 공부만 하던 친구들이 계약서를 봤으면 얼마나 봤을 것이며, 처음에 계약을 할 때, 얼마나 두근거렸을 것인가? 한국의 기업도 아니고, 무려 미국의 회사랑 계약을 하는데 말이다.

‘실력을 인정받으려는 욕심에 덥석 계약한 거네.’

사회라는 곳이 그들의 생각만큼 달달하지 않은데 말이다.

게다가 미국이라면, 계약에 더더욱 민감하겠지.

‘봉 잡힌 거네. 쯧쯧.’

“그 회사랑은 어떻게 이어진 겁니까?”

김선우의 설명에 의하면, 이 세 명이 일본에서 개최된 프로그래밍 대회에 나갔고, 아쉽게도 수상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들의 네트워크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진 ‘아메리카 스마트’에서 연락을 해온 거라고 했다.

“그들을 네트워크를 만드는 회사인데, 우리 프로그램이 창의적이라면서, 계약을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덥석 계약을 했다?”

“조건이 괜찮았거든요.”

조건만 보고 계약 내용을 안 본 게 문제죠.

“그런데 지금 그게 문제가 된다는 거죠?”

“기한 내에 수정 요구를 완벽히 해결하지 못하면 계약 위반이라면서, 위약금을 물으라고 하는 겁니다.”

계약서를 흔들며 말했다.

“계약서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했는데, 억울합니다.”

‘그럼 ‘최선을 다할 경우, 갑도 인정한다.’라는 문구라도 써 놓던가?’

그런 조항을 인정할리도 만무하지만.

나도 답답해서 하는 소리라고.

“정 그러면 계약을 할 때, 변호사라도 한 명 대동을 하든지 할 것이지.”

“그때는 이렇게 나올 거라 생각을 못했죠.”

어떤 프로그램일까?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맞다고 한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아메리카 홈 스마트’는 그걸로 급성장을 했거든.

‘십 년이나 후의 일이겠지만.’

김선우에게 물었다.

“수정 데이터는 다 넘긴 겁니까?”

“아뇨. 세 번은 넘겼고, 이번이 네 번째입니다.”

“기간은?”

“아직 2주 남았습니다.”

“그런데 왜? 계약을 운운한 겁니까?”

“한꺼번에 데이터 수정을 요구하면서, 한 달 만에 해달라는 겁니다. 해보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시간을 한 달만 더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안 된다고 했다는 거죠? 계약을 들먹이면서?”

선우들이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먹튀할 작정인가 보네. 이미 데이터는 어느 정도 받았을 테니.’

해결 불가능한 수정을 요구했다는 것부터가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프로그램도 거의 받았고, 계약금 원금과 위약금까지 받아낼 수 있을 테니,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으리라.

그들에게 물었다.

내게는 확인이 중요했다.

“간단하게 어떤 프로그램인지 설명해 보세요.”

“설명해도…….”

프로그래밍 언어로 설명하면 당연히 모르지.

당신들은 휴대폰 살 때, 기판이 어쩌고 하는 설명이 필요해?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프로그램의 결과만 말해 주세요. 명령어 어쩌고 같은 것은 싹 빼고.”

김선우가 대표로 말했다.

“간단히 말하면, 중앙 제어 시스템을 만드는 겁니다.”

“설명 한번 간단하군요.”

“그러니까 제가 설명하기 어렵…….”

그에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간단해서 좋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제품을 한단어로 설명하지 못하면, 그건 그 제품을 잘 모른다는 말과 같으니까?”

“아! 그렇습니까?”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내 질문이 이어졌다.

“이 프로그램을 건물 전체가 아니라 각 세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거겠죠?”

“아마 조금 바꾸면 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총괄적으로는 중앙실에서도 일일이 제어하고 할 수 있겠죠?”

“네. 그것도 가능합니다.”

“흠. 그렇다는 말이군요.”

‘그럼 홈 시스템으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겠군.’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희가 끼어들었다.

“오빠. 그런 건 왜 물어봐요?”

김선우를 보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뭘 말입니까?”

“그 프로그램, 제가 사겠습니다.”

“에엑?”

정희와 그녀의 선배 세 명이 동시에 경악성을 질렀다.

‘왜? 내 원래 목적이 그거였는데?’

물론 내 생각에 맞춰 많은 변경이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김선우가 버벅거렸다.

“하지만……. 다른 회사와 계약이…….”

정희도 한몫 끼어들었다.

“오빠. 얼만지는 알아요?”

“오억?”

“그쪽 계약금이랑 위약금까지 하면.”

“위약금을 왜 주는데?”

“그럼?”

“불공정 계약으로 무효화시키면 되지.”

“가능할까요?”

“계약을 하게 된다면, 그건 제가 걱정할 문제입니다. 당신들은 그것을 할지 말지만 결정하세요.”

세 명이 의아해하며, 정희를 바라본다.

“선배들. 성훈 오빠 돈 많아요. 그쵸? 내가 아는 것만 몇 억인데.”

하긴 그동안 도산 소장과 일하며 받은 돈만 몇 억이었으니까.

정희가 확신하듯 말을 이었다.

“성훈 오빠 몸값 장난 아니에요! 공모전 한 번만 뛰어도 삼천 이하로는 받지도 않는다고요.”

세 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사기꾼 아니야? 어떻게 공모전 한 건에 삼천을 받는 거지?’라는 눈빛.

꼭 말을 해야 아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그들에게 피식 웃어줬다.

‘당신들과 같은 레벨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삼천 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다른 데 가지 말라고, 도산 소장이 자꾸 몸값을 높여주는 걸 어떡하라고?

물론 ‘다른 건축사들이 같이 해보자며 명함을 건네더라.’ 그 말 몇 번 한 거밖에 없다고.

‘거짓말은 아니잖아.’

정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희 말이 맞습니다. 돈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사와의 엮인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미국의 회사인데.”

김선우의 말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았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답디다. 실력 있는 변호사를 고용하면 됩니다.”

내가 굳이 법률적 지식까지 겸비해야할 이유가 있을까? 건축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아하. 그러면 간단한 문제겠군요.”

김선우가 맥이 빠진 듯, 등받이로 몸을 젖혔다.

잠시 후 김선우가 물었다.

“저희들에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 겁니까?”

저들에게는 구세주로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건 그들의 오산이었다.

‘당신들 좋으라고 프로그램 사려는 거 아니거든.’

내게는 자선사업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당신들이 쥐고 있어 봐야 10년이나 뒤에 빛을 볼 거라고.

뭐 지금처럼, 다른 곳엔 빼앗길 수도 있겠고.

‘허나 이렇게 속내를 보여서는 곤란하겠지.’

“박람회 건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어떤 트러블도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박람회는 연말이나 돼서야 있는 행사가 아닙니까? 아직 서너 달 정도 여유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시간이면 충분히 자신들을 대체할 인원을 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겠지.

“원래대로라고 한다면, 건축과에서 뼈대를 만들어놓고, 타 학과에 일을 분배할 수도 있었지요.”

김선우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타학과들이 건축과의 하청을 받는 꼴이라고.

같이 머리를 굴리며 결과물을 만들고 싶은 거지, 그들에게 명령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음. 어떻게 설명해야 편할까?’

머리를 굴리다가 말을 꺼냈다.

“음식을 만드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겁니다.”

“무슨 의미이신지.”

“뭘 만들지 미리 구상을 한 다음, 그 재료들을 구입하는 방식. 그게 첫 번째죠.”

“그게 일반적이겠죠.”

“그리고 이미 있는 재료로, 뭘 만들지 계획을 세울 수도 있겠죠.”

“흠……. 그럴 수도 있겠군요.”

모든 일의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는 법.

“첫 번째의 방식은 최단 시간에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겠죠. 그만큼 로스도 적고 효율적이죠.”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상식을 벗어나지 못하죠.”

뭘 만들지 이미 아는데, 당연히 상식선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그 맛은 요리사의 숙련도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

“반면 두 번째는 시간과 고민이 더 필요하겠지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요리가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충분한 숙성을 거친다는 조건이 있겠지만.”

김선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요리가 끝날 때까지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가 없겠죠.”

“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결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참 후, 김선우가 말문을 열었다.

“효율성보다는 다양함과 창의성을 살리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사회로 나가면 효율성을 최우선합니다.”

일개 부품에게는 아무도 창의성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잘 해주기를 바랄 뿐.

‘그건 블루칼라나 화이트칼라나 마찬가지지.’

침묵하는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은 학생으로 있는 지금밖에는 없을 겁니다.”

“네. 학생회장의 말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못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일단 내 말을 다 듣고 판단하라고.’

“그래서 당신들이 내 일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왕 식재료를 모을 거라면, 최고의 재료로 모으고 싶은 거죠.”

“그래서 지금부터 사람들을 모은 거군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습니까? 하시겠습니까? 계약?”

“네. 당연히 해야죠?”

선우들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드디어 고생의 해방구를 찾았다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 친구들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정말 박람회 일 때문에 자신들을 도와주는 거라고?

난 그 계약 조건 그대로 내 쪽으로 옮겨 오려는 건데?

물론 약간의 추가조항은 있겠지만.

‘순수한 친구들일세. 이러니 계약사기를 당하지.’

하지만 똑같은 노예 계약이라도, 내 건 좀 다를 거다.

그들에게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정희의 의심스런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녀와 눈을 맞췄다.

‘꼬꼬마.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절대로 손해 보는 계약은 안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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