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209화
뜻밖의 발견(01)
대목장의 울산 진출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오히려 총장이 당황했다.
“어. 아직 학과가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그러게요. 저도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었습니다.”
“박람회도 연말이라 아직 시간이 많은데…….”
“그 준비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시간이 많은 만큼 더 많은 것을 시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학생이었다.
실패를 하더라도 언제든지 기회가 있는.
그것이 학생과 직장인의 차이점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충 하지는 않을 거라고.’
어쩌면 이 작업은 내가 학교에서 하는 마지막 작업일지도 모른다.
왜냐고?
4학년 때는 실습하러 다니느라, 학교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총장이 수긍했다.
“흐음. 알겠네. 일단은 산학협동관이 다 채워지지 않았으니, 그 일부를 전통학과가 사용하도록 내어 주도록 하지.”
“좀 넉넉하게 내 주십시오.”
“그건 왜?”
“대목장을 시작으로 더 들어올 분들이 있을 테니까요.”
“그러도록 하게나.”
이미 총장과는 연초에 학생회장 선거에 나갈 때부터 미리 협의가 되어 있었으므로, 별 문제가 없었다.
“다른 학과의 지원도 잘 부탁드립니다.”
총장이 미소를 띠며 찻잔을 들이켰다.
“걱정 말게나. 최고의 인재들로 선별해서 보내도록 하지.”
그렇게 연말에 있을 박람회를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
학생회장실로 민수가 찾아왔다.
“성훈이 형. 시간 좀 되세요?”
내 책상에 쌓인 서류더미를 보더니, 말 걸기가 미안했는지, 뻘쭘하게 말을 걸었다.
“잠깐만. 이것만 보고 이야기하자.”
회장이란 권력의 자리인 줄 알았거늘, 하면 할수록 일거리가 늘었다.
시작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기왕 손에 쥔 거라면 끝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다 좀 있으면 열릴 ‘대동제’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잠시 동안 민수에게 박람회 건은 일임시켜 놓고 있었다.
대목장이 있으니, 자질구레한 일들은 알아서 처리할 거라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던 것도 있고 말이다.
“총무랑 회계는 어디 가고 형 혼자 계세요?”
“그놈들 바쁘다. 각 학생회 쫒아 다니면서 협의하느라고 말이야.”
잘나고 부지런한 상사 밑에 있으면, 부하의 신발창이 거덜 나는 법.
나 같은 회장을 만난 덕에 기존의 총무와 회계도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부지런한 놈들이었어요?”
“몰라. 나하고 같이 있기 싫은지, 일을 만들어서 나가더라. 그게 나야 편하지만.”
결과가 없다면, 아작을 내겠지만, 무슨 수를 썼는지, 학생회들 간의 조율을 적절하게 하고 있었다.
검토가 끝난 서류를 옆으로 치웠다.
“무슨 일 있어?”
“형. 컴퓨터과 친구들이 바뀔 것 같아서요.”
“왜? 트러블이라도 있어? 걔네들 일 잘 하던데?”
컴퓨터공학과와는 작년부터 왕래가 있었기 때문에 학과장이 특별히 신경을 써 줬었다.
그래서인지 지원하러 온 친구들의 실력도 마음에 들었었다.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니 의아했다.
“앞으로 자신들은 못 나오겠대요.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흠. 이유는 말 안 하고?”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들 실력이 제일 좋을 텐데.”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보니까, 좀 있다가 연락을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담당자면? 꼬꼬마?”
“네. 정희 씨요.”
워낙 작은 체구라서 그렇게 놀리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꼬꼬마라 했다가는 등짝이 남아나지 않겠지만.
생각만 해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안은 있고?”
민수가 입을 삐죽이더니 대답했다.
그로서는 마땅한 대안이 없는 모양이었다.
“좀 어려울 거예요. 정희 씨도 그것 때문에 난감한 모양이더라고요.”
나도 알고 있었다.
제일 뛰어난 인재들을 보냈는데, 대안이라고 해 봐야 그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이겠지.
그건 차선책이지, 대안은 아니었다.
“그럼 일단은 정희랑 통화를 해 봐야겠네. 그거 말고 다른 일은?”
민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내 책상에 쌓인 서류로 시선을 보냈다.
“자질구레한 일이 있지만,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서류에 둘러싸인 나를 배려하는 말이리라.
사람을 대하기 꺼려하는 성격으로 봐서는 자신도 지금의 일이 벅찰 텐데 말이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없이 해주니 고맙네.’
민수가 듬직해 보였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이 필요하면 바로 부르지 그랬냐?”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형이 있었으면 바로 해결을 되었겠죠.”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해결되지 못했지만, 다른 과 학생들이랑 많이 친해졌단 말이에요.”
애초의 걱정과 달리, 민수는 이 일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제 자신이 책임자라는 것을 자각한 것인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내 짐을 나눠지려는 모습이 기특하지 아니한가?
“미안하네. 너무 큰 짐을 안겨준 것 같아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분히 계획적이었다.
언제까지 나 혼자서 모든 것을 총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때가 되면 민수도 대목장처럼 여러 사람을 관리하고, 지시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내게 물어보며 지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저 녀석을 키워 놔야 내가 편해지니, 어쩔 수 없지.’
미래를 위한 과감한 투자였다.
‘실수 좀 하면 어때. 그걸로 배우는 게 있다면, 그걸로 대만족이라고.’
시간도 여유가 있었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중간에서 잘 마무리해 줄 대목장도 있었다.
‘지금 연습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그랬던 것이, 대목장이 경주에 일을 보러 간 사이에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이 건은 내가 정희랑 통화해 볼 테니까, 넌 걱정하지 말고, 다른 일이나 처리해.”
민수가 문을 열며 말했다.
“형.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지금도 눈가가 꺼매요.”
“하하. 넌 뭐 다른 줄 아냐?”
민수가 나가고 의자에 기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건축 모형 몇 개 만드는데, 컴퓨터과가 왜 필요하냐고?’
그럼 꼴랑 건축 모형 몇 개 만드는데, 대목장을 끌고 온 나는 생각이 없는 놈이 되게?
‘다 이유가 있어서 끌어들인 거라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내게는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정희니?”
-네. 오빠. 죄송해요. 먼저 전화 드렸어야 했는데.
그녀는 대뜸 사과부터 했다.
그리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작은 트러블일 뿐인데?
‘다른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아직 해결 되지 않았거나.’
-그 선배들이 요즘 예민해서 그래요. 미안…….
“아니. 혼내려고 전화한 거 아니야.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수화기 너머로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난 또. 오빠가 한바탕 하려는 줄 알고 긴장했잖아요.
“한바탕은 내가 무슨 싸움꾼이냐?”
건너편에서 헤죽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 건축학과 사무실 알지. 거기로 좀 와라.”
***
정희에게 커피 한잔을 건네며 물었다.
“뭐가 문제냐?”
“그게…….”
“민수한테 물어보니까, 자기네 개인적인 일이라고 아무 해명도 없었다던데.”
“네. 그 선배들이 하는 일이 있어요.”
“학교일 말고?”
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들이 산학협동관에 사무실 따로 내놓고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요.”
“뭔지 대충이라도 말해 주면 좋겠는데.”
망설이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문제라야 이해를 하고 넘어갈 거 아니니. 지금까지 그 친구들이 계속 진행했는데, 뜬금없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내 일을 못하겠다니. 너라면 납득하겠니?”
그녀도 알리라.
납득하지 못하는 일을 내가 유야무야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도.
건축과가 아닌, 다른 학과 사람들 중에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은 정희였다.
내게 3D MAX를 배웠던 사람이고, 도산에서 작은 일들은 그녀에게 맡기고 있었다.
덕분에 내 일거리가 줄었지만, 그만큼 시간이 남았으니,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그녀였다.
도산 소장과 일을 하면서, 좋은 일만 있었으랴?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내 사정 봐 주면서 일하는 사람이던가?
매번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본전은 둘째 치고, 서비스까지 몽땅 뽕을 뽑으려고 말이다.
‘그 와중에서 소장이랑 많이 싸웠지.’
그 광경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정희였다.
“오빠. 절대 선배들한테 이야기하면 안 돼요.”
“그래. 알았어. 뭔지나 말해 봐.”
“기업비밀이니까. 절대로…….”
“쓰읍. 알았다니까. 어중간한 허접떼기였으면 이런 말도 안 해. 그나마 능력이 있어 보이니까, 관심 가져 주는 거지.”
“선배들이 개발하고 있는 아이템이 잘 돼서, 외국 회사와 계약을 했나 봐요.”
“잘 된 일이네.”
이미 계약까지 되었으면, 일을 완수하고 잔금을 받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야.”
“일이 거의 끝나 가는데, 중도금도 안 주고, 계속 변경을 요구한다네.”
“그럼 원하는 대로 변경해 주면 되는 거잖아.”
“그런데 그게 보통 까다롭지가 않대.”
서로 간에 안 맞으면 별 수가 있나?
“그럼 파기하면 되지. 뭘 그러냐?”
“그게. 금액이 좀 커.”
“얼만데?”
“오천만 원.”
헐.
학생들에게는 큰 금액이겠지.
일류기업 초봉이 삼천이 안 되는 시기였으니.
“계약금이 오천이라면, 총 금액은 오억이겠군.”
“네 맞아요.”
‘대체 어떤 프로그램이기에, 그런 금액을 준다는 거지?’
“오빠가 모르는 척하고 가서, 뭐가 문제인지 슬쩍 봐 주는 건 어때요?”
“야! 내가 프로그래밍이 뭔지 아냐?”
이 녀석은 뭐가 막히면 나를 부른다.
내가 무슨 만능인 줄 하는 녀석.
정희에게 물었다.
“일부러 잔금주기 싫어서 트집 잡는 건 아니고?”
그런 문제라면 더럽게 걸린 거다.
하지만 이름 있는 외국 회사에서 그렇게까지 할까?
한국에서야 비일비재한 일이지만.
“저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정희에게 아는 것만 말해보라고 했다.
프로그래밍에 관한 말이야, 들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네 말도, 그 회사에서 잔금을 주기 싫어서 그럴 가능성이 많다. 그거지.”
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배들 말을 들어보면 그래요.”
“아참! 회사 이름이 뭔데.”
“오빠도 잘 모를 거예요. 저도 처음 들어보는 회사였거든요.”
‘혹시 알지도 모르잖아. 지금은 유명하지 않아도, 나중에 유명해질 회사라면.’
뭣하면 잘 해결하고, 그 회사 주식이나 사두지.
“훗. 일단 말해 봐. 알지 모를지 들어봐야 알지.”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을 떠올렸다.
“‘아메리카 스마트 어쩌고저쩌고’라고 하던데. 그렇게 유명하지 않고, 얼핏 들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아메리카 홈 스마트 시스템?”
정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어? 맞아요.”
그러더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
“어? 아니다. ‘아메리카 스마트 시스템’이에요.”
비슷한 회사인가? 그게 아니면 나중에 홈이라는 글자를 넣은 것인가?
나중에 홈 네트워크 쪽으로 이름을 날리는 회사였다.
“그런데 그 회사를 오빠가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
그렇겠지.
아직은 유명하지 않으니까.
“그 친구들, 홈 네트워크 시스템을 만들고 있었던 거니?”
“아뇨. 그냥 네트워크 시스템이에요. 왜 자꾸 홈을 붙이세요?”
정희가 내게 핀잔을 주며 웃었다.
컴퓨터 쪽에서 지금은 어떤 평가를 받는지 모르지만, 내가 처음 접했을 때는 눈이 돌아갈 정도의 신기술이었다.
각 방을 왔다 갔다 할 필요도 없이, 거실에서 혹은 리모컨으로 모든 것을 컨트롤 할 수 있는데, 어찌 신기하지 않았으랴?
홈 네트워크 시스템!
나중에 짓게 되는, 지금으로부터 일이십 년 후에 짓는 고가의 아파트에는 일상화가 되겠지만, 지금은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아직은 기껏 해야 호텔이나 최첨단 건물에서의 중앙제어실에서 버튼 식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나도 고급 주택에 가구를 납품하러 들어갔다가 처음으로 봤었다.
‘지금부터 십 년 후쯤이었나? 그 로고를 봤을 때, 역시 미국은 다르구나. 하는 감탄도 했었는데, 그게 우리 대학 학생들이 개발했던 거라고?’
그때의 정확한 정보는 없으니, 내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제대로 만들면 대박을 친다고.
건설기술에서의 발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시대를 10년은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거. 갑자기 땡기네.’
정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꼬꼬마. 가자.”
“엥? 어딜요?”
그러다가 도끼눈을 떴다.
“오라방! 내가 꼬꼬마라고 하지 말랬지.”
철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