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203화 (203/427)

건축의 신 203화

3학년 2학기(11)

“형. 통화 끝나셨어요?”

민수였다.

“응. 왜?”

“할아버지가 들어오라고 하시던데요.”

“그래. 끝났다. 가자.”

***

“나는 이해가 안 된다네.”

최 옹이 말문을 열었다.

“자네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것이. 혹시 내게 신세진 것이 있었던가?”

“아닙니다.”

“그럼 자네 춘부장께서?”

“그것도 아닙니다. 전혀.”

“흠. 그럼 빚 갚기는 아니라는 말이고.”

입을 오므리며 생각을 하던 그가 망설임 끝에 말을 꺼냈다.

“혹여……. 우리 전통 장인들이 불쌍해 보이던가?”

목멘 소리였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으리라.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평생을 버텨왔건만, 지금은 일개 시청 직원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었으니.

‘오해십니다. 불쌍해 보이다니. 제게는 돈의 산으로 보이는데요. 캐도 캐도 끝이 없는 금광산.’

허나 대목장은 총장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그만큼 전통에 대한 감정 또한 남다를 것이고.

‘전통을 팔아먹겠다고 했다가는 멍석말이를 당하겠지.’

예감이 아닌 확신이었다.

당장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릴 수야 없지.’

듣기 좋은 말을 머리에 떠올렸다.

‘여기서 말을 잘 해야 돼.’

“저는 투자를 하는 겁니다.”

“투자?”

“저는 우리 전통이 저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 옹은 내 눈을 뚫을 듯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 높이 봐 줘서 고맙지만, 다 죽어가는 것에 저력이 있을까?”

“드러나지 않았으니 저력이죠.”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저력(底力)은 끝까지 저력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 저력을 봐서 투자를 한다라…….”

언제 나올지 모르는 저력?

‘난 전혀 기다릴 생각이 없거든.’

기다리긴 뭘 기다려!

기차냐?

장유유서, 순서 기다리냐?

끄집어내야 한다고.

한류 바람이 거칠게 몰아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 둬야 기류에 올라탈 수 있다고요.

“전 그 저력을 끄집어낼 겁니다.”

그저 말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가?

그가 물었다.

“도대체 자네가 말하는, 그 저력이라는 것이 뭔가?”

“오백년간 다듬어졌고, 일제치하의 위태로운 시기에도 결국은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 힘이 다한 게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씨 꺼져가는 초에게 ‘언젠가 넌 지금보다 더 찬란하게 불타오를 수 있을 거야.’라고, 희망 고문을 할 생각은 없다.

그럼?

지푸라기를 넣어줄 거다.

장작을 넣어줄 거다.

휘발유를 퍼 부어줄 거다.

‘미친 듯이 타오를 거리를 만들어줄 거거든. 지금까지 어떤 역사에서보다 더 찬란하게 타오르도록.’

최 옹이 물었다.

“그럼?”

몇 년 뒤의 한류 바람은 설명하기 마땅치 않았다.

“지금의 전통은 그 힘이 미약합니다.”

대목장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그건 조선시대 오백년간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음…….”

“최고였기에 살아남은 겁이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아니 오히려 그저 그렇게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외침을 당하면서 깎이고 뜯겨나가 그 정수만 남은 거지요.”

‘그리고 지금은 바람 앞에 촛불이구요.’

오백년간 살아남은 것이 지금은 살아남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세월을 못 이겨서?

시류를 잘 못 읽어서?

그 아름다움을 알아주지 못하는 대중을 원망해 봐야 소용없다.

대중은 값싸고 편한 것을 원할 뿐이거든.

매끄러운 HPM 책상에 익숙해지고, 우레탄 도장에 익숙해진 우리 손은 ‘거칠지만 한없이 부드러운 감촉’을 알지 못한다.

지문으로 즐기는 가구의 촉감을 알지 못한다.

반복된 패턴에, 정형화된 색깔.

우리 세대는 불규칙한 무늬의 한없는 자유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지문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손때 묻은 매끄러운 나뭇결의 느낌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세월이 흘러 본드의 접착력이 약해진 PB 판재와 비교가 될까?

그건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가공하고 남은 찌꺼기들을 모아서 화학약품으로 붙인 것이다.

더럽고 냄새 난다.

낡고 부서지면 불쏘시개로도 쓸 수 없다.

‘그건 애초에 나무가 아니니까.’

반면 전통 장인의 손에서 태어난 가구는 세월이 지날수록 그 세련됨이 더해간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품고 있다.

“이 일에 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그만한, 아니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겁니다.”

확신에 찬 내 말에 최 옹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알겠네.”

“자네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 그리고…….”

최 옹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걸 실행할 능력도, 확실히 있어 보이는군.”

무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는 전통문화시장이기에, 나는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최 옹이 말했다.

“내 최대한 협조를 할 테니, 자네 계획대로 밀고 나가 보게.”

민수와 함께 대목장의 방을 나왔다.

“형이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생각이 깊은 줄은 몰랐어요.”

“쩝. 번지르르 하게 말은 했지만, 결국 결과만을 따진다면 나도 경주 시장과 다를 바가 없어.”

‘전통으로 이득을 취하는 거니까.’

“하지만 시장과는 다르잖아요.”

“그건 맞아. 시장은 수고 없이 열매를 따먹겠다는 거고, 나는 나무를 키우겠다는 거니까.”

“그럼 아예 생각의 시작부터가 다르죠.”

“그래. 물론 결과도 판이하게 다를 거야.”

전통이라는 나무의 열매를 풍성하게 하고, 그걸 다 같이 나눠먹을 거거든.

장인들의 삶은 풍성해지고, 그 뒤를 잇는 자들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선망직업 1위가 공무원이나 ‘사’자 직업이 아니라, 전통 장인이 되는 시대를 만들고 싶었거든.”

“헉. 대단한 꿈인데요?”

‘물론 가장 많이 덕 보는 사람은 내가 될 거야.’

왜냐고?

내가 거름 주고 물을 뿌렸으니까.

‘그건 나의 권리라고.’

한류의 바람을 타면서도, 그 바람에 돛을 폈던 것은 음식이었고, 드라마였고, 음악이었다.

한국 정부에서 국책 사업으로 미는 것이 아니냐 하는 루머가 돌 정도로 잘 나갔었다.

하지만 나머지 분야에서 모두 그 혜택을 구가하지는 못했다.

“내 생각이 실현되려면 확실한 준비가 필요해.”

“당연하죠. 준비 없이 무슨 미래가 있겠어요?”

허나 우리 전통의 십 년 후는 참담하다.

지금보다 더.

‘넌 미래를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겠지.’

“전 전통 가구를 만들면서도 고민이 많았어요.”

“왜?”

“과연 내가 만든 걸 사람들이 사용할까? 만들어도 쓰지 않으면, 사가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잖아요.”

“음. 맞아.”

“그런데 형은 그런 방법을 알고 있는 거잖아요.”

“누가 그러던데?”

웃음 섞인 내 농담에 민수가 말했다.

“형은 절대로 맨 땅에 헤딩하지 않거든요.”

녀석이 다 안다는 웃음을 지었다.

‘녀석에게 네 할아버지를 이용해 먹을 거야.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먼 훗날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알면 나만 잘 따라와라.”

“이제 고민이 없어졌어요.”

“왜?”

“형이 전통의 저력을 끄집어낸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형이 그렇게 만들어 줄 거니까. 전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되는 거죠. 안 그래요?”

“그래. 믿고 따라와.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역시 형은 할아버지와 함께 할 자격이 있어요.”

“뭘. 자격씩이나.”

“할아버지도 저처럼 생각하셨을 거예요.”

늘그막에 장인 혼을 불태운다는 의미인가?

‘좋은 현상이지.’

민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가자. 할 일이 많다.”

***

다음 날 아침.

울산 시장이 왔다.

그의 전용차 외에 버스 한 대도 같이 도착했다.

나와 보니, 삼십 명 가량의 사람들이 집 밖에서 웅성대고 있었다.

울산시와 함께 일하는 건축가들이었다.

“저분들은 다 뭡니까? 시장님?”

“엉? 이 친구들도 성훈이 네가 뭘 하는지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자기들이 따라온 거지, 오라고는 안 했어.”

시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허공으로 책임을 떠넘겼다.

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우면서도 고마웠다.

“야. 이런 데 왔으면 나부터 불렀어야지.”

그는 이미 집을 한 바퀴 돌아봤는지, 내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성훈아. 대목장 어르신 계시냐?”

“네. 교수님.”

“그럼 얼른 들어가서 인사부터 해야지. 여보게들 들어가세.”

초대하지도 않은 자들이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는 인사를 하겠다고 설친다.

허나 그 모습들이 보기 싫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에 힘을 실어주려고 온 거잖아.’

시장을 비롯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최 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장이 얼른 다가가 최 옹의 손을 덥석 잡고 악수를 했다.

“아이고. 어르신. 반갑습니다.”

‘거참. 굽힐 때는 또 확실하게 굽힌단 말이야.’

시장을 모르는 최 옹이 나를 멀뚱히 바라본다.

“성훈 군. 이분은 뉘신가?”

“그분은 어제 말한 시장님이시고, 뒤의 분들은 저희 학교 교수님과 건축가들이세요.”

“어. 엉. 그래. 뭐. 시장님?”

시장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다짜고짜 그를 안방으로 떠밀었다.

그리고 대청에 사람들을 정렬시켰다.

“여러분. 일단 절부터 합시다.”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했다.

대목장은 경황이 없는 듯,

“아이고. 아이고. 이러시면 곤란…….”

허나 말을 끝맺을 정신이 어디 있는가?

상대가 절을 하면 자신도 해야 하는 법.

나이는 그가 많음이 확실하나, 어디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아 봤겠는가?

그도 얼른 일어나 맞절을 했다.

그의 아들이 황급히 뒤를 따랐음은 물론이고.

‘너구리같으니! 처음부터 혼을 쏙 빼놓는구먼.’

시장은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나 신경을 많이 쓰고 있소!’하는 걸 인해전술로 보여주고 있었다.

시장이 나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나 잘했지? 라고 얼굴에 쓰여 있네. 하하.’

그 장난스런 모습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이 정도 임팩트로 다가왔으니, 경주 시장과는 처음부터 차이를 벌릴 수밖에 없으리라.

인사가 끝나고, 대뜸 한 교수가 말했다.

“대목장 어르신. 한승원입니다. 오매불망 만나 뵙기를 바랬는데,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목장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걸렸다.

“반갑습니다. 우리 민수 지도교수시라고요.”

한 교수도 마주 웃으며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말씀 낮추시지요. 어르신. 실은 만나 뵈면 여쭤볼 게 있었습니다.”

“물어 보시게.”

그렇게 한 교수의 질문이 시작되었고, 그걸로 불이 붙은 전통 건축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다른 건축가들도 눈을 빛내며 그 논의에 합류했다.

시장이 슬며시 빠져나와 내게로 왔다.

“난 저 친구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난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밖에!

그들만의 건축 언어로 말하고 있었으니까.

병풍이나 하라고 불렀지만, 지금 시장은 꿔다 논 보리자루만큼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제 역할은 완벽하게 하는군.’

시장이 물었다.

“오면서 오늘 아침 신문 봤다네.”

“아. 그거요?”

“무슨 내용인지 벌써 아나 보지? 계속 경주에 있었으면서?”

그가 묘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아차! 시장은 몰랐지?’

가급적이면 나와 대목장 사이에 다른 사람을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대목장은 나와만 이어져야 한다.

‘아직 확실한 유대관계가 없을 때, 날파리가 끼어들어서는 곤란하다고.’

시장이든, 총장이든 내게 만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 둘은 대세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큰 파리거든.

지금이야 이용할 수밖에 없어서 가까이 하지만.

‘저리 가! 왕파리야. 훠이! 훠이!’

시장이 능글거리며 말했다.

“대목장 데려오려고 처음부터 작정을 했던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영문을 모르는 척 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홍 기자가 다 불었어. 발뺌할 생각하지 마.”

“이 인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가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잖나? 내가 오늘 대목장을 방문하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전통 관련 인물을 특별 란에다 기사로 써놨더라고. 그것도 경주 사람으로.”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일부러 그런 거지?”

‘눈치 백단이네.’

“그래서 오는 도중에 전화로 캐물었지. 어떻게 된 거냐고.”

이왕 들통 난 것 감춰 봐야 소용없다.

차라리 명확하게 선을 그어두는 것이 나았다.

“시장님. 이건 확실하게 하고 지나가시죠.”

단호한 내 말에 그가 뜨끔하며 물었다.

“뭘?”

“시장님은 지지율, 저는 대목장.”

“그게 뭐? 당연한 거잖아.”

“그 당연한 걸 확실하게 하자는 말씀이죠.”

“하하하. 그러니까 대목장은 성훈이 네 거다. 욕심내지 마라. 그거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그리고 …….”

“그리고 또 뭐?”

“저 말고는 대목장을 건드릴 사람이 없게 해주세요. 설령 그게 우리 대학 총장이라도.”

“호오? 그 양반도 눈독을 들이나?”

“아직은요. 하지만 데려가면 그럴 거예요. 커버해 주실 거죠?”

“흐흐. 누구 부탁인데……. 알았어.”

그가 능글맞은 눈으로 웃었다.

‘신세를 지웠다고 생각하겠지. 월드컵까지만 기다려라. 신세진 걸 모두 초기화시켜줄 테니까.’

필요할 때는 신세도 져야지, 어떡하나?

‘한동안 시장이 방파제 역할을 해주겠지.’

그렇게 떠들썩한 가운데, 점심 때 쯤 오매불망 기다리던 불청객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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