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95화
3학년 2학기(03)
문턱을 넘어서는데, 작은 비석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런 글이 음각되어 있었다.
身體髮膚 受之父母
(신체발부 수지부모)
不敢毁傷 孝之始也
(불감훼상 효지시야)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입신행도 양명어후세)
以顯父母 孝之終也
(이현부모 효지종야)
몸과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니라.
조선 고종 때, 단발령에 항거하여 유학자들이 반박하며 했던 말이다.
“‘효경(孝敬)’의 한 구절이래요.”
민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양반스럽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네.
집안에도 이런 게 서 있다니.
***
지금 나는 대목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다른 장소였다면 위화감을 느끼거나,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대목장의 말씀을 귀로 경청하며, 눈으로는 방의 구석구석을 훑었다.
‘대목장 뒤에는 8폭 병풍, 앞에는 경상(經床)*, 좌측에는 서가가 있었고, 맞은편에는…….’
굉장히 오래된 농(籠)이 있었다.
보통은 ‘장롱’이라 하면 수납가구를 통칭하지만, 엄밀히 말해, 장(欌)과 농(籠)은 구분된다.
밖에서 볼 때도 이런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 원, 살면서 이런 집에 와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 봤다고.’
지금 나는 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바닥은 한지로 마감되어 있었다.
‘장판도 마루도 아닌 한지란 말이야. 그리고 이 아래는 보나 안 보나 구들장이겠네.’
이런 집에서 기름보일러를 쓴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가?
오면서 봐도, 그런 기계가 있는 듯 한 느낌은 없었다.
사극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간다면 딱 이런 느낌일 거야.’
민수도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대목장의 말씀 중간 중간에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조선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앞의 대목장이 양반다리를 하고 하얀 베옷을 입었으나 상투를 틀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이리라.
그 상투 틀지 않은 것이 더 어색했지만, 어쩔 수 없었으리라.
대목장은 반짝 대머리였으니까.
‘허허허. 이것 참.’
겉으로는 진지하게 경청하지만, 속으로는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 참. 살다 살다.’
‘지금은 2000년이다.’라는 사실은 머리에서 되뇌기는 처음이었다.
왜 이런 자세를 하고 있냐고?
민수 녀석이 말했었거든.
“형. 들어가자마자 큰 절부터 해야 해요.”
“엥? 큰 절?”
여기가 청학동도 아니고, 무슨 큰 절을 한다는 말이야?
“그게 이 집의 예법이에요.”
“그래. 할아버지께서 양반스럽다고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큰 절이 대수랴?
“네가 먼저 앞장서라. 네가 하는 대로 따라 할 테니 말이야.”
“네. 알았어요.”
안채가 보일 때 쯤, 민수가 말했다.
“잠시 무릎을 꿇고 있을 수 있는데, 다리가 저려도 좀 참으세요.”
“녀석. 대체 날 뭐로 보고!”
호탕하게 말하는 나를 보며 녀석은 피식 웃기만 했었다.
지금은 손이 근질거려 죽을 것 같았다.
‘얼른 코에다 침 발라야 하는데…….’
민수가 곁눈질로 말했다.
‘바쁘신 분이니까, 오래 계시지는 않을 거예요.’
‘괜찮아. 이 정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녀석을 안심시켰다.
발가락 끝에 피가 통하지 않아서 간질간질하다.
내 눈이 농을 향한 것을 본 최 옹이 물었다.
“성훈 군. 자네는 저게 뭔지 알겠나?”
“여닫이 농이 아닙니까?”
“여닫이 장이 아니고?”
‘흐음. 나를 시험하려 하시는 건가?’
속으로 코웃음 치며 그의 질문에 답했다.
“장과 농은 그 형태에 따라서 구분됩니다.”*
“흠.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는 하지만, 만족스러운 눈빛은 아니었다.
‘일단 전통에 관심이 많다고 어필을 하면 대목장에게 점수를 좀 딸 수 있지 않을까?’
농에 관련된 약간의 지식을 늘어놓았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농에 관련된 기록이 있더군요.”
“호오. 젊은 친구가 꽤나 관심이 많은 모양이구만. 그래서?”
최 옹이 드디어 내게 흥미를 보였다.
그가 보기에는 내가 신기했을 수도 있으리라.
전통 가구를 전공, 계승한 사람이 아님에도 그런 지식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세월이 조금만 지나면, 인터넷으로 모든 걸 찾을 수 있다고요.’
하지만 지금은 책과 경험이 아니면 알기 어려웠고, 그 책 또한 구하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최 옹에게 설명을 이었다.
“농은 원래 죽기(대나무 그릇)를 의미하는 것인데 목조ㆍ고리버들을 써서 사용하는 것도 역시 농이라 이르니, 이는 그 이름을 차용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이어지는 말을 더해 알고 있는 설명을 마쳤다.
이번에는 만족한 눈빛이었다.
최 옹이 말했다.
“젊은 친구라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는 재기가 있구먼. 저 여닫이 농은 30년 전에 작고하신 소목장 박주욱 옹께서 젊으실 때 만든 농이라네.”
확실히 그 정도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농이었다.
‘작고하신 소목장이 젊을 때?’
“그렇다면 최소 50년이 넘은 거네요?”
“그런 셈이지. 내 스승님이 돌아가신 지, 어언 50주기 되어 가니 말일세.”
오래된 집에 오래된 가구, 그것에 어울리는 오래된 사람이었다. 최기형 옹은 말이다.
‘세련된 양복을 입고 있었다면 더 어울리지 않았겠지.’
내 생각을 모르는지, 그의 자랑이 이어졌다.
“그분은 저 농을 스승님께 우정의 증표로 선물하셨지. 왜 그런지 아는가?”
“왜요?”
“내 스승님의 인품에 감복하셨던 게지.”
어떤 인품인지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음성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사실, 내 관심사는 농이 아니었다.
농 위에 놓은 것들 중, 작은 백자 항아리가 있었다. 조각조각 깨진 것을 붙여 놓은 듯, 하얀 몸통에 금이 쫙쫙 가 있었다.
‘뭔가 어울리지 않잖아.’
항아리의 나이는 농과 비슷하리라.
완벽하게 조선시대를 재현하는 이 방안에서 그 깨진 항아리만이 다른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저 볼품없는 항아리가 수천만 원대의 가치를 가지는 것도 아닐 것이고, 뭔가 용도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저게 말하는 바가 뭘까?’
이 집안에서 필요 없는 것은 없었다.
병풍?
그저 장식의 용도로만 보이는가?
‘저건 외풍이 불 때, 바람을 막는 용도라고.’
현대 가옥에서는 필요 없는 물건으로 장식적인 용도로만 사용되었지만, 이곳에서는 그 자리를 차지할 당당한 이유가 있었다.
병풍마저도 그럴진대,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
‘그런데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깨진 항아리라.’
보수를 하려고 하면 할 수 있었을 것이며, 다른 항아리를 가져와 장식할 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주인에 의해 내쳐지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깨지지만 않았더라면, 자연스럽게 자리에 어울렸을 거야.’
이야기하는 사이에 다탁이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큰어머니.”
민수가 일어나 다탁을 건네받았다.
다탁을 내온 이는 최 옹의 맏며느리였다.
먼저 최 옹에게 인사하고, 내게도 인사를 건넸다.
선이 곱고, 후덕한 얼굴에 자연스러운 웃음이 대목장의 맏며느리로는 더없이 잘 어울렸다.
“민수 친구인가 보군요. 밥 준비하고 있으니까, 이따가 식사 들고 가요.”
“네, 감사합니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며 자세를 바꾸려는 순간, 발끝이 찌르르 울렸다.
“으윽.”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최 옹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대목장이 물었다.
“어흠. 자네는 그 자세가 편치 않은 모양이로군.”
‘당연하죠. 이 영감님아.’
글로벌 월드가 유행하는 이 판국에 좌식 생활이 웬 말이란 말인가?
‘박람회만 아니었다면, 벌써 뛰쳐나갔을 거야.’
답답한 내가 우물을 파야 하니, 상황에 맞추고 있을 뿐.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오랫동안 해 보지 않을 자세라 불편한 건 사실입니다.”
옆에 있던 민수의 안색이 급변했다.
눈짓으로 나를 말렸다.
‘형.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역정이라도 내시면…….’
‘왜? 왜 안 되는데?’
그도 나를 시험했는데, 나도 최 옹을 시험해 봐야 하지 않겠어?
그는 내게 소문만으로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만약 함께 일하게 된다고 치자.
아니 어쩌면 평생을 함께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저 필요하기 때문에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선장이 항해사의 눈치를 보며 지휘를 할 수는 없는 법.’
내 배의 예비 항해사가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파악해 봐야지.
만약 나와 함께 하기 어려운 부류라면, 그에 걸맞은 중간 전달자가 필요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서로 영혼을 교감하는 거겠지만, 내 성질을 죽여 가면서까지 그러고 싶은 마음은 일체 없다고.’
‘오히려 다루기 쉬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돈, 명성,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 필요 없이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면, 그것은 더 어려울 수 있었다.
그렇게 최 옹의 영역에 한 발을 슬쩍 들이밀었다.
민수, 네 걱정이 뭔지는 알아.
‘뭐 어때? 아니다 싶으면 뒤로 물러나면 되지.’
이런 사소한 것에 일일이 반응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대하기 쉽다.
일희일비하는 사람은 항상 희희낙락하게 해 주면 된다. 비비참참하지 않게 만들면 된다는 말이다.
기분을 맞춰 주면 되는 것보다 편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조종법을 알면 조종할 수 있다.
가장 힘든 것은 직진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게 맞다고 생각해서 돌직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인생의 항로가 이미 정해져 있기에 타인의 간섭으로 그 자신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만 배가 움직여도 난 만족한다고.’
민수 생각처럼 마냥 한쪽이 숙여서는 그 이상의 관계가 되기 어렵지 않을까?
분명히 민수도 말했었다.
양반스럽기는 하지만, 무서운 분은 아니라고 말이다.
민수가 알고 있는 최 옹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을 할 것이지. 편히 앉게나.”
“네? 정말이세요? 할아버지!”
나보다 민수가 더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민수처럼 반문할 여유조차 없었다.
전기가 통하는 다리를 펴기 바빴으니까.
“으그그그.”
다리를 주무르며, 혈액 순환을 도왔다.
“형. 좀 도와줄까요?”
민수가 내 허벅지를 슬쩍 건드렸다.
“윽. 민수야. 살살. 살살. 전기 온다고.”
근엄한 대목장 앞에서 오두방정을 떨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럴 때는 그냥 가만히 놔두던가, 확실히 주물러버리는 게 나아요.”
우악스럽게 주무르는 녀석의 손길에 온 다리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킨다.
“아그그그. 이 녀석이.”
지긋이 나를 보는 최 옹에게 물었다.
“왜 이런 좌식 생활을 고수하시는 겁니까?”
장인정신 때문에 이런 생활을 고집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당신의 장인정신을 존경해 주지.’
최 옹에게 도전적인 눈빛을 보냈다.
내 말에 그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묘한 웃음이었다.
“이런 생활이란 어떤 생활인가? 불편함을 말하는 것인가?”
“네. 정확하십니다.”
나도 모르게 약간 심통이 나있었던 모양이다.
최 옹의 태도가 내 예상을 벗어난 것도 있으려니와, 괜히 고생을 사서했다는 억울함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자연스럽게 투정 섞인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말일세.”
그가 입을 열었다.
※ 작가주
? 경상(經床) : 양끝이 말려 올라간 좌식 책상.
? 장롱(欌籠) : 보통 ‘장롱’이라 하면 수납 가구를 통칭하지만, 엄밀히 말해 구분되며, 용도나 재료보다는 형태가 구분의 기준이 된다.
공식적으로 쓰이는 둘의 분류 기준은 ‘분리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선반으로 인해 몇 칸으로 나뉘든, 하나의 몸체라면 장(欌), 공간의 분리에 따라 몸통이 분리된다면 농(籠)이라 분류한다.
장은 몇 개의 고정 선반으로 공간을 분할하며, 농은 하나의 공간을 하나의 박스로 구성한다.
그리하여 농은 위아래의 두 짝과 그 아래 다리로 분리된다.
또한 운반의 편의를 위하여, 측면 널판에 손잡이가 달려있다.
장은 여전히 그 형태가 남아 현재에도 많이 활용되고 있으나, 농은 그 본연의 형태를 실생활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